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102화 (102/120)

죽어라 (1)

[00 : 03 : 05 : 25]

날이 너무 좋았다.

[00 : 03 : 05 : 24]

이런 뭐 같은 날엔 조금 안 어울릴 정도로.

[00 : 03 : 05 : 23]

지금 이 순간도 아주 착실하게 ‘0’으로 향하고 있는 시계.

남도윤은 따사로운 햇살이 머무는 의무실 천장을 흐린 눈으로 멍하니 응시했다.

딱―! 딱―!

“……야―! 남도윤―!”

흐릿한 시야에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성준기의 손가락과 멍한 정신을 깨우는 경쾌한 알림.

남도윤은 그제서야 천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의무실 책상 앞으로 내렸다.

“……어, 준기야.”

다시 또렷해지는 시야에 담겨오는 성준기의 걱정 어린 얼굴.

“……괜찮냐?”

남도윤은 다시 맞은편 의자에 앉는 성준기에게 보란 듯이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그 그림 같은 호선에도 굳은 얼굴을 풀지 않는 성준기.

하아―

이내 긴 한숨을 내쉰 성준기가 남도윤이 듣지 못했을 이야기를 다시 반복했다.

“농과대에 있던 식량과 물자들. 다른 단과대로 옮겨 놓는 거 완료했다고.”

“……다른 단과대?”

“……그래. 한세계가 우리 본거지를 알고 있으니 혹시 모를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물자들을 분산시켜놓자고 했잖아. 애들이 했던 말인데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너한테 말하니까 네가 그렇게 하자고 했었잖아.”

아직도 멍한 기운이 남아있는 남도윤을 노려보며 구체적으로 읊어주는 성준기.

“……기억 안 나는 건 아니지?”

남도윤은 의심보단 걱정이 훨씬 진한 그의 물음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어떻게 까먹어.”

“어쨌든― 물자도 안전하게 옮겼고 곧 있으면 기숙사 캠프원들도 합류할 거야.”

“……린네아 씨는?”

“당연히 합류하시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일단 동맹끼리 뭉치는 게 먼저니까.”

성준기가 허공에 출력되는 시간을 올려다보며 뇌까렸다.

“그래야 남쪽 생존자들을 구출하기도 더 수월할 거 아니야.”

“……그렇지.”

결전의 날이라기엔 너무나도 힘없는 대답.

공기가 다 빠진 풍선처럼 흐물흐물한 목소리에 잔뜩 찡그려진 얼굴이―

“……하아―.”

이내 다시금 흘러나오는 한숨과 함께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아직도 피하고 있냐?”

성준기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남도윤과 허공의 제한 시간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제 3시간도 안 남았다, 새끼야.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피하기만 할 건대?”

“……그냥― 대화가 계속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더라고.”

나나, 하얀이나.

남도윤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피할 수 있는데 까지는 계속 피하고 싶은데…….”

“……하아― 진짜 왜 이렇게 꼬여버린 거냐…….”

무거운 한숨과 함께 푸념을 중얼거린 성준기가 다시 남도윤을 응시했다.

“그러면 강청신, 그 사람은 어떻게 할 건대?”

“……강청신 씨.”

“그래, 이렇게 되면 거의 5일 동안 강의실에 감금한 꼴이잖아.”

애들한테 들어보니까 계속 너랑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요구한다던데.

“……그대로 두자.”

“그냥 그대로 두자고?”

“어. 어차피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고 달라질 상황도 아니잖아.”

준기 네 말대로, 이제 세 시간도 안 남았어.

피아식별 제한 시간을 바라보는 남도윤의 입가에 자조 섞인 미소가 머물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 시간 뒤면 모든 게 결판나겠지.”

“그래. 생각해보면 미리 남쪽 생존자를 구출한 셈 치면 되는 거니까.”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계속해서 힘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흐릿한 목소리.

“야, 남도윤.”

결국, 이번에는 참지 못한 성준기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그런 식으로 씨불이면 이길 싸움도 못 이겨, 이 씨발놈아.”

으르렁거리며 욕설을 내뱉은 성준기가 속사포처럼 다음 말을 이었다.

“자기 혼자 알아서 할 테니 하얀이 먼저 구하라던 새끼는 어디 가고― 이 씨발, 너 지금 그 좆같은 얼굴로 린네아 씨랑 애들 앞에 서려는 건 아니지?”

“…….”

“새끼야 계속 실실 쪼개지 말고 말을 하라고 말을―! 도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좆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고―!”

의무실을 우렁차게 울려대는 성준기의 포효.

그 강렬한 외침에도 실없는 웃음을 흘려대던 남도윤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성준기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냥 생각해보면 너무 어이가 없잖아, 준기야.”

“아무런 전조도 없이 세상이 좀비로 망해버리고― 갑자기 뭔 외계인 같은 것들이 나보고 어진 일을 하래. 뭐― 툭 던져준 역할이 성군이니까 착하고 좋은 일을 하라는 건가?”

계속해서 토해내는 잔웃음에 남도윤의 어깨가 옅게 흔들거렸다.

“그래. 일단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이 귀신같은 놈이 하라는 대로 착하고 좋은 일을 했어. 최선을 다해서 내가 생각하는 착하고 좋은 일들을 했다고, 준기야.”

“…….”

“그런데― 이젠 잘 모르겠네.”

남도윤은 여전한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얀이랑 이렇게 계속해서 부딪치고, 또 하얀이가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뭔가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은데…….”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내가 잘못한 점이 뭔지 잘 모르겠어, 준기야.”

성준기는 자신을 바라보며 옅게 웃어대는 남도윤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남도윤의 저 허탈한 웃음이 그의 부글부글 끓던 화를 천천히 식혀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만 생각이 다 드는 거지, 뭐―.”

남도윤은 다시금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했던 일들이 정말 착하고 좋은 일들이 맞았나?”

지금의 난―

“이 뭐 같은 속칭이 말하는 대로 성군이 맞긴 한 건가?”

“…….”

성준기에게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무거운 주제였다.

“야― 그래도 너는 임금이기라도 하지― 씨발 나는 갑자기 칼잽이라잖아.”

씨발― 어디 동네 조폭 똘마니 이름도 아니고.

하여, 성준기는 다소 뜬금없는 농담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넌 그냥 딱 봐도 어울리잖아. 얼굴만 봐도 너는 그냥 반석대 칼잽이야.”

“새끼가― 사람 얼굴 가지고 뭐라 하네.”

남도윤은 성준기의 농담을 받아주며 장난스레 웃었다.

허나, 성준기의 투덜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그에반해 나는―.”

남도윤의 얼굴이 다시 흐릿해졌다.

끝말을 맺지도 않고 좌우로 흔들어대는 남도윤의 고개.

“……그냥 매 순간순간이― 숙제를 검사받는 어린애가 된 것 같아.”

처음으로 듣게 된 말들이었다.

남도윤이 말하지 않았던 그의 고충.

“…….”

성준기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친구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줄어드는 시간을 체크하던 눈짓을 멈추고 남도윤과 똑같이 바닥을 응시했다.

────────.

때아닌 적막에 휩싸이는 의무실.

“……기억나냐?”

그 고요를 깨고 흘러대는 성준기의 물음에 남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무슨 포차였는데……. 씨발 대학로에 뭔 포차가 좀 많아야지. 어쨌든 뭔 뒤풀이 때문에 존나 새벽까지 술을 퍼부었던 날로 기억하는데.”

툭―!

성준기가 발로 가볍게 바닥을 내리찍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새끼들이 얼마나 꽐라가 됐던지― 씨발 오줌 싸러 화장실을 간 새끼를 집에 갔다고 착각하고 얼마나 뒷담을 까던지.”

“…….”

“후배들한테 말을 험하게 한다― 뭐 입에 욕을 달고 산다― 뭔 일만 일어나도 다혈질적으로 받아들인다― 사람이 질이 안 좋은 부류 같다 등등― 씨발 아직도 토씨도 안 틀리고 기억나네.”

툭―!

계속해서 퉁명스레 바닥을 툭― 툭― 내려찍는 발길질.

“그렇게 후배 새끼들이 너한테 열심히 경고해줬는데―”

그렇게 바닥만을 쓸어내리던 성준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는 왜 그날부터 보란 듯이 나한테 친하게 굴었냐?”

“…….”

성준기의 물음에 자연스레 새어 나오는 웃음.

조금 전에 맺고 있던 웃음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미소가 남도윤의 얼굴에 맴돌았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사람을 더 호감으로 만들어주니까.”

“…….”

“어릴 적부터 쌓아온 이미지 관리 스킬이지.”

“……씨발― 존나게 솔직하네.”

푸핫―!

성준기의 걸쭉한 욕설에 남도윤이 크게 웃으며 낄낄거렸다.

“새끼가 그런 말을 듣고도 갑자기 존나 친한 척해서 난 게이 새낀가 했는데.”

“그냥 얌체 같은 짓을 한 거지, 새끼야.”

“……얌체.”

그리고 숙제.

툭―!

성준기는 그리 읊조리며 다시 바닥을 툭― 툭― 내리찍었다.

“……그 얌체 같은 짓을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겠지.”

의식적으로 기를 쓰고 아래만 바라보던 성준기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그 숙제 같은 짓거리에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무조건 있다고, 이 병신 새끼야.”

오글거림을 참듯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 성준기가 몸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씨발 그러니까 그 중2병 비슷한 궁상 좀 그만 떨고 정신 좀 차려라, 새끼야.”

성준기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목검을 챙겨 들며 잠시간 외면했던 제한 시간을 응시했다.

[00 : 02 : 15 : 55]

“오늘 정신을 안 차리면, 도대체 언제 정신을 차려야 되냐.”

똑― 똑― 똑―

성준기의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

“……오빠, 저예요.”

성준기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차하얀의 노크 소리에 남도윤을 응시했다.

끼이이익―!

언제나 그렇듯, 차하얀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얼어있는 남도윤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대신해서 의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활짝 열린 문을 빗금 삼아 서로를 응시하는 차하얀과 남도윤의 눈망울.

“……슬슬 제대로 준비하자, 도윤아.”

성준기는 바짝 얼어있는 남도윤에게 돌려서 경고하며 의무실을 나섰다.

“마지막 점검하고 있을 테니까 단단히 준비하고 나와라.”

마주친 차하얀에게 옅게 웃어주며 건네는 마지막 말.

뚜벅― 뚜벅―

차하얀이 부드럽게 몸을 틀어 열어준 공간으로 성준기가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차하얀은 멀어지는 성준기의 등을 바라보다 다시 의무실 안의 남도윤을 응시했다.

“…….”

파르르― 떨리는 눈망울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남도윤.

이내, 입을 꾹 다물며 무언가를 다짐한 남도윤이 천천히 책상 앞을 손짓했다.

“……들어와, 하얀아.”

그동안 아주 기를 쓰고 피해왔던 대화의 재개.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리던 대화를 끝내보겠다는 의지의 신호에도 차하얀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요.”

대신 그녀는 남도윤을 향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대화를 나누러 찾아온 게 아니에요, 오빠.”

어색하게 그녀를 향해 웃던 미소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 삐걱거리는 표정 변화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내보이는 차하얀.

허나, 그 미소에서 처음 느껴지는 선명한 쓴맛에 남도윤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늘은―”

쿵― 쿵― 쿵― 쿵―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수없이 가슴을 치대며 박동하는 심장.

남도윤은―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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