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라 (2)
삐이이이이이―
멍해진 귓가를 울렁이게 하는 익숙치 않은 전자음.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손을 뻗어오는 남도윤.
툭―!
차하얀은 한 발자국 물러서며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했다.
의무실 문을 통해 이루어졌던 빗금은 농과대 복도에서도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그녀를 붙잡지 못하고 어색하게 거두어지는 남도윤의 손.
차하얀은 그 손짓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내지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었다.
그녀를 계속해서 뒤로 밀어주는 힘은.
차하얀은 아직도 흘려보내지 못한 옥상의 밤바람을 느끼며 그녀답지 않은 헛웃음을 흘렸다.
지난 며칠이 남도윤에게는 도피의 시간이었다면―
차하얀에게는 자각의 시간이었다.
삐이이이이―
또다시 서둘러 입을 여는 남도윤의 입가에서 익숙치 않은 전자음이 흘러들었다.
그 지나치게 뚜렷하고 선명한 소음에 차하얀은 도망치듯 눈을 감았다.
천천히 어두워지는 시야에 그리 어둡지 않은 풍경이 그려진다.
휘이이이잉―
시커먼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는 편안한 미소.
대체로 모든 의사소통이 긍정으로 통하는 그녀에게는 사뭇 어색한 설득을 위한 대화.
그 어색함을 토로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내짓는 그 얼굴.
‘야― 어색하긴 뭐가 어색해. 방금까지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 사람들이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사람이.’
‘…….’
딱히 반론할 말은 없는, 그치만 왠지 모르게 속상해지는 냉정한 대답.
조용히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시선이 밤하늘로 돌아간다.
‘……그렇게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이니 진심으로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되잖아.’
갑작스레 차분해진 음색에 자연히 돌아가는 고개.
차하얀은 지그시 자신의 눈망울을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다음 이어질 말을 되뇌었다.
‘진부한 말이지만, 결국 진심은 통하는 법이니까.’
낯부끄러운 말 뒤에 이어지는 어색한 미소.
차하얀은 그 미소에 고개를 끄덕였던 그날과 다르게,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설득하는 일.
그녀가 해본 적 없는 이 어색한 일은―
어색한 일이 아니라,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주 어릴 적부터 깨달았듯이― 어떤 순간, 어떤 누군가에는 진심보다는…….
────────.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귓가에 흘러들지 않는 소음.
천천히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그런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남도윤이 맺혀왔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하얀아…….”
허망한 목소리로 파르르 떨려오는 남도윤의 물음.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차하얀의 시선에 남도윤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도대체 왜 그런 살인자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거야, 왜…….”
“……그건 한세계 씨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제가 몇 번이나―”
“살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없다고 했잖아아아―!”
쿵―!
흐르다 못해 넘치는 감정을 쏟아내듯 바닥을 구르는 남도윤의 발.
깜짝 놀라 눈을 크게 치뜨는 차하얀에게 우악스러운 손가락질이 이어졌다.
“먹을 것을 뺏기 위해 죽이고―! 살 곳을 빼앗기 위해 죽이고―! 신분이 미천해서 죽이고―! 하는 짓이 건방져서 죽이고―! 너무너무 숭고한 뜻을 위해 죽이고―! 나라를 위해, 윗사람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리고 그냥 심심해서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 살인은 점점 절대 해선 안 되는 일로 자리 잡았어! 그 이유가 넌 뭐라고 생각해―?!”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남도윤의 포효.
차하얀을 향해 눈을 크게 치켜뜬 남도윤이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결국 그 끝은 파멸뿐이라는 걸 모두가 깨달았기 때문이야―!”
“사람을 죽인다는 걸 쉽게 말하지 마! 그걸 쉽게 입에 올리면 우리에게 남는 게 도대체 뭐야?! 안 그래도 뒤틀린 세상에서 서로 뭉치고 힘을 합쳐야 할 우리에게 남는 게 뭐냐고―!”
악에 받친 처절한 고함이 농과대 복도를 계속해서 울렸다.
“사람들이 수천 년을 살아가며 쌓아 올린 가치관을 우습게 보지 마! 자연스럽게 거부감이 일어나는 범죄에 이유를 붙이지 마! 그건 발전하기는커녕 안 그래도 무너진 세상을 더 역행하는 퇴보에 지나지 않아―!”
“…….”
하아― 하아― 하아―
잠시간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는 남도윤.
뚝―! 뚝―!
급하게 숨을 고르는 그의 턱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면 더더욱 돌아가지 못하잖아, 하얀아.”
“분명히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을 때 너도…….”
무언가를 참듯 꾹― 다무는 입술.
남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차하얀을 응시했다.
“……난 하루라도 빨리 다시 돌아가고 싶어.”
“이 이상한 성군이니 뭐니, 백군의 왕이니 뭐니 하는 갑작스러운 이름보다―”
“엄마, 아빠의 아들……. 그냥 반석대학교 대학생 남도윤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조금 전의 복도를 쩌렁하게 울렸던 고함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돌아가고 싶어. 그렇게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함께 겪은 모두가― 지금에 비하면 너무나도 가벼운 걱정과 고민을 하던 그때로 같이 돌아갔으면 좋겠어…….”
“아직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더 힘내고― 조금 더 힘들고 다친 사람들도 챙기면서― 그렇게― 안전하게…….”
그게…….
“그게…… 그렇게 틀린 생각이야……?”
“…….”
남도윤은 대답 없는 차하얀을 바라보며 마른 웃음을 머금었다.
“……위험해 보이는 사람을 죽이고, 캠프원이 다치면 그 다치게 한 상대에게 복수하고……. 그걸 누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줄 알아? 그렇게 선을 넘으면― 그렇게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한 사람은―”
……영원히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
“기적적으로 좀비들이 모두 사라지고 사회가 복원돼도 그렇게 선을 넘은 사람은 영원히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
평범한 부모의 아들,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돼버린다고.
“그걸…… 그걸…….”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절레절레 흔드는 고개.
“그걸 끊임없이 되뇌이는데도 계속해서 쉬운 길이 보여. 그 편한 길로 걷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고―!”
쿵―!
남도윤은 자신의 가슴을 치며 다시금 소리쳤다.
“그런 병신 같은 마음이 튀어나오지만,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잖아―!”
“나보고 성군이라잖아―! 좋은 왕이 되라잖아―!”
“이런 내가 성군이라 불릴 만큼 쓰레기들만 넘쳐나는 세상이 된 거잖아―!”
“이만큼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보다 더 노력하라는 거야―!”
뚝―! 뚝―!
이번엔 굵은 땀방울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턱에 망울져 바닥으로 흘렀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버틸 수 있었어. 아니, 그렇게 힘들고 나쁜 날들도 아니었어…….”
차하얀.
남도윤은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그녀를 간절히 응시했다.
“……넌 언제나 나를 좋은 사람이고 싶게 만드니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던 날 부끄럽게 만들고 힘을 주니까…….”
그러니까―
“가지 마.”
……제발.
물기가 가득 담긴 남도윤의 간절한 부탁.
평소의 남도윤 답지 않게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부드러운 미성이 흘러들었다.
“……그날. 저희가 다시 만난 날.”
차하얀의 속삭임에 자연히 그날의 광경이 떠올랐다.
로비까지 급하게 달려온 남도윤과 그를 향해 밝게 미소 짓던 차하얀.
“저에게 낯설다고 하셨죠?”
“…….”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고, 처음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날 선 말들을 주고받았던 그날.
“그게 저예요. 진짜 저. 아무 가식 없는 진짜 차하얀.”
아니면 진짜…….
차하얀은 흐릿한 미소로 누구도 듣지 못할 끝말을 흘려보냈다.
“……솔직히 오빠가 하셨던 그런 어려운 이야기들은 하나도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오빠.”
그녀는 남도윤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로 사과했다.
“그런 복잡한 문제보다 그냥 제가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정말 죄송하지만, 오빠가 바라는 저는 진짜 제가 아니라, 나쁜 연기를 하던 저니까…….”
툭―!
“그리고 더는 그런 나쁜 연기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
죄송해요, 오빠.
진짜 마지막인 것처럼, 한 발자국 다시 물러서는 차하얀.
남도윤은 그 불길한 확신에 서둘러 손을 내뻗었다.
이번엔 확실하게 그녀를 다시 붙잡으려던 손길이―
툭―!
뒤로 쭉 미끄러지는 차하얀을 붙잡지 못했다.
“……언니?”
허공을 움켜쥐는 손짓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차하얀의 속삭임.
남도윤은 그제서야 차하얀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린네아 씨?”
“…….”
차하얀을 안아 드는 금발의 여인.
파르르 떨리는 눈망울로 조용히 남도윤을 노려보던 린네아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탁―!
차하얀을 안아 든 채로 빠르게 멀어지는 린네아.
“린네아 씨―?!”
남도윤은 바람에 세차게 흩날리는 금발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었다.
간절히 내뻗는 손짓이 목표하는 금발 너머의 검은 머릿결.
“……하얀아아아―!”
우우웅―!
그의 의지에 반응한 ‘선정(善政)’이 붉게 번지며 보이지 않는 손을 만들어냈다.
쐐애애애액―!
단번에 린네아의 등을 목표로 쏘아지는 보이지 않는 손.
남도윤은 입술을 짓씹으며 보이지 않는 손이 린네아의 등을 파고드는 것을 노려보았다.
점점 흐릿해지는 거리에 선명히 느껴지는 린네아의 등허리.
그녀의 등허리를 칭칭 둘러싼 염력이 그 너머에 있는 사람마저도 빠르게 둘러 감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아주 확연히 느껴지는 두 사람의 감각.
남도윤은 그 감각이 느껴지자마자 다급히 쭉 뻗고 있던 손을 주먹 쥐었다.
으드득―!
거칠게 으스러지는 소리로 염력에 전달되는 의지.
린네아와 차하얀을 감싸고 있던 염력이 그의 의지에 답했다.
터엉―!
허나, 그가 예상했던 상황과는 다르게 무언가에 밀리듯 휘청거리는 손짓.
띠링―!
[피아식별 기간엔 감염 외의 모든 폭력적 행위는 금지됩니다.]
순식간에 팔을 휘감던 붉은 기운이 사그라들며 눈앞에 경고 메시지가 출력됐다.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더는 볼 수도 없는 거리로 멀어지는 두 사람.
“…….”
허나, 남도윤은 저 멀리 사라지는 두 사람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망울에 담겨오는 충격적인 경고.
[피아식별 기간엔 감염 외의 모든 폭력적 행위는 금지됩니다.]
……폭력적 행위.
그리 읊조리는 남도윤의 팔이 툭―! 다시 자신의 바지춤을 스쳤다.
“…….”
아무 말 없이 그저 경고 메시지만을 계속해서 응시하는 시선.
“……도윤아―! 남도윤―!”
남도윤은 자신을 애타게 부르며 달려오는 성준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씨발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까지 위에 있는 거야?! 방금 그 유리 깨지는 소리는 뭐야―?! 하얀이는 어디 가고―?!”
“…….”
앞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로 목소리 높이던 성준기가 스스로 머리를 휙― 휙― 내저었다.
“아니다―! 씨발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
“야, 남도윤! 지금 상황이 아주 많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거든―?!”
당황으로 점철된 성준기의 눈동자와 다급히 밖을 가리키는 손짓.
“이 시간이 되도록 린네아 씨랑 기숙사 캠프원들이 안 온 것도 문제인데, 진짜 문제는 애들이 사라졌다, 도윤아―!”
턱―!
성준기가 다급히 남도윤의 양어깨를 잡고 흔들며 다시금 소리쳤다.
“지금쯤이면 로비에 모였어야 할 애들뿐만 아니라, 강청신까지도 모조리 사라졌다고―! 씨발 정신 차리라고, 남도윤―! 내 말 듣고 있어?!”
흐릿한 남도윤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더 강하게 그의 몸을 흔드는 손짓.
그제서야 고개를 든 남도윤이 아무 말 없이 성준기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텅 빈 눈동자에 성준기가 미간을 일그러트리는 찰나―
띠링―!
[00 : 00 : 01 : 00]
[첫 번째 왕위 쟁탈전, 도읍 쟁탈전 시작까지 잔여 시간 1분.]
[백군과 흑군의 피아식별을 종료합니다.]
[현재 반석대학교 내에 잔존하는 참칭자들의 세력도를 갱신합니다.]
시간의 촉박함을 알려오는 새로운 메시지.
띠링―!
멍하니 메시지창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가에 익숙한 대학 지도가 떠올랐다.
[대학 북측(농업생명과학대학 일대) : 남도윤]
[대학 북측, 남측 : 한세계 & 린네아 (기숙사 구역 임시 리더) 동맹]
이해하지 못할 문장들과 함께 반석대학교를 반으로 나누던 기준선이 서서히 변모했다.
반석교회를 기준으로 하던 분단선을 넘어 대학 북측을 빠르게 물들이는 검은 빛.
하얗게 빛나는 농과대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에 검은빛이 칠해졌다.
“이게…….”
이게 뭐야……?
허공에 출력된 대학 지도를 바라보며 멍하니 읊조리는 성준기의 뇌까림.
그의 잘게 떨리는 눈빛이 빠르게 농과대 주변의 단과대를 훑었다.
그들의 소중한 식량과 물자들이 숨겨져 있는 농과대 주변의 단과대들.
그곳들 모두를 어김없이 검게 칠하고 있는 시커먼 물감에 그리 반갑지 않은 스파크가 스친다.
물자와 식량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던 동생들과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진 동생들.
“……설마.”
함께 사라진 강청신과 오지 않는 기숙사 동맹원들.
“……설마.”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검게 물들어가는 지도.
띠링―!
[피아식별이 끝난 백군과 흑군은 쟁탈을 준비하세요!]
멍하니 바라보던 지도가 사라지고 그들의 눈앞에 깜빡이는 새로운 문장.
허나, 그 문장보다 조금 전의 지도를 되뇌이던 성준기가 다물지 못하는 입술로 속삭였다.
“……말도 안 돼.”
말도……, 이거…….
“……이거 거, 거짓말이지?”
“…….”
입술을 버벅대며 허망하게 물어대는 성준기의 눈빛.
그 눈빛을 바라보던 남도윤의 어깨가 잘게 떨려왔다.
“……흐흐흐―”
웃음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적합하지 못한 행동.
남도윤은 계속해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눈앞에 출력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흐흐흐흐―”
바짝 말라비틀어진―
마르지 않은 잔웃음이 흘렀다.
***
툭―! 툭―!
[00 : 00 : 00 : 39]
이젠 40초도 채 남지 않은 잔여 시간.
난 계속해서 쇠 파이프로 허벅지를 치대며 허공을 응시했다.
“한세계에에에에에에에에―!”
그 순간, 아주 처절하게 대학 전체를 울려대는 남도윤의 포효.
포효에 잔뜩 묻어나오는 살기를 느끼며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빌딩 숲마냥 사방을 가리우는 예술대학의 건물들.
난 그 예술대학 중앙의 공터에서 차분히 놈을 기다렸다.
애초에 놈과 약속되지도 않은 뜬금없는 장소.
허나, 그 어느 때보다 기묘한 확신이 위를 올려다보게 했다.
놈은 이곳으로 온다.
캠프원― 식량과 물자―
그리고 동맹을 모두 잃고―
“한세계에에에에에에에에―!”
오직 남아있는 분노만을 가지고 이곳으로 올 것이다.
쐐애애애액―!
주변을 사납게 괴롭히는 살벌한 파공음.
그 파공음의 끝에 당연하다는 듯 기다리던 남도윤이 담겨온다.
시뻘게진 눈알로 나를 내려다보는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
평소의 기생 오라비 같은 얼굴은 어디 가고 어디 흉신악살이라도 빙의한 듯한 살기 넘치는 표정.
“…….”
온몸을 분노에 잠겨 부르르 떨어대는 남도윤이 예대 공터를 조용히 부유하고 있었다.
난 남도윤의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까득―!
그 미소에 선연히 답해오는 살벌한 이갈이.
생각하고 바라던 그대로의 상황이었다.
오직 이 상황만을 위한 계획들이었다.
린네아라는 동맹, 농과대의 캠프원들과 물자들―
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이득일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을 결정짓는 건 무리의 우두머리다.
언제나 길을 정하는 건 수많은 양들이 아니라 그들을 이끄는 목자다.
양이 달라진다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목자가 달라지면 아주 많은 것이 변한다.
인간들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
“………한세계.”
집 씹듯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이 개새끼야.”
이 진한 살기에 오히려 더 얄미운 미소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팟―!
그런 내게 단번에 내뻗는 남도윤의 손아귀.
그 부르르 떨리는 손아귀를 지그시 응시한다.
분노는 언제나 그렇듯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사람의 시야를 좁게 하고 일차원적인 생각을 강요하게 하는 강렬한 마력.
어떨 땐 그런 빠른 결정과 판단이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분노는 그 사용자를 그리 좋지 않은 결말로 이끈다.
그러니, 더 분노해라.
차하얀과 캠프원―
동맹과 그동안 소중히 모았던 모든 물자를 잃고―
그렇게 자신을 지탱하던 신념까지도 잃은 채로 계속해서 분노해라.
띠링―!
[카운트 다운을 시작합니다!]
그 순간, 서로의 시야에 동시에 출력되는 메시지.
[00 : 00 : 00 : 05]
시야의 중앙에 사라지지 않는 시계가 떠올랐다.
“……하아― 하아―”
상태창 메시지의 카운트 다운을 내려다보며 더 격하게 숨을 몰아쉬는 남도윤.
[00 : 00 : 00 : 04]
계속 그렇게 호흡이 가빠지고 또 시야가 좁아져라.
그리하여―
[00 : 00 : 00 : 03]
우우웅―!
서로의 전신을 뒤덮는 황금색과 붉은색.
왕을 상징하는 각자의 색채가 갑옷처럼 나와 남도윤을 감쌌다.
[00 : 00 : 00 : 02]
쇠 파이프와 나를 조준하고 있는 놈의 손길이 동시에 까닥― 흔들렸다.
[00 : 00 : 00 : 01]
오직 서로만을 담고 있는 격랑 가득한 눈빛과 잔잔한 눈빛.
우우웅―!
서로의 머리 위에 올려진 왕관들이 찬연한 빛을 뿌리며 진동했다.
띠링―!
[00 : 00 : 00 : 00]
[반석대학교 도읍 쟁탈전.]
[라스트 킹 스탠딩 (Last King Standing)]
게임을 시작하는 조건도 하나였고―
게임을 끝내는 조건도 오직 하나 뿐이다.
백군과 흑군의 왕은 서로를 노려보며 동시에 같은 말을 속삭였다.
[시작.]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