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반 (1)
[56 : 23 : 58 : 03]
정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도읍 쟁탈전 이후, 아주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뒤바뀐 상황들을 정리하기에는.
도읍 ‘반석’이 세워짐과 동시에 이루어진 나의 입궁 선언.
그 입궁 선언 직후, 시스템이 공지한 임시 보호 기간 60일.
그 ‘60’이란 숫자가 어느덧 벌써 ‘56’이란 숫자로 줄어든 대낮이었다.
“총장님―! 오고 있습니다―! 총장님의 의전 차량에 드디어 총장님을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총장니이이임―!”
난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색 고급 세단에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 고장훈을 바라보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읍 쟁탈전을 개시하기 전보다 확연히 달라진 주변 풍경.
시스템 메시지창의 언급을 빌리자면, 반석대학교가 ‘인간의 영토’가 된 덕분인지―
그동안 캠프원들을 괴롭혔던 좀비들은 살점 하나 내보이지 않고 모두 다른 구역으로 일제히 이동했다.
아마 아직은 파악하지 못한 ‘특별 보상 구역’ 이나 대학 바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겠지.
어쨌든, 당분간 좀비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진 덕에 도서관과 그 주변 도로를 길게 막아서던 차량 바리케이드들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이젠 도서관과 그 주변이 아니라, 대학 전체를 방비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헤헤헤― 총장님―! 모시겠습니다, 총장님―!”
달라진 호칭을 수차례 반복하며 간사한 미소를 내보이는 고장훈.
난 도서관 입구에 멈춰 선 세단으로 미끄러지듯이 이동하는 고장훈을 따라 걸었다.
달칵―!
아주 그림 같은 미소를 내지으며 뒷문을 부드럽게 열어젖히는 고장훈.
난 가볍게 헛웃음을 내뱉으며 놈이 열어준 뒷문으로 세단에 탑승했다.
고급스런 외형에서 떠오르는 감상을 충족시키듯 생각보다 훨씬 편한 시트.
툭―
부드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푹신한 승차감에 등을 푹 기댔다.
“좋은 아침입니다, 총장님.”
운전석에서 들려오는 유서준의 아침 인사.
백미러에 비춰오는 목례하는 유서준의 시선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던 찰나―
조수석에 미리 탑승해있던 인원이 얼굴을 돌려왔다.
순간 환하게 찰랑이는 금발과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푸른 눈동자.
“……안녕― 아니, 안녕……요, 총장님.”
어쩌면 외국인이기에 건넬 수 있는 신기한 인사.
스스로 고개를 휘― 휘― 젖고, 눈을 데구루루 굴려 완성한 인사에 잔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서로 편하게 말하자고 했었잖아, 기억 안 나?”
“……하― 하하―.”
내 물음에 린네아가 더 어색한 표정으로 로봇 같은 웃음을 내지었다.
“정말 감사히 실례하겠습니다, 총장님―!”
다소 어정쩡해진 분위기를 뚫고 들어오는 한 텐션 높은 외침.
빠르게 내 옆자리로 기어들어 오는 고장훈을 바라보던 린네아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총장님.”
타야 할 사람이 모두 탄 것을 확인한 유서준이 부드럽게 악셀을 즈려밟았다.
미끄러지듯 앞으로 출발하는 세단을 바라보다 다시 시트에 등을 기댔다.
대학 전체 중간 점검의 첫 번째 목적지는 농과대였으니, 생각보단 조금 오랫동안 차량에 탑승해 있어야 했다.
애초에 걸리는 시간을 생각했다면 그냥 뛰어가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테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얼마나 빠르게 점검을 실시하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점검을 실시하는 지 캠프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기숙사 캠프원들이랑 해보라는 이야기는 해봤어?”
잠시간 창밖을 응시하다 다시 정면으로 돌리는 시선.
자신에게 건넨 물음인 것을 눈치챈 린네아가 때맞춰 고개를 돌려왔다.
“……어어― 그게……요…….”
서로 시선을 맞춘 이후에도 한참 동안 말을 굴리는 린네아.
“……그게― 얘기는 해봤는데, 조금 소극적이에요, 사람들이.”
“그래?”
그녀가 어색한 얼굴로 힘겹게 토해낸 대답에 고개를 주억였다.
소극적이다라…….
하긴, 그 사람들 입장에선 기숙사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는데 주거시설을 합치자는 말을 들으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겠지.
동맹이든 뭐든, 그 사람들 입장에선 생판 모르는 남과 다름없으니.
“……미, 미안.”
……요.
상념을 이어가는 내 표정을 살피며 나지막이 읊조리는 린네아의 사과.
난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든 것 같은 린네아의 얼굴을 차분히 살피다 마지막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짧은 시일 내에 합쳐진 세 개의 캠프.
더군다나 도서관 캠프에 비견되는 생존자들을 보유한 농과대와 기숙사 캠프였다.
애초에 마찰이나 잡음이 안 일어나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더군다나 지금은 세 집단이 하나의 집단으로 재탄생한 초창기였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의 집단이 되어도 원래의 생활이 유지되거나 더 나아졌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두 개의 집단을 집어삼킨 것에 비해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늘어나지 않은 왕권이 이 계획을 뒷받침했다.
쉽사리 ‘복종’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새로운 캠프원들.
그들 모두가 말 그대로 간을 보고 있다는 뜻이겠지.
굳이 잡음이 일어날 게 뻔한 초창기부터 강한 채찍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일단 부드럽게 섞일 수 있는 부분까지는 부드럽게 섞이다가―
보기 흉하게 툭― 튀어나오는 가시들만 제대로 솎아내면 될 일이다.
“괜찮아. 불편할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왜 미안한 일이야?”
“……하하―.”
새로 늘어난 캠프원들의 융화 문제, 더불어 넓어진 구역을 더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거주지 문제 등등―
빠르게 해결하기보다는 시간을 들여 제대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었기에 조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손아귀에 들어온 이상, 명분은 내가 원하는 순간에 언제든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것보다 이 도로들― 다 린네아 네가 정리한 거라며?”
“……네가 나한테 부탁한 거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빨리 끝내줄 줄은 몰랐는데. 너도 기숙사 일로 바쁠 거 아니야.”
감탄이 잔뜩 베인 물음에 조금 풀린 얼굴로 미소를 내짓는 린네아.
난 세단이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진 도로 상황을 살피며 계속해서 그녀를 칭찬했다.
“들었던 것보다 훨씬 부지런하네.”
“……하하―.”
아니면,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거나.
난 처음보단 훨씬 더 편해진 린네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들리지 않을 속삭임을 되뇌었다.
굴복도 복종도 아닌―
굳이 정의하자면 ‘협력’에 가까운 관계에서도 묘하게 저자세를 유지하는 저 소심함.
차설희가 내게 속삭여준 성격, 아니 그 이상으로 여린 마음.
저 뚜렷한 이목구비와 이미지 비해 너무나도 옅고 흐릿한 기저 심리.
난 그녀의 벽 안을 지그시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미리 계획했던 전체 점검 루트를 따라 깨끗이 정리되어있는 대학의 도로.
캠프원들이 미리 휩쓸고 간 청소의 흔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이 정도면 깨끗하다기보다는―
“조금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말입니다, 총장님.”
조용한 읊조림에 따라붙어 오는 선명한 속삭임.
그 소리를 좇아 고개를 돌리니 조금 부담스러울 만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나를 반겼다.
“그 텅 빈 공간들을 아주 의미 있게 채울 계획을 강구해봤습니다, 총장님!”
“……뭔데.”
살짝 가늘어진 눈가에도 전혀 타격이 없는 반짝이는 눈빛.
서둘러 바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낸 고장훈이 간사한 웃음을 내걸었다.
“먼저 총장님의 위대한 업적을 기릴 기념관을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념관에 총장님의 일대기를 기록하여 모두가 마음에 새길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
“특히 이 위대한 ‘반석’을 어떻게 세우셨는지에 관한 그림도 쭉― 벽에 줄 세워 걸어놓겠습니다―! 아주 간악한 쓰레기들을 단번에 처치하는 총장님의 그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축지법을 쓰시는 총장님의 그림―! 아, 기념관 앞에 웅장한 동상도 만드는 겁니다―!”
“……축지법.”
난 제가 오히려 더 신난 고장훈의 말을 끊으며 뇌까렸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레파토린데.”
“아닙니다, 총장님―! 그 돼지 새끼들은 자기 몸무게도 모르는 새빨간 거짓말을 내뱉는 거고, 총장님은 정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시며 축지법을 펼치지 않으십니까―?!”
저 거짓 한 점 없는 진실된 눈망울.
옥상 건물에서 뛰어내려 고장훈이 기겁을 하며 넘어졌던 일이 자연스레 뇌리를 스쳤다.
“……어떻게 생각하면 맞는 말이긴 한대.”
“바로 그겁니다, 총장님―! 저희는 말 그대로 현실 그 자체인 총장님의 건국 신화를 마주 보고 있는 겁니다―!”
아주 주먹을 굳세게 쥐고 흔들며 침을 분사하는 고장훈을 응시하다 조용히 물었다.
“……그래. 그림은 미대 생존자가 그린다해도 동상은 뭐 어떻게 할 건대?”
동상을 만들 때 필요한 구리 등의 원재료도 그렇고 그 원재료를 녹이고 주조할 시설도 없잖아.
내 물음에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찼던 고장훈의 눈깔이 잘게 떨려왔다.
턱―!
“……아뿔싸!”
내 물음에 대한 답인지, 자기 이마를 치대며 내뱉는 경박한 탄식.
“아뿔싸는 지랄, 헛바람 일으키지 말고 일단 시키는 일부터 잘하자, 고자야.”
“……옙, 총장님!”
떫은 걸 씹어댄 것처럼 자연스레 구겨진 내 얼굴을 바라보곤 재빠르게 수첩을 주머니에 쑤셔넣는 고장훈.
쯧―!
짧게 혀를 차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니 고장훈이 아닌 다른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뭐야.
생전 처음 마주하게 되는 린네아의 표정에 저절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내 표정에도 아무렇지 않게 환한 미소로 손가락을 내뻗는 린네아.
“……저, 저 이거 봤어요―! K-드라마에서 항상 나오는 장면―!”
린네아의 쭉 펴진 하얀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킹―, 왕!”
그리곤 조금 옆으로 이동해 고장훈을 가리켰다.
그리고―
“내관!”
힘차게 고장훈을 호명한 린네아가 손가락을 거두지 않고 다음 말을 내뱉었다.
“고자!”
“……예?”
“고자! 붉은 옷 입은 왕 뒤에 있는 내관! 아까도 고자라는 말 들었어요―!”
“…….”
티 없이 맑은 미소에 고장훈의 얼굴이 작게 경련했다.
“……그으― 린네아 씨.”
“네!”
“그으― 고자는 총장님이 불러주시는 친근한 별명 비슷한 거지 그,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아직 살아있어요.
고장훈의 구구절절한 변명에 린네아의 미소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아― 미안해요, 고자 씨.”
“……예.”
“그, 그래도 듣고 있으니 엄청 재밌었어요! 생각했던 이미지와 대화가 아니라서. 으음― TV? 맞아요, 어릴 때 자주 봤던 TV쇼를 보는 것 같았어요, 두 분!”
“……헤헤― 감사합니다. 그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건데 고자는 정말 그냥 별명―”
“아―! 그건 정말 미안해요, 고자 씨.”
……아.
“……아, 예.”
정말 오랜만에 흔들리는 고장훈의 그림 같은 미소.
고장훈이 린네아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내게 다가왔다.
“……지금 이거 저 먹이는 거 아닙니까, 총장님?”
놈이 소곤대며 물어보는 물음과 달리 여전히 환한 미소로 나와 고장훈을 번갈아 응시하는 린네아.
난 여러 번의 대화 시도와 편안한 분위기 조성에도 보지 못했던 린네아의 밝은 눈빛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과 오랜만에 나온 자신이 아는 공통 관심사.
그로 인해 튀어나오는 저 호기심 넘치는 눈빛과 순식간에 줄어든 듯한 거리감.
린네아의 기저 심리를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더 환한 미소로 잔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확실히 이런 식으로 티를 내게 된다는 말이지.
“……네가 참아야지, 고자야.”
외국인이시잖아.
“……지금 나 말하는 거야?”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린네아를 바라보며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아주 멀리서 온―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