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108화 (108/120)

기반 (3)

농과대와 남도윤이 깔짝깔짝 미래를 대비한 듯한 비닐하우스와 그곳에 심어진 작물들을 제대로 재점검하는 일.

첫 번째 순번이 아니었기에 일단 지나쳤던 예술대학 보수 작업에 임하는 작업 캠프원들을 독려하는 일.

반석 교회 주변에 한데 모아놓은 아직 쓸만한 차량들의 용도를 정리하고 또 분배하는 일.

이젠 도서관이 아닌 대학 전체를 두를 바리케이드에 관해 논의하고 그 바리케이드를 두를 대학 외곽 땅을 사전 탐사하는 일 등등―

알차다 못해 빽빽한 점검 일정에 해는 금방 중천을 넘어 일몰을 향해 갔다.

스르륵― 멈춰서는 차량과 노을빛에 잠기는 기숙사.

얼핏 보면 아파트 단지라 착각할 만큼 빼곡히 모여있는 고층의 기숙사들과 그 주변의 복리시설들.

또한 세단이 멈춰선 흰색 외벽의 언어 교육원과 그 옆의 유학생 기숙사를 찬찬히 고개를 돌리며 살폈다.

“……정말 안 둘러보고 가도 괜찮아?”

차 문을 열기 전, 다시 한번 재확인의 물음을 던지는 린네아.

난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휘― 휘― 내저었다.

“벌써부터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면 그쪽에서 그리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

그녀는 내 대답을 부정하지 않고 어색한 미소만을 내지었다.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주며 다시금 차창 밖을 응시했다.

임시 리더가 돌아왔는데도 마중 나온 인원 하나 없는 기숙사.

농과대나 우리가 점검했던 다른 구역들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에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뇌리를 스쳤다.

“……미안.”

“네가 나한테 미안할 게 어딨어? 허튼 생각 말고 빨리 들어가서 푹 쉬기나 해. 안 그래도 빡빡한 일정 때문에 피곤했을 텐데―.”

선선한 너털웃음에 어색함이 누그러든 미소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린네아.

난 그녀가 차 문을 열기 위해 다시 허리를 돌리는 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지금까지 파악한 린네아의 심성과 우릴 둘러싼 상황들.

그 증거들을 토대로 제법 유력한 유추들이 떠올랐지만, 아직 확신할 단계까지는 아니다.

그 유추들을 확신하기에는 기숙사와 접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도서관과 농과대를 유지시킬 수 있었던 참칭자의 존재 없이도 두 캠프에 비견되는 덩치를 유지했던 기숙사.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편의점과 카페 그리고 음식점들 등등과 애초에 주거시설로 지어진 기숙사 단지.

다른 단과대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조건들로 구축된 생존자 캠프였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제3의 생존자 캠프였다.

나와 아주 열심히 부딪쳤고 그 여파로 우두머리들을 전부 잃어 강제적으로 캠프를 합칠 수 있었던 제2의 캠프, 농과대에 비해―

이곳은 린네아라는 리더를 잃지도 않았고,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유야무야 넘어갔으니 더더욱 그랬다.

물론 도읍 쟁탈전의 세력도가 증명한 대로 또 린네아의 태도를 보면 나를 일종의 윗사람으로 인식하고 또 대우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지금껏 느낀 바로는 그렇게 나를 존중하면서도 일종의 선을 그은 채로 이 선을 넘지 말라 넌지시 경고하는 느낌이었다.

“아―!”

난 차 문을 열고 부드럽게 몸을 빼내던 기숙사 임시 리더에게 탄성을 내뱉었다.

갑작스런 탄성에 반쯤 차량을 벗어났던 몸을 다시 차 안에 집어넣는 린네아.

“대학로 탐색을 함께할 캠프원들을 도서관으로 보내달라 했던 거 잊지 않았지?”

“……응.”

“그래, 이제 슬슬 대학로 확보에도 속도를 올려야 되니까 조금 서둘러 줬으면 좋겠네.”

“……알겠어.”

알게 모르게 대답에 간극이 존재하는 린네아.

난 그 아주 약간의 틈새에 진하게 번들거리는 떨떠름함을 재확인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린네아와의 첫 조우 때, 그녀 주변에 뭉쳐있던 다양한 인종의 캠프원들을 다시금 뇌리에 떠올렸다.

주로 한국인이 아닌 듯했던 소수의 유색 인종 전투 캠프원들과 린네아의 저 소심한 성격.

아이돌, 즉 공인이라는 아주 특별한 위치의 이능력자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기숙사의 한국인 캠프원들.

……아주 어쩌면―.

다수의 한국인들이 린네아에게 임시 리더라는 감투를 씌우고 거절을 쉽게 못 하는 그녀의 등을 은근히 떠밀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한국인들에 비해 아주 소수에 불과한 외국인들도 다를 바 없겠지.

그러니― 그녀가 대답 중간중간에 떨떠름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것 또한 어쩌면 당연했다.

대학로를 탐색할 캠프원들도 선택의 여지 없이 당연히 외국인 캠프원들 위주일 테니.

“이번에도 갑자기 어려울 것 같다고 뜬금없이 거절하고 그런 거 아니지? 이건 거주지나 식량 합치는 문제랑은 아예 다른 문제잖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

난 장난스런 미소를 내걸며 연이어 말했다.

“그래도 이제 한 식구인데 같이 화합도 하고― 중간중간에 서로 몰랐던 노하우들도 공유하고 서로 윈― 윈하자고 만든 자리니까 누가 거부해도 네가 잘 구슬려서 설득해 봐.”

“……알겠어.”

그럼―

내게 확실히 고개를 끄덕인 뒤 세단에서 몸을 밖으로 내빼는 린네아.

툭―!

가볍게 닫히는 차 문과 함께 차량을 다시 돌릴 때까지 내린 자리에서 차량을 바라보고 있는 린네아를 동공에 담았다.

아직 농과대 캠프원들도 완벽히 소화하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일단 기숙사 외국인 캠프원들부터 야금야금 확보하는 게 시작이다.

다시 말하듯 어차피 내 손아귀에 들어온 이상, 놈들에게서 왕권을 확보하는 것은 조만간이었다.

“말씀하신 마지막 점검지로 이동하겠습니다.”

기숙사를 빠져나가며 백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는 유서준.

난 지시를 재확인하는 유서준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며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을 통해 번지는 점점 옅어지는 노을빛과 왔던 길을 되짚는 차량.

서서히 산머리로 모습을 숨기는 태양을 계속해서 멍하니 응시했다.

“……도착했습니다, 총장님.”

덜컥―!

아주 조심스레 나를 일깨우는 유서준의 부름과 부드럽게 열리는 차 문.

어느새 차량에서 내려 내 문을 열어젖힌 고장훈을 일견하며 차량에서 내려섰다.

다가오는 여름을 티 내듯 저녁 무렵에도 여전히 따뜻한 바깥 공기.

휭― 불어오는 바람을 한껏 들이키며 정문 옆의 드넓은 주차장을 응시했다.

아니― 주차장이었던 공간을 응시했다.

주차장이라기엔 너무 드넓었던 공간과 그 안에 방치된 차량으로 가득했던 공간에 세워진 기반.

아직 완성되지 못한 기초적인 토대를 바라보다―

툭―!

얌전히 내 옆에 자리하는 고장훈의 여전한 이목구비를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처음 이곳에 함께 왔을 적의 떡― 벌어진 입과 휘둥그레진 눈, 그대로 드넓은 토대를 바라보고 있는 고장훈.

띠링―!

[국가 보물 관리]

[1. 반석대학교]

[시작의 도읍 그리고 지식의 요람]

[국보 권능 : 지식과 인재 양성의 요람]

[국보 ‘반석대학교’ 내에 권능 사용자가 원하는 요람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완성된 요람은 권능 사용자가 의도한 취지에 맞춰 지식을 보관 및 활용하며, 취지에 걸맞은 인재를 양성하고 관리합니다.]

[요람의 진행률은 권능 사용자가 보유한 관련 시설, 관련 서적, 전문가 및 관련 종사자에 영향을 받습니다.]

[현재 건설 중인 요람 : 의과대학 및 대학병원 신설]

[진행률 : 5%]

(중앙도서관 의료 관련 서적, 학생회관 보건진료소 의료 장비 확보)

[Tip : 권능의 진행률을 높이기 위해 목표하는 요람에 관련된 더 많은 관련 시설과 서적, 그리고 전문가와 관련 종사자를 확보하세요!]

도읍 쟁탈전과 입궁 선언으로 얻은 세 개의 보상.

도읍 ‘반석’, 국보 ‘반석대학교’, 그리고 왕혈.

모두가 어마어마한 보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이능력자를 새로 만들 수 있는 ‘왕혈’이었다.

하지만 꽤 기나긴 권능 설명을 읽다 보면 국보와 국보에 깃든 권능 또한 왕혈이라는 지배자 공통 권능에 비견되는 어마어마한 특권이었다.

지식과 인재 양성의 요람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체가 시작의 도읍이자 국보가 되어버린 ‘반석대학교’.

이 난데없는 천재지변을 한순간도 빼먹지 않고 모두 함께한 모교에 새롭게 올려진 토대를 다시금 빙― 휘둘러보았다.

“……정말 다시 봐도 너무 놀랍습니다, 총장님.”

드넓은 주차장을 흔적도 없이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의 토대로 변모시킨 국보 권능.

“이런 건 마우스 클릭이나 손가락 터치로 화면 너머로 보던 것들인데…….”

난 파르르 떨리는 고장훈의 목소리에 동의하며 잔웃음을 흘렸다.

구축할 요람과 그 부지를 선택하자마자 하얀 주차선들과 아스팔트가 모조리 사라지는 그 어이없는 광경을 다시금 떠올렸다.

혹시나 해서 주차장에 방치된 차량들부터 다 빼낸 것이 다행일 정도로 텅― 비어버린 주차장.

그리고 5%라는 진행률과 함께 스스로 구축을 시작한 의과대학과 대학병원.

투입한 캠프원 하나 없이― 소모한 건축 재료 하나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기적.

“……실제로 보니 여간 소름 끼치는 광경이 아닙니다, 총장님.”

“허― 그럼 여태껏 본 불 뿜는 사람이나 공중부양하는 사람은 안 소름 끼치고?”

“헤헤― 그래도 그건 과장 조금 보태서 뭔가 그래도 일어날 법한 일들인데― 갑자기 허공에서 없던 건물이 뿅하고 생기는 건 좀…….”

“…….”

난 고장훈의 변명에 함께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능력이 아니라 ‘권능’이겠지.

난 첫 번째 요람을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으로 정하기 전에 미리 실험했던 요람들을 떠올렸다.

감염 치료센터, 이능력자 아카데미 등등―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요람화가 가능했지만, 진행률을 높이기 위해 천문학적인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경고 비슷한 알림에 다소 현실적인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을 선택했다.

일면엔 농과대를 부활시켜 농사 관련 인재를 먼저 양성할까도 생각했지만, 장고 끝에 그건 후순위로 미뤄두었다.

아직은 대학 내와 대학로에 버틸 수 있을만한 식량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러니 그리 길지 않은 여유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기껏 얻은 캠프원들을 어이없게 잃을 수도 있는 ‘질병’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옳았다.

더군다나 안 그래도 부족한 콘돔과 현시점에서 위험부담을 높이는 임신 관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난 그리 좋지 못한 일을 당한 여성 캠프원들 중 생리를 멈춘 캠프원들이 있다는 고장훈의 보고를 되뇌며 의과대학 터를 찬찬히 살폈다.

아무리 면역력을 높이고 벌레 관련 이능력자를 보유했다고 해서 ‘질병’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미리 대비하지 않은 채로 ‘질병’이라는 위협을 인식한다면―

그건 문제 인식이 아니라 이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때뿐이었다.

“……대학로 근처에 병원이 있었던가?”

“어― 제가 알기로는 대학로 근처에는 병원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멀리 나가야 있을 겁니다.”

“……그래?”

고장훈의 답변에 절로 눈가가 좁아지며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빨리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을 완료해야 농과대와 특별관리센터 등 후순위의 요람들을 건축하는데―

“……왜 우리 대학은 의대를 본캠이 아니라 인천캠으로 옮긴 거지?”

“어― 의대 귀족분들을 우대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인천캠은 거의 통째로 의대 관련 시설뿐이잖습니까.”

“…….”

그 짜증 나는 의대 이전 때문에 일이 한층 복잡해졌다.

난 권능의 진행률을 높이기 위한 방법들을 천천히 강구하다― 쯧―!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이만 캠프로 돌아가시겠습니다, 총장님?”

서둘러 세단으로 돌아가는 나와 발을 맞추며 물어보는 고장훈.

그 물음에 잠시간 발을 멈추고 다시 요람의 토대를 응시했다.

국보 점검, 장덕구와 린네아 관리, 중요 시설들 관리, 새로운 캠프원들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 강구 등등―

캠프 밖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은 대부분 끝마쳤다.

“그래.”

“예, 모시겠습니다, 총장님.”

이제 도서관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끝마칠 차례였다.

‘차하얀.’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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