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름이 싫다.
소나기가 그친 자리에서는 비 냄새가 났다.
비릿한 흙내음과 하수도에서 올라오는 퀴퀴한, 온갖 냄새가 뒤섞였다.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과 반대로, 도시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가 네온사인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매캐한 배기가스 잔향이 코를 찔렀다.
“씨발, 좆 같은 날씨.”
여름의 찝찝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밤인데도 덥고, 습하고. 여름은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든다.
너저분한 노점 거리는 오늘도 사람이 많았다. 인파를 헤치고 항상 가던 곳에서 떡볶이와 튀김, 어묵을 포장했다.
근처 오래된 아파트로 무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이 짓거리도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목적지 앞에 도착했다.
1004호.
자연스럽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눈앞에는 개판 오 분 전이 되어있는 집안이 보였다.
“한여름, 당장 튀어나와라. 3초 준다. 3, 2, 1!”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타다닥.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돌핀 팬츠에 가슴골이 다 드러난 민소매 티를 입은 미소녀가 벽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풍만한 가슴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다.
“오, 떡볶이...!”
“넌 시발, 집 정리 안 하냐?”
내 툴툴거림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한여름이 포장 봉투를 열어 재꼈다.
“네가 있는데 내가 왜?”
고개를 갸웃하며 한여름이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검은 장발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이렇게만 보면 참 그림으로 그린듯한 미소녀였다.
생활력이 아예 없다는 점과 선머슴 같은 성격이 외모로 획득한 호감도를 다 까먹었지만.
“미친년. 내가 니 남편이라도 되냐?”
능숙하게 방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에이, 그건 너무 나갔지. 우리 선은 지키자, 김무공.”
“선은 너나 지키시고요.”
“지랄 노. 이런 미소녀 방에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지 알아?”
“미소녀는 무슨. 눈곱이나 떼고 말해라.”
한여름이 슬쩍 눈을 비볐다.
“티 났어?”
“응, 존나 티 남. 자다 일어났냐?”
“나 원래 야행성이잖아. 로그아웃 시간 안 봤음?”
“봤지.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니 잘났다.”
한여름이 발로 나를 툭 쳤다.
“확 그냥.”
“뭐!”
“...됐다 시발. 원숭이랑 뭔 얘기를 하겠냐.”
“이게 뒤질...! 음음.”
벌떡 일어난 한여름의 입에 튀김 하나를 물려줬다. 곧바로 우물우물하면서 얌전해졌다. 이런데 원숭이가 아니긴 무슨.
골때리는 성격만큼이나, 얘랑 알게 된 계기도 그랬다.
무림전기라는 게임이 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RPG라고 해야 하나? 현대 무림이 있는 세계에 게이트가 발생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게임이다.
시궁창 세계관답게, 무제한 PK가 가능하다는 점이 특징이었고.
- 이 씹새가 뒤질라고! 너 어디 사냐?
- 알려주면 찾아올 수는 있고? 게임에서도 못 이기는데 현실이라고 다를까.
- 다를걸? 찾아가면 어쩔?
- 응 와봐~
매너 게이머였던 나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PK러를 만나고 봤더니 한여름이었다. 그런 시답잖은 얘기였다.
현피하겠답시고 만났더니, 교복 입은 예쁘장한 애가 나와서 눈을 치켜떴을 때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막상 만나고 보니 나이 차도 3살이나 났었고, 서로 뻘쭘해서 밥 먹고 연락처 교환하고 헤어졌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 꼴이다. 한여름은 부모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묘한 공감대가 형성된 덕에 빠르게 친해졌다. 물론 남녀 사이라기보단, 그냥 악우였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올해는 한여름이 딱 성인이 된 해였다.
“너를 대체 누가 데려갈지 궁금하다 진짜.”
“결혼 안 할 건데?”
“할 수는 있고?”
한여름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나 좋다고 한 남자애들 있었거든.”
“걔들이랑 사귀지 그랬냐. 그랬으면 내가 이 고생 할 일도 없지 않았겠냐?”
“닥쳐 쫌!”
바로 발길질이 날아왔다. 앉은 채로 하는 발길질 따위, 느리다. 가볍게 피했다.
“장난은 됐고, 준비됐냐?”
내가 사 온 걸 다 먹고 배를 두드리고 있는 한여름에게 말했다.
“이미 세팅해놨지.”
벌떡 일어나서 한여름이 다른 방으로 향했다. 먹은 흔적을 대충 치워놓고, 바로 뒤따라갔다.
오늘은 무림전기의 메인 이벤트, ‘마왕강림’의 날이었다. 이걸 막지 못하면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다나 뭐라나.
게임사도 돈 벌어야 하니 실제로 멸망시키진 않겠지만, 실패 시 무언가 거대한 패치가 있을 것은 틀림없었다.
마왕을 상대하는 건 최상위 랭커 10명으로 제한됐다. 나와 한여름은 나란히 1, 2등. 처음에는 이런 여자애가 대체 어떻게 2등을 한 건지 궁금했지만. 싸우는 걸 보니 바로 납득이 갔다.
그야말로 야만 전사 그 자체였거든.
가녀린 여자 캐릭으로 그러고 돌아다니는 것도 재능이었다. 어찌 됐든, 현피 이후로 중요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만나서 클리어하곤 했다.
역시 게임은 같이 해야 재밌다.
“가자. 2등 따리.”
“1대1이면 내가 이기는데?”
“응, 한 번도 못 이겼쥬?”
“나쁜 새끼.”
한여름이 눈을 치켜떴다. 거칠게 입을 놀리면서도 착실하게 레이드 준비는 마쳤다.
***
‘좆됐다.’
마왕이라 해봐야 뭐 특별할 게 있겠어.
라고 생각했던 걸 바로 부정하듯, 레이드는 미친 난이도를 자랑했다. 마왕은커녕, 마왕 앞에 있는 사천왕인가 뭔가 하는 놈들 잡는데 한여름과 나를 제외한 다른 공략대는 전멸했다.
“야, 한여름. 우리 좆된 거 같지?”
“응. 아마도?”
방어구 내구는 만신창이에, 무기도 너덜너덜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마지막으로 운기조식하고 가자. 번갈아 가면서 호법 서고.”
“야쓰. 운기브런치!”
한여름이 경쾌하게 소리치며 앉았다.
“넌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냐?”
“남자 새끼가 설마 긴장했냐? 꼬추 떼라.”
“진짜 저놈의 주둥이. 닥치고 운기조식이나 좀 해.”
일단 있는 거 없는 거 다 끌어모아서 준비는 마쳤다.
“가자.”
“야쓰.”
흉악하게 생긴 문을 열어젖혔다. 드넓은 대전 위에 앉아 있는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눈을 번쩍 떴고.
즉시, 우리는 둘 다 사망했다.
[GAME OVER]
화면에는 실패를 알리는 메시지만 둥둥 떠 있었다.
“이거 맞냐?”
“나 봤어. 방금 쟤한테 눈깔빔 맞음.”
“무슨 천마데스빔도 아니고. 뭐 저딴 게 다 있어.”
혀를 차며 탄식하던 도중, 게임 오버 메시지가 사라지고 다른 게 떴다.
[CONTINUE?]
“이거...?”
한여름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가자. 2등 따리.”
“야쓰!”
한여름과 나는 당당하게 YES를 눌렀다. 순간 온몸이 환한 빛에 둘러싸이며 의식이 명멸했다.
....
눈을 떠 보니 다른 장소다. 옆에는 배를 까뒤집고 드러누워 있는 한여름이 있었다.
“시발, 이건 뭔 또 개 같은....”
한여름이 사는 낡은 아파트가 아닌, 딱 봐도 고급 아파트 내부였다. 몸이 뜨겁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천천히, 새로운 지식이 뇌리에 틀어박혔다. 마치 누가 강제로 주입하는 것처럼.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재꼈다.
‘....’
바깥의 풍경을 보는 순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무림전기 안이다.
중원무공아카데미中院武功Academy의 거대한 전경이 눈앞에 보였으니까.
게임에서 몇 번 오간 적 있기에 확실했다.
중원무공아카데미는 성남시 ‘중원’구에 설립된 세계적인 무인 양성 교육 기관이었다.
무림전기는 한국 게임이었거든. 당연히 한국 위주로 모든 게 돌아갔다.
거울을 보니 얼굴은 똑같았고, 몸은 좀 더 근육질로 변한 거 빼면 거의 비슷했다.
이곳이 게임 내부라면, 시스템을 사용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입으로 내뱉긴 좀 쪽팔린 말이지만, 지금은 그런 거 가릴 때가 아니었다.
“상태창.”
아직 기절해있는 한여름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곤소곤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이름 : 김무공金武功
종족 : 인간(20세)
근력 : 10(F) 내구 : 10(F) 민첩 : 10(F) 내공 : 50(B)
보유 특성 : 양심출타良心出他(고유), 태양지체太陽之體(EX)
보유 무공 : 천마신공天馬神功(EX), 혈수마공血手魔功(SSS)
특성부터 무공까지. 게임 내에서 본 적도 없는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내 눈길을 끈 게 있었다.
천마신공天馬神功.
천마신공天魔神功도 아니고 유니콘 신공이라니. 허탈함에 천마신공 쪽을 클릭하자 세부 설명이 나왔다.
[천마신공天馬神功]
등급 : EX
경지 : 1성
수라마제修羅魔帝 천우진이 순결한 여성만을 탐하는 ‘날개 달린 말’에 대한 전설을 듣고 창안한 절대 신공.
여성의 처녀감별이 가능하다.
비처녀와 남성 상대 시 정력을 제외한 능력치 증가.
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순결한 여성을 탐하는 유니콘에는 날개가 없다. 날개 달린 건 페가수스다. 정신 나간 창안자 새끼야.
설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신이 아득해졌다.
처녀감별 무공이라니.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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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멀쩡한 게 하나 있었다.
[혈수마공血手魔功]
등급 : SSS
경지 : 1성
극양의 기운을 뿜어내는 수법手法.
심플한 설명의 무공. EX급 바로 아래의 훌륭한 무공이었다. 왜 EX급인지 알 수 없는 유니콘 신공과 다르게, 이건 확실히 수긍이 갔다.
다만, 마공이라는 점이 좀 걸렸다. 마공 잘못 익혔다 폭주라도 하면 대참사거든. 그래서 무림전기 주요 몹들 중 하나가 폭주한 마인이었다.
‘진짜’ 마공이라면 차라리 버리는 게 낫다.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받은 지식에 의하면 딱히 그런 느낌은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