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31)

차근차근 내가 건넨 걸 둘러보던 한여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중원무공아카데미면, 그거?”

“어. 그거.”

“너도 가?”

“가야지. 육성 루트 중에 최고잖아. 나도 똑같은 걸로 있거든.”

“그럼 나도 갈래.”

...참 심플한 마인드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이거 봐봐.”

한여름이 내 뒤쪽으로 오더니, 자신의 가슴을 내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푹신푹신한 느낌과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탓에 풍기는 바디 워시와 샴푸 향 때문에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굳이 이런 자세로 봐야겠냐?”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솔직하지 못하네. 얍.”

한여름이 양팔로 내 목을 꽉 감싸 안았다.

“...내가 졌으니까 팔은 풀자.”

자꾸 이러면 나도 남잔데, 참기 힘들어진다. 이놈의 양심출타 특성은 ‘평정심’을 유지해준다면서, 왜 섹스 관련해선 전혀 효과가 없는지 모르겠다.

하긴, 섹스 관련해서도 평정심이 유지되면 그건 그냥 고자긴 하다.

내가 고자라니.

...아까 했던 말 당장 취소다.

혹여라도 그런 불상사가 생기면 절대 안 된다.

“야쓰, 어디 보자.”

한여름이 내 스마트폰을 내려다봤다.

“...응? 뭐야. 날짜 이상해.”

“이상한 게 아냐. 우린 10년 전으로 떨어진 거다. 튜토리얼 퀘스트 기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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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망함? 10년 전이면 대체 뭘 해야 돼?”

한여름이 심각하게 되물었다.

“뭘 하긴. 설정도 안 읽었냐.”

“설정은 무슨. 나 스토리 나오면 무조건 스킵하잖아.”

“자랑이다 이년아.”

“넌 다 아냐?”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한여름이 항변했다.

물론 어림도 없다.

“게임 내에 나온 것만 따지면 어지간한 건 다 알지. 랭킹 1위가 조스로 보이십니까?”

“...말도 안 돼.”

멍하니 입을 우물거리던 한여름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말이 안 되는 건 지금 이 상황이겠지. 됐고, 여기 앉아 봐.”

바로 옆의 의자를 팡팡 두드렸다.

한여름이 내 머리에서 가슴을 떼고 의자에 앉았다.

순순히 내 옆에서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앉는 것이, 묘하게 귀엽다. 한여름의 허리를 끌어안고 좀 더 가까이 당겼다.

“꺅, 갑자기 뭔 짓이야...!”

“어허, 서방님 곁에 딱 붙거라.”

“서방님은 지랄, 죽을래?”

한여름이 작은 손을 움켜쥐면서 눈을 부라렸다. 그래 봐야 하나도 안 무섭다.

“얘기 좀 하자.”

농담은 그만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여름의 눈빛이 곧바로 돌변했다.

“야쓰.”

“튜토리얼 기억나?”

“그건 당연히 알지. 누굴 바보로 알아?”

“말해 봐.”

“어... 뭐였더라?”

잠시 생각하던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얘가 어떻게 랭킹 2등을 찍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무력 원툴이라지만, 설마 튜토리얼도 잊었을 줄이야.

“플레이어들을 부를 때 ‘두 번째’ 기적의 세대라 했잖아.”

“맞아, 기억났어.”

“두 번째가 있다면 첫 번째도 있겠지, 당연히?”

“응.”

한여름이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가 딱 지금 시기거든. 솔직히 플레이어들한테 붙여주는 건 걍 의례적인 거고, 이쪽은 진짜 ‘기적의 세대’야.”

“...무림전기 메인 NPC들 나잇대 생각하면 맞네.”

“글고 착실한 NPC답게, 대부분 아카데미에 입학했거든.”

유저들이야 워낙 취향이 갈려서 다양한 선택지를 택했지만, 이 세계에서 잘나신 분들은 대부분 중원무공아카데미에 입학한다.

“대충 누구누구 있어? 나중에 천마天魔 될 놈이랑, 중2검제는 거의 확실한데.”

“중2검제가 아니라 흑룡검제黑龍劍帝겠지. 그리고 천마 ‘놈’ 아니다. 년이야.”

평소에는 남장하고 다니지만, 무림전기 천마는 요즘 유행에 맞게 ‘여자’다.

천마신교 히든 퀘스트를 깨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한여름이 거하게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응? 여자였어?”

“오냐. 천마 남장하고 다닌다. 괴물들이야 한둘이 아니지. 미래의 철혈여제鐵血女帝랑 천검天劍도 있고. 덕왕德王에 사황신군邪皇神君까지. 다 말하긴 힘들다. 나중에 정리해서 넘겨줄게.”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

“이제야 좀 존경심이 드십니까, 2등 따리님?”

“시끄러.”

한여름이 입술을 샐쭉거렸다.

“으이구.”

귀엽긴. 피식 웃으면서 한여름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트렸다.

반항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순순히 내 손길을 받고 있어 조금은 당황스럽다.

눈을 게슴츠레하고 있는 게, 꼭 고양이 같기도 하고.

원래 머리 건드리면 엄청 화냈는데 말이지. 괜히 뻘쭘한 기분에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서 깔끔하게 만들어줬다.

“근데 쟤네랑, 우리랑 같이 아카데미 다니는 거 아냐? 막 경쟁도 하면서?”

“그렇지?”

“...넘 강한데.”

한여름의 말대로였다. 무림전기 메인 NPC들은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세계 멸망 어쩌고 제작사가 난리 치긴 했지만, 실제로 믿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천마나 마왕이나, 플레이어 입장에선 그냥 똑같이 천재지변급 괴물들이었거든.

“해봐야지.”

되든 안 되든, 어차피 답도 없다. 이 시궁창 세계에서 사지 멀쩡히 살아가려면 몸을 보호할 정도의 무력은 있어야 한다.

“당장 내일이 입학식이네.”

한여름이 통지서를 보며 말했다. 빙의 전에는 여름이었는데, 지금은 입학식이 있는 봄이다.

시기가 공교롭다 해야 할지.

무심코 시계를 보니 밤이 늦었다.

“나머지 얘기는 담에 하자. 내일 아카데미 가야 하니까. 먼저 자라. 난 씻고 올게.”

“응.”

한여름을 뒤로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뭔가 하루가 폭풍같이 지나간 기분이다.

“...얘는 참.”

수건걸이에 걸린 한여름의 속옷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정리했다. 사실 속옷 정도야 예전에도 많이 봤다.

게임 하면서 같이 밤샌 적도 많았거든. 예나 지금이나, 칠칠하지 못한 면모는 여전했다.

물을 끼얹으니 몰려오는 급격한 피로에, 빠르게 샤워를 끝마치고 나왔다.

침대가 있는 안방을 슬쩍 들여다보니, 한여름이 이불을 머리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안 자냐?”

“...같이 자자.”

한여름이 이불을 좀 더 끌어 올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헤헤....”

갑자기 헤실헤실 웃으며 한여름이 날 껴안았다.

“뭐가 그리 좋냐.”

“그냥. 따뜻해서. 곰돌이 인형 안고 있는 거 같아.”

하긴, 내 체온은 태양지체 때문인지 이전보다 묘하게 높긴 하다.

“...그러냐. 얼른 자자.”

내 가슴팍에 파묻혀 있는 한여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달콤한 살 냄새와 보드랍고 말캉한 느낌에... 저절로 눈이 감겨왔다.

***

중원무공아카데미는 학교와 학원이 혼합된 분위기였다. 시설은 대학 수준인데, 고등학교처럼 반을 나눠버린다고 하던가. 그러면서도 일부 수업은 따로 신청하는 대학 방식인 모양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관학교 느낌도 좀 있었다.

“오랜만에 교복 입으니까 이상해.”

한여름이 거울을 보며 블레이저 옷깃을 가다듬었다.

“나는 어떻겠냐.”

이 나이 먹고 다시 교복이라니.

애초에 무림인이라면 무복이 있는데 굳이 정해진 교복을 택한 것부터.

제작진들의 취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틀림없다.

“귀여워.”

한여름이 손을 쭉 뻗어서 내 엉덩이를 가볍게 팡팡 쳤다.

“이게 어디 하늘 같은 서방님의 둔부를.”

“예예, 가시어요. 서방님. 늦겠사옵니다.”

한여름이 혀를 살짝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문을 닫았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아카데미까지는 코앞이었다.

“...실화냐.”

나오자마자 온갖 고급 차량이 도로를 가득 메울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거리를 오가고, 딱 봐도 상류층 자제로 보이는 사람들이 인사를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한여름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미아 될 수도 있잖아.”

서로 손을 꼭 잡고, 거대한 동상 둘이 검을 맞대고 있는 정문 아래를 지났다.

안내에 따라 입학식이 있는 강당으로 들어갔다.

부지가 워낙 넓은 탓에 가는 데만도 한참이었다.

“오...!”

한여름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없었다.

“신기하냐?”

“응. 나 여긴 처음 와봐.”

“...진짜 사냥만 하고 다녔냐.”

“응, 그런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여름이 되물었다.

“됐다. 무슨 말을 하겠냐.”

“우리 자리 저기야.”

한껏 기분이 업된 탓인지,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오는 모양이다.

한여름이 내 팔을 붙잡고 좌석 쪽으로 끌고 갔다.

길드의 스카우터, 거대 가문의 주인들, 생도들의 가족이나 지인, 무림맹의 높으신 분들 등.

입학식이 열리는 강당에는 생도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개중에는 우리에게 꽂히는 시선도 느껴졌다.

간단한 리허설이 끝나고 슬슬 입학식이 시작됐다.

“아카데미 총장이 저 사람이었어?”

단상에서 지루한 축사를 이어나가고 있는 건장한 노인을 보며 한여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적전신無敵戰神 독고패獨孤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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