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 무림맹주, 당대 천하제일인, 독고세가의 태상가주, 주요 길드의 고문 등등.
독고패가 가진 타이틀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화려했다.
“용케 저 사람은 아나 보다?”
게임 시작 시점에서 독고패는 이미 금분세수金盆洗手하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튜토리얼도 기억 못 하는 한여름이 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무림에서 가장 쎈 사람 정도는 찾아봤지. 구경갈라 했는데 이미 은퇴했다 하더라고.”
역시 무력 원툴. 정작 스토리는 죄다 스킵해놓고 강자는 따로 찾아본 모양이었다.
‘응?’
순간, 독고패 총장과 눈을 마주쳤다.
‘에이, 설마.’
그냥 이쪽 주변을 본 거겠지.
한동안 내 쪽 근처에 머물던 독고패 총장의 시선이 다시 사라졌다.
묘한 긴장감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총장 축사가 끝나고, 전체 수석인 신입생 대표 선서가 시작됐다. 중앙의 레드카펫을 따라 흑발 남성이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거... 설마 중2검제야?”
“흑룡검제라니까. 그리고 지금 시점에선 검제 아니다. 대충 보니 검룡劍龍이라고 불리더라.”
독고패 은퇴 이후 차기 천하제일인은 의견이 분분했다. 많은 사람이 후보로 꼽혔지만, 그중에 무조건 포함되는 자가 흑룡검제였다.
“하는 꼴 보니까 벌써 비슷한데?”
한여름이 혀를 내둘렀다. 괜히 한여름이 중2검제라 까는 게 아니다. 고작 선서 한 번 하는데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잡고 있다.
물론 한여름의 말처럼 단순 중2병이라기엔, 가진 능력이 자못 뛰어나긴 했다.
대한민국 최대 기업인 구성 그룹 후계자에 전체 수석을 할 만큼 출중한 무력을 자랑했으니까.
그나저나.
실은 아까부터 내 시선을 끌던 건 따로 있었다.
중원무공아카데미는 남녀 비율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천마신공은 여성을 보는 순간 처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
주변을 슥 훑어보니, 아무리 봐도 이곳은 중원무공아카데미가 아니라, 유니콘 아카데미로 개명할 필요성이 있었다.
내 시야에 들어오는 여성들이 죄다 처녀였다.
특히 메인캐릭터에 속하는 여성들은 무조건이었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은발적안의 미소녀, 후일 천검天劍이라 불리는 검화劍花 서문예린만 해도 처녀였다.
금발의 중성적인 미인, 소천마小天魔 천하연도 처녀고.
저 멀리 철혈여제를 닮은 적발거유의 미소녀도 처녀였다.
다만 철혈여제 특유의 거만한 모습과는 정 반대라 좀 아리송하긴 하다.
‘그러고 보니, 죄다 독신이었네.’
게임 내에서도 메인 NPC들은 고고하기 짝이 없었다. 대부분 홀로 다녔으니까.
“김무공,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한여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명백한 의심의 눈초리였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 중이었는데?”
자연스럽게 변명했다.
어차피 그림의 떡이긴 하다만.
사뭇 신기한 광경이긴 했다.
죄다 처녀로 가득한 학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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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월음이라.”
동양풍의 아카데미 총장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의 노인이 찻잔을 들었다.
단상에서 내려다봤던 남녀의 모습은 노인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태양과 월음이 한 번에 나타난 것도 기이한 일인데, 서로 어울리기까지 하니.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공교로웠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태극太極, 패왕牌王, 신강神强, 오행五行, 삼재三才....”
노인의 반대편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중년 사내가 신입생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하나씩 읊조렸다.
“천무天武와 마왕魔王까지 있더구나. 한 세대에 하나 나오기도 힘든, 하늘이 내린 신체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을 수 없는 일이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노인이 흰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래 살아오면 무언가 직감적으로 느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인류에 가해졌던 위협을 셀 수도 없이 분쇄해온 위대한 무인.
무적전신 독고패의 감각은 예지에 한 발짝 걸쳐있는 수준이었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독고패를 보좌하는 아카데미 부총장, 장백검군長白劍君 고승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저 기우에 그쳤으면 좋겠다만.”
“마왕지체... 아니, 천마신교의 소천마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설마 마교의 후계자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줄은. 감시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변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간 숨죽이고 있던 마교가 비밀리에 후계자를 보내온 것 역시, 절대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무림맹과 마교는 오랜 대적이었다.
게이트 사태 이후로는 서로 불가침을 맺었지만.
옛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앙금이 쉽게 사라질 리는 없었다.
“내버려 두어라. 한국으로 본거지를 옮긴 이후 마교가 악행을 저지른 적은 없지 않으냐.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오히려 지금 와서 천마신교는 마인들을 강제로 억제하는 집단에 가까웠다. 선을 넘는 마인들은 천마신교에서 먼저 처단했다.
“...알겠습니다.”
탁. 독고패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천마도 소천마지만, 독고패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태양과 월음, 둘 다 사문이 없다 하였느냐?”
“...예. 입학 서류에는 독학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신비 문파일 가능성도 있느니라.”
아카데미에는 유명한 대문파 외에도, 종종 신비문파 출신이 입학하곤 했다. 그들은 자신의 사문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학교에 다니다 졸업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신비문파 말입니까?”
“그래. 무공은 익히고 있었느니라. 경지는 낮을지언정.”
“...약관의 나이인데 경지가 낮다면 그른 것 아닙니까?”
당장 신입생 중에는 검룡과 검화처럼 절정에 도달한 생도도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낮은 경지를 끌어올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니. 왜 무공을 일찍 익히는 게 낫다는 건지 잊었느냐?”
“나이가 들수록 탁기가 쌓이기 때문에... 설마...?”
고승빈이 눈을 부릅떴다.
“태양이든 월음이든. 애초에 탁기가 쌓이지 않느니라. 강력한 음양의 기운이 탁기를 소멸시키는 거겠지. 그들의 혈도는 어릴 때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임독양맥이 타통된 상태였으니.”
“말도 안 되는 신체 아닙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나도 전설로만 들었거늘. 실제로 보니 알겠더구나. 전설이 오히려 모자랐어.”
독고패가 혀를 끌끌 찼다. 정작 본인들조차 잘 모르는듯했지만, 독고패에게는 김무공과 한여름의 신체 내부가 훤히 보였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인지도.
같이 전설상의 신체라 놓이는 천무지체나 마왕지체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허어... 거대 문파에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았다면. 참으로 아쉽군요.”
고승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비문파 대부분은 일인전승이고, 뛰어난 무공을 가졌어도 제자들에 대한 지원 자체는 대문파에 한참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몸을 숨기고 있던 문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몸집을 키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 시대에는 소규모로 제자를 키우는 건 한계가 명확했다.
“지원이야 여기서 해주면 그만이니라. 그걸 위해 만들어진 게 이 아카데미니.”
“그건 그렇습니다만.”
독고패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말대로 중원무공아카데미가 설립된 이유는 간단했다.
게이트 사태라는 미증유의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선 기존 무인들만 가지고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지금이야 거대 집단 위주로 굴러갔지만.
취지만 놓고 보면 재능은 탁월해도,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무인들을 발굴하고 돕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느니라. 전설에 따르면 태양과 월음은 약관을 넘기지 못한다고 되어있었다.”
“...겉보기엔 둘 다 멀쩡해 보였습니다만.”
“내가 보기도 그랬느니라. 둘의 신체는 나름 안정되어 있었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둘을 유심히 관찰했던 독고패가 보기엔 당장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전설이 잘못되었을지도....”
전설이 잘못되었거나.
모종의 방법을 썼거나.
당장은 알 수 없었다.
“혹시 모르니 교수들에게 단단히 이르거라. 귀중한 인재를 허무하게 잃어선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독고패의 당부에 고승빈이 고개를 조아렸다.
***
입학식이 끝난 이후는 간단한 OT가 있었다.
학교 시설을 안내하고, 수강신청에 관해 설명하고. 기숙사를 배정하는 등.
오전 중으로 모든 일정이 끝났다.
다행히 첫날부터 수업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나 배고파.”
한여름이 내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생도식당 갈까?”
“응.”
배시시 웃는 한여름을 데리고 생도식당으로 향했다. 아카데미 내에 있는 생도 전용 식당은 첫날이라 그런지 입구부터 텅텅 비어있었다.
“뭐 먹을래?”
생도식당은 여러 층으로 나뉜 빌딩이었다.
층별로 먹을 수 있는 요리가 나뉘었기에,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안내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기 장난 아니구나.”
고급 호텔 수준으로 화려한 로비층을 둘러보며, 한여름이 입을 떡 벌렸다.
“입학식 강당도 어지간히 돈지랄 해놨던데, 게임이 제대로 구현을 못 한 거였네.”
“게임에서도 이랬어?”
“어. 대신 좀 축소시켜놨드라.”
“우음... 나 떡볶이.”
한동안 안내를 보며 고심하던 한여름이 결국 결정을 내렸다.
“넌 맨날 떡볶이냐.”
“원래 한국 여고생에게 떡볶이는 인생이거든. 소울 푸드라 이 말이지. 뭘 모르시네.”
“너 여고생 아니잖아. 졸업했으면서 무슨 여고생이야.”
“응, 명예 여고생이야.”
한여름이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
비록 나이는 명백한 성인이었지만.
아카데미 교복까지 입고 있으니 이걸 맞다 해야 하나.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난 딱히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니기에, 한여름을 따라 한식 코너로 갔다.
이런 화려한 빌딩에서 떡볶이를 파는 건 좀 신기했지만.
자세히 보니 다른 층에 있는 것들도 딱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생도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 위주였다.
“수강신청 뭐 하면 될까?”
“우린 거의 같은 거 들으면 될걸? 선택 과목도 몇 없잖아. 혈수마공이나 소수마공 둘 다 수법手法이니까. 그거 위주로 듣자.”
“웅.”
한여름이 입에 떡볶이를 한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볼이 빵빵한 게, 꼭 다람쥐 같다.
손가락으로 푹 찔러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사실 수업을 뭘 듣냐는 사소한 문제였다.
당장 중요한 건, 기연을 선점하는 거였다.
괴물들을 따라가려면 정공법으론 불가능했다.
일단 경지를 강제로 끌어올리고 실전 경험을 쌓아야 한다.
나와 한여름의 가장 큰 문제. 실전 경험이 없다.
허구한 날 피를 보는 무인들에 비해, 우린 연약한 문명인이었으니까.
“다 먹었냐?”
한여름이 양손으로 턱을 꽃봉오리처럼 받치고 있었다.
맛이 꽤 만족스러웠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응. 우리 이제 뭐 해?”
“강해지러 가야지.”
“강해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