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와.”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10년 전의 중원무공아카데미에 왔으면 가장 먼저 시도해봐야 할 게 있었다.
***
아카데미의 넓은 부지 외곽에 남한산과 이어지는 넓은 숲이 있었다.
“여기 통제 지역 아냐? 몰래 들어와도 돼?”
한여름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어왔다.
“상관없어. 어차피 관리도 안 해.”
험한 산세를 따라 수풀이 우거진 작은 오솔길을 우리는 한참 올라갔다.
“...여기 뭐가 있는데?”
“히든 피스긴 한데 모르겠다. 아무래도 10년 전이다 보니 확실하진 않아.”
“개고생하고 아무것도 없으면 좀 빡칠 거 같은데.”
“...잠깐, 저기 봐.”
위쪽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그곳에는 허리 위쪽이 잘려나간 석상이 있었다.
이끼가 잔뜩 낀 석상은 대체 누굴 표현한 것인지도 모를 만큼 잔뜩 손상된 상태였다.
“찾았던 게 이거야? 그냥 예전 유물 같은 거 아냐?”
풀숲 사이로 가려진 탓에, 무심코 걷다 보면 지나치기 쉬웠다.
“유물까진 아냐. 그저 ‘의도적인 방치’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지.”
“이 석상이 누군데 그래?”
“무신武神.”
풀숲을 헤치고 석상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기록에서 본 그대로였다.
“무신?”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중원아카데미 설립자가 누군지 몰라?”
“...설마 그 무신이야?”
경악하는 한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천마나 달마처럼 고금제일인 VS놀이 하면 빠지지 않는 그 ‘무신’이다.”
무신은 천마나 달마에 비해 비교적 최근 인물이라는 점이 달랐지만.
그가 남긴 임팩트만 놓고 보면 절대 작지 않았다.
“무신의 석상이 왜 이런 상탠데?”
“처음부터 이런 상태였거든.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피하려고 그랬던 거지.”
원래라면 서고에서 관련 비밀을 찾고, 꽤 복잡한 연계 과정을 통해 여기까지 도달해야 하지만.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게다가 내가 이걸 최우선으로 선점하려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신의 소망과 다르게, 정작 퍼즐을 풀어버린 건 최악의 사내였다.
혁리악赫理惡.
당시 혁리세가赫理世家의 소가주였던 혁리악은 비상한 머리로 퍼즐을 풀고 기연을 획득하게 된다.
그가 최악인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혁리세가부터 온갖 끔찍한 짓은 다 벌이고 다니는 혈교血敎가 위장한 모습이었으니까.
그곳의 소가주라는 건 곧, 혈교의 소교주라는 얘기도 됐다.
어쩌면 지금쯤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을 수도 있다. 기회만 되면 내가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놈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졸업 전까진 철저하게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친절한 생도인 척 위장했던 탓에 아무도 정체를 몰랐다나.
결국 무신지보武神至寶를 얻고 성공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 혁리악은 본성을 드러내고 온갖 대혈겁이란 대혈겁은 죄다 일으키고 다니게 된다.
그것과 연계된 대형 이벤트도 있었다.
‘끔찍했지.’
게임으로만 봐도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는데.
그 꼴을 직접 봐야 한다?
절대 사절이다.
나는 천천히 석상을 만지작거렸다.
기록에 적힌 대로 석상의 방향을 조절하고, 잘려있는 석상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한참을 더듬거린 끝에 무언가 원형 돌기 같은 게 만져졌다.
탁.
원형 돌기를 잡고 천천히 돌리다 보니 정확히 끼워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손을 빼니 석상 앞쪽에 제단 같은 게 올라왔다.
“이게 뭐야 대체?”
한여름은 내 행동을 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대충 날 찬양하라는 얘기지.”
“응?”
여전히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한여름을 무시하고, 미리 가져온 라이터로 제단의 향초를 켰다.
“이리와. 구배지례九拜之禮는 알아?”
“응. 퀘스트로 해본 적 있어.”
“대충 비슷해. 일단 조사야祖師爺에게 삼배부터. 이쪽 방향.”
무림전기의 구배지례는 조사야祖師爺에게 삼배, 다음으로 사야師爺에게 삼배, 마지막으로 사부에게 삼배를 올리는 식이었다.
먼저 석상을 기준으로 동쪽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한여름도 흙먼지에 더럽혀지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잘 따라 했다.
다음으로는 서쪽을 향해 삼배.
마지막으로 석상을 향해 삼배.
쿠구구구궁-
우리가 절을 마치고 일어나자, 진동음과 함께 제단이 사라지고 석상이 저절로 옆으로 움직였다.
“...이거 마법이야?”
한여름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석상이 있던 자리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생겨났다.
“게임이었잖냐. 아니면 고금제일인 후보쯤 되면 다른가 보지. 들어가자.”
솔직히 나도 반신반의했다.
혁리악이 어마어마하게 강해진 이유야 게임 내에서도 세세하게 설명되어 있었지만.
게임이 현실이 됐을 때도 이런 게 가능할지는 몰랐거든.
시도해 볼 가치야 있다는 판단하에 여기까지 왔었고, 일단은 첫 단추는 성공했다.
한여름이 내 팔을 살짝 잡았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계단 아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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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가자 기다란 복도가 나왔다.
내부는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이거... 설마 전부 야명주야?”
한여름이 천장을 보며 경악했다.
“아마도?”
“떼다 팔자.”
“건드리지 마. 함정일 수도 있거든.”
당장 손을 뻗으려던 한여름을 제지했다.
기술이 발달한 덕에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스스로 빛을 내는 야명주는 여전히 귀한 보물로 취급받고 있었다.
일종의 보석 같은 느낌으로 비싸게 거래된다나.
이건 현실에 있는 ‘야명주’와는 아예 다른 종류였다.
나도 게임 설정상으로만 봤는데, 이렇게 실제로 보니 사뭇 신기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넓은 공동이 나왔다.
남한산 지하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꺄악!”
한여름이 정면을 쳐다보더니 새된 비명을 질렀다.
빛이 내리쬐는 자리에, 정좌한 채 그대로 미라화된 시신이 보였다.
“...무신.”
단순히 무신지보가 잠들어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저 사람이 무신이라고?”
내 뒤에 숨어버린 한여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거의 확실해.”
고아한 자세로 양손을 모은 무신의 시신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어디선가 내리쬐는 신비로운 광채 때문인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인사드려라. 그래도 예의가 있어야지.”
살짝 떠는 한여름의 손을 붙잡고 가볍게 일 배를 올렸다.
조금씩 무신의 시신에 다가갔다.
무신의 앞쪽으로는 낮은 탁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책 한 권과 목함 두 개가 놓여있었다.
무신비록武神祕錄.
서책의 이름이었다.
“이거 비급이야?”
“봐야 알 거 같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서책을 조심히 펼쳤다.
무신의 무공이 적혀 있진 않았다.
다만, 무인에게는 어쩌면 그보다도 귀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말년에 무신이 얻은 깨달음이 담겨 있었으니까.
중간까지 책을 넘겼을 때, 순간 의식이 명멸했다.
[연자여.]
모든 게 멈춘 공간에서, 늙수그레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신이십니까?’
[이 목소리를 들었다는 건 연자가 악인惡人은 아니라는 얘기겠구나.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도다.]
무신임이 확실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질문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절망이 예정된 미래를 나는 보았다. 대비하고자 했다. 하지만 천리天理는 내가 이 땅에 더 발을 붙이고 있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학교를 세웠지만,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무신이다. 아카데미를 설립했다고 하였으니.
[그리하여 결심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쥐어짜 후인에게 모든 걸 맡길 수 있도록. 하지만 내가 남긴 걸 악인이 얻게 된다면, 악용될 가능성도 컸다.]
...실제로 게임에서는 충실하게 악용됐다.
안타까울 정도로.
[그리하여 선천지기까지 스스로 깨부수며 얻은 마지막 깨달음을 담아, 악인에게 나의 진전이 이어지지 않도록 했다. 연허합도煉虛合道에 이르러 원영元靈을 분리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도다.]
여기까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무신이 이어서 내뱉은 대사는 내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했다.
[무신비록도, 만년지극혈보萬年至極血寶도, 미타성수彌陀聖水도. 이것들은 진실을 가리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니.]
만년지극혈보도, 미타성수도 천고의 영약이었다.
혁리악이 급격히 강해진 이유도 극양의 기운이 담긴 만년지극혈보와 극음의 기운이 담긴 미타성수를 동시에 복용했기 때문이겠지.
더해서 무신비록까지.
하지만 무신의 말 대로라면, 그런 엄청난 보물들조차 진실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이었다는 얘기다.
[연자여, 만일 나의 모든 것을 얻게 된다면 부디 의義로써 협俠을 행하길 바라네.]
무신의 말이 끝나고, 시신으로부터 둥근 빛무리가 빠져나와 내게 흡수됐다.
그리고 일부는 한여름에게까지 닿았다.
다시금 의식이 점멸하며, 정지된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도 들었냐?”
곧바로 한여름을 쳐다보며 물었다.
“뭔 소리야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는 게, 아무래도 아까 일은 내게만 일어난듯했다.
“무신 목소리 말야.”
“무, 무섭게 왜 그래.”
한여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면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내가 귀신이랑 얘기하는 줄 오해한 모양이다.
“아니다, 잠시.”
본능적으로 무언가 아까와 달라진 게 느껴졌다.
아직은 조금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곧바로 상태창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특성 하나가 추가됐다.
[무혼武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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