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31)

얘랑 한 방이라고?

내가 멍하니 본인을 쳐다보자, 천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실수했다.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인사했다.

“김무공이다.”

천하연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오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남자 새끼가 느끼하게 무슨 미친 짓인가 했을 텐데, 여자란 걸 알고 보니까 괜히 눈을 마주치기 힘들다.

“그대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난 전혀 모르겠는데.”

사실 나도 묘하게 친근한 느낌이었다.

이게 처녀라 미친 유니콘 신공이 반응한 건지, 아니면 다른 요인 때문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잠시 확인해봐도 되겠나?”

“확인?”

“그대가 익힌 무공이 무엇인지 알고 싶구나.”

무인끼리 내력을 묻는 건 조심해야 할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모두에게 섬김받는 소천마씩이나 되니 그런 경각심이 없어진 모양이다.

물론 난 절대 사절이었다.

유니콘 신공 같은 걸 누구한테 어떻게 말해.

하물며 여자인 소천마에게?

미치지 않고서야 입 다물어야지.

“...아무리 소천마라지만 그런 걸 묻는 건 실례가 아닌지?”

내가 소천마라는 얘기를 꺼내자, 천하연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역시 정파의 약속은 믿을 게 못 되는군. 내가 신교의 소교주라는 건 철저한 비밀이었을 터. 무적전신의 위명도 다 허상이었구나.”

...소천마인 것조차 비밀이었을 줄은 예상 못 했다.

하긴, 정파와 앙숙인 마교 소천마가 여기 입학한 거부터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말투에서부터 은은한 노기가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뭔가 큰 오해를 하는 모양이다.

“내 자체적인 정보로 깨달은 사실이니 아카데미와는 상관없어. 정파 쪽도 아냐.”

“그렇다면 우리 신교 내부에 간자가 있다는 얘기겠군. 쉬이 넘길 말은 아니구나.”

얘는 왜 이리 극단적이야 대체.

역시 괜히 마교가 아니다.

“마교, 아니 신교 쪽도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좀.”

“정보 단체의 후인이라도 되나?”

“그것도 아냐. 그리고 네가 소천마인 사실만 아는 줄 아냐? 남장하는 것까지 알고 있다.”

천하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걸 어떻게? 신교에서도 아는 사람이 몇 없을 터인데...!”

조금은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지금이라도 남장 풀고 여성 생도 기숙사 쪽으로 가면 안 되겠냐? 알고도 같이 지내기엔 좀 어색한데.”

“아니, 그럴 수 없다.”

단호하게 천하연이 머리를 저었다.

“넌 신경도 안 쓰이냐?”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다. 확실히 조금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말을 뱉으려다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뚜둑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천하연의 몸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골격은 물론이고.

단발이었던 머리카락마저 허리 아래까지 올 정도로 기다랗게 자라서 흘러내렸다.

‘이건 뭔....’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사에 나는 눈만 끔뻑였다.

변모를 마친 천하연이 양손으로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밝게 빛나는 금발이 물결처럼 흐드러졌다.

천하연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붉은 입술 끝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마주하니 심장이 떨려왔다.

남장 상태에서도 충분히 미인상이었지만, 이젠 아예 절세의 미녀라 불러도 될 수준이었다.

게다가 몸매 역시, 저 풍만한 가슴과 넓은 골반을 어떻게 감췄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이건 뭔...?”

“별거 아니다. 천변만화술千變萬化術이라는 역체변용술易體變容術이니라.”

“...그러냐.”

무공이란 정말 대단하구나.

무신총에서도 느꼈지만, 말이 무공이지 사실상 마법이랑 다를 바 없었다.

“흐음, 확실히 원래의 모습이 편하군. 어차피 그대는 내가 여성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여기선 편하게 지내도 되겠구나.”

“남장 풀었으면 여기가 아니라 여성 생도 기숙사 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이런 미녀와 한방을 쓰라고?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역시 좀 뭔가뭔가다.

게다가 한여름이 이 사실을 안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벌써 걱정됐다.

“내가 남장을 하는 건 교주님의 명이라 어쩔 수 없구나. 그대야 내가 여성인 걸 알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내가 어디 가서 천하연은 천마신교의 소천마이며 남장하고 다니는 여성이다. 이런 식으로 떠벌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그럴 텐가?”

천하연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술을 달싹였다.

투명한 녹안을 보고 있자니, 차마 거짓말하긴 힘들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디 가서 말할 생각 없으니 안심해. 네가 소천마에 여성인 걸 아는 사람은 나랑 한여름뿐이다.”

“한여름...? 여성의 이름이군. 그대의 정인인가?”

“정인은 무슨. 그냥 악우지.”

“그렇군.”

무심하게 천하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표정 변화도 드문 탓에 대체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신경도 안 쓰이냐? 내가 그래도 남잔데.”

“그대가 남성인 걸 왜 신경 써야 하지?”

진심 모르겠다는 말투로 천하연이 되물었다.

이건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그... 젊은 남녀가 둘이 같이 살다 보면....”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일이라. 무얼 뜻하는 거지? 그대가 나를 암살이라도 하겠다는 얘기인가?”

얘도 어째... 상태가 그리 좋은 것 같진 않다.

다짜고짜 생각하는 게 암살이라니.

“절대. 그럴 일은 없다.”

미쳤다고 천마신교의 소교주를 건들겠나.

솜털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즉시 마인들이 개떼처럼 몰려와서 내 뼈와 살을 분리하기 위해 달려들 텐데.

“암살이 아니라면 납치? 고문? 협박? 걱정 말거라. 뭐가 됐든 그대가 나를 제압하기에는 조금 모자라 보이는구나.”

...에라이 시발.

천마신교가 대체 어떤 집단인지는 모르겠지만.

후계자 교육이 저 모양이어도 되는 걸까?

진심으로 마교의 미래가 걱정됐다.

“서로 민감한 일이 많지 않을까? 지내다 보면. 예를 들면 씻는 거라든지.”

“그대는 내 나신이 신경 쓰이는 건가?”

얘기가 또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다.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하며 이마를 쓸어올렸다.

“아니. 됐다. 네가 소천마인 것과 여성인 건 비밀로 할 테니까 나도 조건이 있어.”

결국, 먼저 포기한 건 나였다.

“조건?”

“너와 같은 방인 사실은 한여름에겐 비밀로 해줘.”

“그거야 어렵지 않다.”

“그래. 잘 지내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

천하연과 인사를 마치고, 먼저 씻고 나와서 소파에 걸터앉았다.

말이 2인실 기숙사지, 여긴 모든 시설이 갖춰진 30평 아파트나 다름없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까지 갖춰진 덕에 둘이 지내는 덴 충분하고도 남았다.

머리를 뒤쪽으로 젖히고 입을 살짝 벌리고 있으니, 욕실의 문이 찬찬히 열렸다.

수증기 사이로 천하연이 기다란 수건만 두르고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건 바깥으로 매끈한 다리와 출렁거리는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즉시 자세를 똑바로 했다.

‘이런 미친.’

남장을 너무 오래 했더니 여자라는 자각이 사라졌나?

아니면 진짜 마교의 교육에 심대한 문제라도 있나?

아무리 봐도 방금 본 천하연은 속옷조차 입지 않았다.

오늘 처음 만난 외간 남자를 앞에 두고 보일 만한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사박사박.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수건만 두른 천하연이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에서 풍겨오는 향기와 달달한 체향 때문에 정신이 아찔했다.

“...야, 옷은 제대로 입는 게 낫지 않겠냐?”

“남녀 간에 친해지려면 알몸의 대화를 나누는 게 좋다 나와 있었다. 완전한 나신은 좀 그렇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대체 어디에?”

“신교의 고서古書에서 봤다.”

“뭔 미친 고서가... 평소에도 그러냐?”

“아니, 그대와 같은 사내와 얘기를 해본 건 처음이다. 신교 밖으로 거의 나간 적도 없었으니. 애초에 그대가 나의 진실한 모습을 알지 못했다면 이렇게 드러낼 일도 없었다. 본래라면 내가 남장하는 사실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라면 여자란 걸 숨기기 위해 몸을 꽁꽁 싸맸을 거지만.

내가 여성인 걸 알아차린 탓에 대놓고 오픈하기로 했다.

이런 뜻이었다.

오픈하는 건 좋은데, 얘는 뭔 중간이 없냐.

앞으로 함께 지낼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고서 믿지 말고 일단 옷 입고 와라. 잠옷이라도 좋으니.”

“지금 신교의 고서를 무시한 건가?”

순간 천하연이 발끈했다.

“...아니 고서라며. 시대가 달라졌으니 기준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확실히, 그대의 말은 일리가 있다.”

천하연이 벌떡 일어나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약 1분 정도 후.

“난감한 일이구나. 숙의 중에서 맞는 게 없다니.”

미간을 찌푸리며 천하연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천하연은 계속 남장하고 다닐 것을 전제로 모든 걸 챙겨왔다.

한 마디로, 현재의 천하연에게는 여성용 속옷이나 잠옷 같은 게 없다는 말이었다.

덕분에 지금 입은 잠옷도 단추가 제대로 잠기지 않아 새하얀 가슴이 절반쯤 그대로 드러났다.

“그냥 남자 모습으로 지내는 게 낫지 않겠냐?”

“싫다. 천변만화술을 쓸 때 보다는 지금 모습이 확실히 편하구나. 비효율적인 일을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

아까 전부터 느낀 건데, 얘도 은근 똥고집이 있다.

“그래. 잘 쉬어라. 난 먼저 잔다.”

속으로 작게 한숨 쉬며 몸을 일으켰다.

워낙 많은 일을 겪은 탓인지,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천하연은 내가 떠난 소파에 기다랗게 누워서 턱을 받치고 나를 쳐다봤다.

대체 뭔 생각인지 원.

***

새 지저귀는 소리가 아침을 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