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31)

이미 느껴본 적 있었던.

따뜻한 마시멜로와 같은 말캉말캉한 느낌.

규칙적인 숨결이 뺨에 닿았다.

달큼한 살 냄새와 코끝을 스치는 편안한 꽃향기에 나는 무심코 팔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비단을 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따라 이어졌다.

나른한 만족감 때문에 일어나기 싫었지만, 애써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드러진 금발과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손가락의 감각은 천하연의 등줄기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느낌이었다.

아까까지의 기분 좋은 포실포실함은 내 얼굴이 천하연의 가슴에 파묻혀 있는 탓에.

상황을 깨닫자마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

분명 어제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일어나 보니 둘이다.

나는 원래 잠든 자리 그대로다.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보면 답은 하나다.

잠든 사이 그녀는 모종의 수를 써서 기척을 숨기고 내 잠자리로 난입한 거다.

‘왜?’

갑작스레 발생한 사태에 뇌 정지가 왔다.

조심스레 천하연의 등에서 손을 떼자 그녀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녀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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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란 속눈썹이 들리고 맑은 녹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차분하게 천하연이 몸을 일으키고 옷깃을 여몄다.

작은 잠옷 탓에, 여전히 가슴은 반쯤 드러나 있었다.

그래도 아까처럼 핑크빛 유륜까지 거의 다 보이던 것보단 훨씬 나았다.

천하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부스스한 머릿결을 정돈했다.

“...크흠.”

나는 작게 헛기침했다. 씹덕물에서 흔히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세부적인 전개가 달랐다.

천하연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거 맞나?

내가 지그시 본인을 쳐다보자, 천하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뗐다.

“좋은 아침이구나. 할 말이라도 있느냐?”

아니, 남녀역전 세계도 아니고.

왜 내가 먼저 이런 말을 꺼내야 하는 거지?

“넌 부끄럼도 없냐. 원래 누구랑 이런 식으로 같이 자?”

“그대는 농담이 심하구나. 내가 누구와 쉬이 동침할 사람으로 보였느냐? 어린 시절 아버지를 제외하면 처음이구나.”

나랑은 만난 지 하루 만에 동침했잖아 이 여자야.

정확히 말하면 그냥 손도 잡지 않고 잠만 잔 것에 가깝지만.

“여긴 내 잠자리다만.”

“당연히 알고 있다.”

“아니, 왜 굳이 내가 자는 곳 옆에 왔는지 묻는 거잖어....”

“그렇군. 그대의 의문은 합당하구나.”

천하연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합당까지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내가 익힌 천마신공天魔神功은 불완전한 무학이다.”

“뭐...?”

왜 밤중에 들어왔냐는 얘기에.

다짜고짜 천마신공이 불완전하다는 얘기를 들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다.

천하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기다란 금발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는 완전했으나, 불완전해졌다고 보는 게 맞겠구나. 후반부 일부 구결이 영구적으로 소실됐느니라.”

“그런 걸 내게 말해도 되나? 약점 아냐?”

자신이 익힌 무공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게 차기 천마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상관없다. 완전한 천마신공이라면 고금제일을 다투겠지만, 조금 불완전하더라도 천하제일의 무공은 맞다.”

지극히 오만한 태도.

따뜻한 아침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천하연의 금발이 유독 눈부셨다.

“대단한 자신감이네.”

“신교의 천마가 될 자란 으레 그런 법이다. 천하제일의 무공으로 고금제일이 된다. 그것이 나의 목표구나.”

천하연이 오연하게 가슴을 활짝 폈다. 입가에 초승달처럼 걸린 은은한 미소가 사뭇 아름다웠다.

“거기까진 알겠는데. 그거랑 내가 잠든 사이 옆에 온 거랑 뭔 상관인데?”

아무리 봐도 이건 잠에서 막 깬 흐트러진 모습으로 할 얘기는 아니었다.

“그대에게 내가 익힌 천마신공이 반응하더군.”

...응?

“반응?”

“착각인 듯하였으나, 그대와 잠자리를 가져 보니 확실하구나.”

“...그, 잠자리라는 용어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할 것 같아.”

“그대와 잠자리를 가진 건 맞지 않나?”

“아니, 보통 남녀 사이엔 그런 의미로 쓰이진 않는다니까.”

내가 음양합일에 대해 한여름에게 물었을 때, 한여름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다.

“그대는 뜻 모를 소리를 하는 재주가 있구나. 여튼, 그대와 잠자리를 함께하니 천마신공이 스스로 일어나 움직였느니라.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좋은 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낫겠군. 그대와 잠자리를 가질수록, 나는 소실된 천마신공의 마지막 구결에 대한 단초를 잡을 수 있을 것 같구나.”

뭔 소리여 이게.

나랑 같이 자는 거랑 그게 대체 뭔 상관인데.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상식적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임 고인물인 나조차 이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어찌 됐든.

종합해 보면, 게임의 천마 천하연은 불완전한 천마신공만 가지고 흑룡검제와 천하제일을 다퉜다는 소리였다.

나와 함께 잠을 자면 불완전한 천마신공이 완전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괴물이 초월급 괴물로 진화할 가능성이 생겼다.

그 이유가 나 때문이고.

...뭐지 이건.

분명 좋은 건데.

계기가 영... 불순했다.

“농담 아니지?”

“내가 그대와 농담할 사람으로 보였는가?”

“아니. 그래서, 네 말은 앞으로 나와 계속 같이 잠을 자고 싶다는 거야?”

“그대가 불편하다면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허락해줬으면 좋겠구나. 원하는 게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전부 들어줄 테니.”

“나야 괜찮아. 네 마음대로 해.”

미래 천하제일인의 은인이 된다?

참기 힘든 유혹이다.

“고맙구나. 앞으로의 잠자리에서도 잘 부탁하마.”

“그것보다... 잠자리라는 말은 어디 가서 안 쓰는 게 좋을 거야.”

“잠자리를 잠자리라 하는 데 문제가 있나?”

“보통 잠자리는... 그....”

“무얼 망설이는지 모르겠구나. 혹, 하기 어려운 얘기라도 있는가? 나는 관대하니 얼마든지 말해도 된다.”

천하연이 입가를 살짝 가리고 웃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렇게 듣고 싶다면 말해주는 수밖에.

“잠자리는 보통 남녀 간의 음양합일, 즉 섹스를 의미하거든. 어디 가서 함부로 말했다간 엄청난 오해를 받지 않을까? 섹스가 뭔지는 알지? 남녀 간의 성관계.”

민망한 건 나도 마찬가지인지라, 입을 열고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서 차분하게 자신의 금발을 정돈하던 천하연의 손길이 그대로 정지했다.

점점 커지는 동공과 살짝 떨리는 입술.

...얘 진짜 모르고 한 얘기였구나.

“이, 이해했다. 난 먼저 씻으마.”

한동안 고장 난 채로 있던 천하연이 벌떡 일어나더니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저건 부끄러워하는 거다.

부끄럼을 타는 금발 거유 미소녀 차기 천하제일인 소천마라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이거 맞나?

묘한 심정이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

“가자꾸나.”

천하연이 방문을 열었다. 내가 씻고 나온 사이, 어느새 천하연은 남장을 끝냈다.

물론 상대적으로 남성 모습이라는 거지, 지금도 충분히 성별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걸 증명하듯이, 천하연에게 꽂히는 시선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왜 그리 떨어져서 걷는 것이냐?”

천하연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긴.

“너랑 같이 다니면 시선이 부담스럽거든.”

“...이유를 모르겠군. 그대나 되는 사내가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가?”

“난 평범한 신입생이다만.”

“평범? 천마신공이 반응하는 사내가 평범할 리 없다. 그대는 조금 자기 자신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는 게 낫겠구나.”

천하연은 지금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평범한 겜돌이었다고 설명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중에 보면 알 거다.”

어차피 괴물들 사이에 치이다 보면 천하연도 오해를 풀겠지.

‘막막하고만.’

괴물들 사이에서 경쟁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천하연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빤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지금 봐도 그대의 낯은 자못 봐줄 만 하구나. 굳이 나중에 볼 필요가 있겠느냐?”

“...얼굴 얘기한 거 아니다.”

천하연이 여자인 걸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남자 놈에게 저런 눈빛으로 들으면 소름 돋을 만한 소리거든.

“그런가. 재밌구나.”

“얼른 가기나 합시다.”

오늘 수업은 수법手法이었다.

그리고 이 수업은 천하연도 같이 듣는다.

언덕길을 한참 올라간 끝에, 넓은 공터가 나왔다.

“김무공, 왜 이리 늦었... 이 사람 설마?”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던 한여름의 눈망울이 동글동글해졌다.

“그대가 한여름인가.”

“그, 그런데?”

“반갑구나. 천하연이다.”

“...나도 반가워.”

뻘쭘한 자세로 한여름이 인사했다. 그리곤 한여름이 내 팔을 붙잡고 구석으로 질질 끌고 갔다.

“천하연이면 소천마, 맞지?”

거의 딱 달라붙어서 한여름이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어. 미래의 천하제일인이시다.”

“벌써 친해졌어?”

“기숙사를 나가는데 천하연도 수법 수업을 듣는다기에. 같이 왔거든.”

한방을 쓴다고 말하기엔 역시 무리였다.

그러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직감이 강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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