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31)

“위험하지 않아?”

걱정스러운 말투로 한여름이 속닥였다.

“아니, 검증은 끝났어. 너랑 내가 쟤 소천마고 여성인 거 아는 것까지 그냥 말했으니까 편하게 지내면 됨.”

“...우리 죽이려 드는 거 아냐?”

“말투가 좀 저래서 그렇지 착한 애야. 그러지 마.”

“...너 여자라고 지금 그러는 거 아니지?”

한여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남장한 소천마가 여자로 보이겠냐. 너야말로 친구는 좀 만들었냐?”

물론 남장을 푼 소천마 천하연은 전혀 다른 얘기였지만.

“아직. 룸메이트가 서문예린이긴 한데 얜 인간답지가 않더라.”

서문예린이라면 그럴 수 있다. 괜히 천검이라는 별호가 붙은 게 아니니까.

그건 단순히 지고한 경지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서문예린이라는 존재 자체의 불가해함이 내포된 별호기도 했다.

“무리하진 말고.”

한숨을 푹 내쉬는 한여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응.”

내 가슴에 머리를 한번 톡 박고는 한여름이 구석을 빠져나갔다.

“가자. 곧 교수님 오시겠다.”

“오냐.”

천하연은 아까 서 있던 자리에 미동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정말이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습이다.

“그대들은 악우惡友라 하기엔 사이가 꽤 좋아 보이는구나.”

“...악우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야. 소꿉친구 비슷하다 보면 돼.”

한여름이 소심하게 항변했다.

“그런가. 내가 보기엔 마치 정인 같다만. 보기 좋구나.”

“저, 정인?”

새빨개진 얼굴로 한여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얜 또 왜 이래.

“다들 모였느냐.”

우리 근처로 뒷짐을 진 노인이 다가왔다.

나는 순간 입을 멍하니 벌렸다.

“왜들 그런 표정이신가? 내가 온 게 그리 놀랍더냐?”

우리 앞에서 껄껄 웃는 노인의 이름은 독고패.

아카데미 총장이자, 무적전신이라 불리는 당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었다.

‘...대체 왜?’

확실히 수강 신청하면서 수법 수업 담당 교수가 적혀 있진 않았다.

워낙 인지도가 낮은 수업이다 보니 대충 교수 중에 적당한 사람이 차출될 거로 생각했는데.

설마 총장이 직접 나설 줄이야.

곁눈질로 보니 한여름은 물론이고, 천하연조차 눈을 부릅뜨고 독고패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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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근처의 정자로 가 앉았다.

대학 수업이라기보단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데리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총장을 따르는 직원이 어디선가 나타나 차와 커피를 놓고 사라졌다.

무슨 닌자도 아니고.

기가 막힌 은신술이었다.

“자, 편하게 들게나.”

독고패 총장이 손짓했다.

천하연과 한여름은 차, 나는 커피를 택했다.

“총장님께서 직접 이곳으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런가? 재능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내 즐거움이기도 해서 말일세. 마침 딱 수법 수업이 비어있더구나.”

물론 저 말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일단 이 수업에 소천마가 참여한 건 미리 알았을 테니, 감시차 나왔을 수도 있고.

정확한 건 독고패 총장만 알겠지.

천하연은 아까부터 계속 독고패 총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나 한여름은 총장님 눈높이에 맞지 않으실 텐데요.”

우리 둘은 어디까지나 이제 막 무림에 떨어진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신세였으니까.

무혼을 얻은 건 비밀이니 총장이 주목할만한 이유를 아무리 봐도 찾기 힘들었다.

“판단은 내가 하는 거라네. 자네들의 신체에 관해 말해줄 것도 있고 해서 말일세.”

“...아마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흠, 역시 모종의 방법이 있었는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언제든지 말해주게나.”

“예.”

독고패 총장이 고개를 끄덕이곤 천하연에게 시선을 옮겼다.

“천하연 생도는 어디 보자, 지내는 건 좀 괜찮으신가?”

“괜찮구... 죄송합니다, 어르신. 신교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나쁘진 않습니다.”

무심코 반말을 하려던 천하연이 사과하며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독고패 정도 되면 정파가 아닌 소천마도 존중할만한 사람인가보다.

하긴, 배분으로 따져도 독고패 총장은 현재 신교의 교주보다도 높긴 하다.

독고패 총장은 진작 금분세수 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으니까.

“음? 신교?”

“...이 둘은 제가 신교인 걸 알고 있습니다.”

“허허, 그랬는가. 여기선 그럼 좀 더 편하게 해도 되겠지?”

“예, 어르신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어르신은 무슨. 편하게 총장님 정도면 된다네. 교수님도 좋고.”

“알겠습니다, 총장님.”

당대 천하제일인과 미래의 천하제일인이라.

게임 고인물로서 묘한 감흥이 일었다.

내가 좋아했던 게임의 등장인물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느낌이란.

화면으로만 보던 아이돌을 실제로 영접한 팬과 비슷하겠지.

게이머라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좋네. 그럼 수업을 시작해 보세나. 오늘은 이론 위주니 편하게 들어도 된다네. 자네들은 수법手法이 뭐라 생각하는가?”

“손으로 하는 무공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각법을 제외하면 그럼 전부 수법인가? 여길 보게나.”

독고패 총장이 손날을 세웠다. 손 위로 검의 형상이 자라났다.

“무형검...?”

천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읊조렸다.

“내가 이걸 휘두르면 검법인가, 아니면 수법인가?”

독고패 총장이 차분하게 물었다.

“총장님께선 그걸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는 경지에 닿으신 거 아닙니까?”

곧바로 의문이 일어 물었다. 일반적인 무인은 저런 걸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도 옳다네.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림 대다수의 수법은 조금 문제를 가지고 있어. 애초에 상당수의 수법은 수법 그 자체로 탄생했다기보단, 병기술에 근원을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말을 중간에 끊은 그가 가볍게 밖을 향해 손매를 휘저었다.

얼핏 보면 장난과도 같은 손짓에, 먼 하늘의 구름이 갈라졌다.

모두가 멍하니 비현실적인 광경을 응시했다.

무적전신이라는 위명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신교의 절대자인 천마를 숱하게 봐왔던 천하연조차 경악한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니까.

“수법 자체의 특색은 옅은 경우가 많다네. 금나수법擒拿手法 같은 계열도 있으나, 관이라면 몰라도 무인들이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았어. 금나수 계열은 기를 이용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게 사실이고.”

금나수법은 관절기라 볼 수 있다.

당장 내가 익힌 혈수마공만 해도 초식에 금나수 계열은 포함되지 않았다.

“대문파라면 수법 정도야 다들 있지만. 거쳐 가는 단계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면 수법은 인기가 없다네. 자네들 셋만 여기 있는 게 그걸 반증하지.”

게임 내의 설명과 거의 비슷했다. 무기의 발달도 영향이 있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마석 덕에 이곳의 기술은 현대보다도 뛰어났다.

별거 아닌 양산형 검조차, 과거로 갔으면 충분히 신검이라 불릴만했다.

“권법이나 장법은 여전히 주류 아녜요?”

나도 들었던 의문을 한여름이 대신 물었다.

“좋은 질문이라네. 결국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으니. 마음가짐의 차이가 가장 결정적이었다. 대부분은 수법을 그저 보조적인 무공으로 생각했기에 따로 공들여 익히진 않았어. 권법이나 장법은 그 자체를 파고드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

나만 해도 게임 내에선 권사였다.

초반에는 리치도 짧고 데미지도 낮았지만, 가면 갈수록 강력한 한방을 꽂아 넣는 게 가능했다.

전형적인 대기만성형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는 얘기네. 그 자체로 초상승의 무학도 있어. 소림의 대력금강수大力金剛手나 혈수마공, 소수마공 등이 대표적이지. 뒤의 둘은 익히는 조건이 까다로워 현대까지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만....”

...응?

방금 혈수마공이랑 소수마공 얘기가 나온 것 같은데.

“마공이라 그런 거 아닙니까?”

넌지시 물었다. 한여름도 소수마공 얘기가 나오자마자 흠칫한 게,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이건 꽤 중요한 사실이었다.

만약 둘이 진정한 마공 취급받는다면,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기록을 보면 의외로 정순한 무공이었네. 다만 익힌 자들이 잘못 쓰는 경우가 많아 마공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한여름이 내 옷깃을 살짝 붙잡았다. 여전히 불안한 모양이다.

“정말 아쉬운 일이지. 중국이 멸망하고 현대로 오면서 실전된 무공이 너무 많다네. 급하게 대피하다 보니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무학도, 게이트를 막아내다 사망한 위대한 무인들도. 너무 많았어.”

독고패 총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굵은 눈썹 사이로 시름이 담겼다.

게임에서 한국이 메인인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에 중원무공아카데미가 설립된 까닭 역시.

중국이 멸망해 버렸거든. 덕분에 가장 가깝고 문화권도 비슷하며 발전한 선진국인 한국으로 죄다 급하게 밀려들었다- 그런 설정이다.

어찌 됐든, 덕분에 본래 중국에 있던 수많은 문파가 한국으로 대피해 왔고.

한국 정부는 군대까지 보낼 정도로 적극적으로 이주를 도운 탓에 이 좁은 땅에 온갖 대문파가 몰려 복마전이나 다름없게 변했다.

경상남도 사천시에 있는 당문만 봐도 그랬다.

한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당문이 통째로 이주해와, 사천시는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로 발전했다.

중국의 사천四川과 한국의 사천泗川은 한자부터 다르지만 뭐, 설정이 아무튼 그랬다는데 어쩌겠는가.

“총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을 마치고 나는 입을 열었다. 고민이긴 했다. 무혼을 믿고 철저하게 비밀로 할지, 아니면 어느 정도는 드러낼지.

“말해보게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만일 무림에서 혈수마공이 사악한 무공 취급을 받지 않는다면, 과도하게 숨길 이유가 없다.

무공 자체의 특색 때문에 독고패 정도면 알아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아예 익힌 무공이 없는 척해야 하는데, 그러면 성장이 지체될 수 있다.

“저와 한여름은 각각 혈수마공과 소수마공을 익히고 있습니다. 실전된 무학을 어디서 익혔는지는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만.”

그럴 바에야, 차라리 패를 까고 시작하는 게 낫겠지. 손을 세우고 혈수마공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붉은 기운이 손날에 아른거렸다.

뚫어지게 내 손을 보던 독고패 총장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김무공?”

내 돌발행동에 한여름이 깜짝 놀랐다.

“보여드려.”

“...응.”

익힌 무학을 공개한다는 건, 곧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도 마찬가지였으나.

혈수마공이든 소수마공이든 실전된 무학이고 조언을 받을 거면 일정 부분은 어차피 밝혀야 했다.

“...태양과 월음에 혈수와 소수. 자네들은 대체....”

“사문은 없습니다. 조언이 필요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멀뚱멀뚱 고개를 뜨고 있던 한여름도 나를 따라했다.

격투기도 그렇지만, 제대로된 스승 없이 상승의 경지로 가는 건 요원했다.

비급만 보고 무공을 익힌다?

달마나 초대 천마 정도 되는 희대의 대종사급 천재라면 모를까.

평범한 겜돌이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이용할 건 최대한 이용한다.

“고개들 들게나. 그거야 어차피 담당 교수로서 당연히 해야 할 부분이니. 벌써 기를 이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독고패 총장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알겠네. 내 앞으로 수업 방향에 대해선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구나. 일단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세.”

어차피 오리엔테이션 개념이긴 했지만, 수업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독고패 총장의 축객령에 우리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먼저 일어났다.

“...혈수마공이라니. 그대는 알면 알수록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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