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길에 천하연이 나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쳐다보는 동글동글 커다란 눈동자가 꼭 강아지 같았다.
“다들 비밀 하나쯤은 가지고 있잖아?”
“그도 그렇군.”
천하연만 해도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는 비밀이 둘이었으니. 그녀가 바로 수긍했다.
“나 배고파.”
딱 붙어서 졸졸 따라오던 한여름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냐. 밥이나 먹자.”
“응.”
“너도 먹냐?”
내 질문에 천하연이 우리 둘을 빤히 응시했다.
“그대들도 오후에 비무 수업 듣나?”
“비무 수업은 필수잖아. 당연히 듣지.”
“그럼 실례하지.”
옆쪽으로 천하연이 따라붙었다.
한여름이 입을 댓발 내밀었지만, 이건 전략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소천마와는 최대한 친분을 쌓아두는 게 낫다.
딱콩.
한여름의 머리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였다.
입술을 삐죽이는 게 이상하게 귀여워서 충동을 참기 힘들었다.
“왜 때려...!”
한여름이 곧바로 눈을 치켜떴다.
“귀엽다고.”
“으, 응?”
“가자.”
“...응.”
한여름이 새빨개진 얼굴로 내 옷깃을 잡았다.
역시 귀엽고만.
천하연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건 원래 참으면 병 되거든.
그나저나 비무 수업이라....
재수 없으면 천하연이나 서문예린, 김용과 붙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얘들 제외해도 만만한 상대가 있나 싶지만.
...그나마 한여름 정도?
근데 얘는 다른 의미로 어려우니까 내 쪽에서 사절이다.
일단 한여름 포함 넷만 안 걸리길 기원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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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카페에 셋이서 사이좋게 둘러앉았다.
“너도 커피 마시냐?”
김무공이 신기한 눈빛으로 빨대를 입에 물고 있는 천하연을 쳐다봤다. 천하연은 달달한 카라멜 마끼아또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먹고 있었다.
“그대는 이상한 질문을 하는구나. 나를 무슨 원시인쯤으로 여기느냐?”
“...아니, 뭔가 고풍스럽게 차만 마실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있겠느냐.”
픽 웃는 천하연을 보며 김무공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편하게 대화하는 둘의 모습에 한여름은 내심 복잡한 기분이었다.
‘적응 너무 빠른 거 아냐?’
원래 성격 자체가 그런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걸 고려해도 김무공의 적응 속도는 비정상적이다. 오히려 약간 신나 보이기도 했다.
‘난 뭘 기대한 거지 대체....’
한여름이 속으로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 거짓된 세상에서 둘만 진짜다.
뭐, 그런 로맨스 소설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무공은 그냥 한여름이든, 천하연이든 똑같이 대했다.
이해는 갔다. 게임 내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지독히 현실적인 게 이곳이었으니까.
웃고 떠드는 주변 사람들이 가짜라고, 한여름은 도저히 그리 생각할 순 없었다.
기대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하연을 응시하며, 한여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쟤 여자라며.’
중성적인 미남처럼 보였지만.
김무공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그대는 아까부터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문득 천하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아냐. 둘이 사이좋아 보여서.”
“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구나.”
“그래? 인기 많아서 좋겠네. 김무공.”
“질투하냐?”
김무공이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히죽히죽하는 걸 보니 소수마공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싶은 충동을 한여름은 애써 참았다.
“시꺼. 정리나 해. 수업 가야지.”
다 먹은 음료 트레이를 들면서 한여름이 말했다.
“오냐. 귀엽긴.”
살짝 어깨를 톡톡 치는 김무공의 손길이 나쁘진 않았다.
순간 자연스럽게 배시시 웃으려는 걸 멈추고 억지 무표정으로 트레이를 반납했다.
뭔가, 억울한 기분이다.
***
얜 또 뭐가 불만이신지.
아까부터 한여름은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집어넣기를 혼자 반복 중이었다.
“어휴.”
비무 수업 장소로 가는 길을 걸으며, 한여름의 머리를 헝클었다.
“여자 머리 함부로 만지는 거 아냐.”
“그래? 그럼 앞으로 영원히 안 건드리면 됨?”
“...싫어.”
기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한여름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작아서 안 들리는데?”
“니... 맘대로 해.”
한여름이 미간을 좁히며 툴툴거렸다.
쓸데없이 자존심 부리긴.
“오냐.”
“그대들 사이는 참으로 신기하구나.”
“글킨 해.”
나도 동의했다. 천하연은 우리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왔다.
수업 장소는 입학식이 열렸던 강당이었다. 입학식이 끝난 후, 그곳에는 수업을 위한 거대한 비무대가 설치됐다.
실내로 들어가자 시끌시끌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남궁철! 오늘에야말로 네놈과 끝을 보겠다!”
붉은 무복에 머리를 시원하게 위로 올린 사내가 다른 생도를 향해 도를 겨눴다.
비무 수업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신경전이 벌어진 모양이다.
“시끄럽다, 팽호영. 상대는 나중에 얼마든지 해줄 테니 도나 집어넣어라. 친우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푸른 무복을 입은 서늘한 인상의 사내가 천으로 검을 닦으며 말했다. 아예 도를 든 사내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쟤들 왜 저래?”
한여름은 둘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누군지 몰라?”
“이상하게 익숙하긴 한데.”
나도 처음에는 가물가물했지만, 남궁철과 팽호영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라이벌 관계가 아카데미 때부터 이어져 왔다니.
한여름을 슬쩍 강당 2층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뭐, 뭐야 갑자기.”
“쟤들 그거다. 검군劍君이랑 도왕刀王.”
“라온 길드 검군이랑 재호손 길드 도왕?””
한여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별호를 말하니 떠오른 모양이다. 둘은 경쟁 관계에 있는 길드의 후계자였다.
라온과 재호손.
안휘와 하북이 사이좋게 개 박살이 나면서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본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의 진전을 이은 길드들이기도 했다.
“어. 이때부터 이미 앙숙이었나 본데.”
“지금 보니 비슷하게 생기긴 했어.”
한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로 시선을 옮겨 강당에 모인 생도들의 면면을 쳐다봤다.
‘...장난 아니긴 하네.’
이곳에 모인 생도들은 하나같이 괴물들뿐이었다. 나와 한여름이 과연 제대로 비무를 하는 게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검룡이랑 소천마, 검화가 서로 싸우면 누가 이길까?”
나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관찰하던 한여름이 물음을 표했다.
“장기적으로는 소천마에 한 표.”
“소천마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한여름이 입술을 샐쭉거렸다.
“응 아님. 객관적으로 판단했거든.”
실은 미래까지 본 결과지만. 불완전한 천마신공이 보완된다면, 천하연이 대체 무슨 괴물이 될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미래에도 고고한 군림자에 가까웠으니 별일이야 있겠느냐마는.
내가 차기 혈교주의 성장에 강한 태클을 걸어버렸고, 앞으로도 수많은 변수를 발생시킬 걸 생각하면.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난 그럼 검룡.”
속 다 보인다. 내가 여성인 천하연을 찍자 반발심에 검룡을 택한 모양이다. 빤히 보이는 수작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귀엽기는.”
“무, 뭐?”
갑작스러운 내 공격에 한여름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급격히 당황했다.
“근데 쟤 철혈여제 맞지?”
슬쩍 말을 돌렸다. 딱 이 정도가 좋다.
내가 턱짓한 곳에는 적발 거유의 미소녀가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이랑 철혈여제라니. 너무 안 어울리는 거 아냐?”
“그러니까.”
남들에게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쏙 박혀서 동그란 안경을 쓰고 책을 읽는 철혈여제라니.
“진짜 철혈여제 이지아... 맞아? 쌍둥이 그런 거 아닐까?”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인지 부조화가 올 지경이었다.
저런 소심한 캐릭터가 미래에는 웃으면서 악인들 머리통 터트리는 게 취미인 철혈여제가 된다고?
믿기질 않았다. 오죽하면 철혈여제 이전 별호가 염화炎火였겠는가.
철혈여제의 배경 스토리는 제대로 밝혀진 적이 없어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추론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일인전승 신비문파 혼원문混元門 출신이라는 것 정도만 알려졌다.
“두고 보면 알겠지. 내려가자.”
“응.”
어느덧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담당 교수가 강당 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비무 수업 담당 교수는 고아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검은 무복에 정교한 자수로 수놓아진, 금빛 난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다.
장백검군長白劍君 고승빈.
아카데미 부총장이자 장백검문의 장로였다.
비무 수업은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위험한 수업이다 보니, 장백검군이 직접 나선 모양이다.
“다들 모였군. 비무 수업을 맡은 장백검군이라네. 수업 시작에 앞서, 자네들에게 당부할 것이 있다네. 비무 수업은 실전이 아니야. 서로의 무를 겨루고 능력을 확인하기 위함이지, 상대를 쓰러트리는 게 목적이 아니란 말일세.”
장백검군이 우리를 한번 훑었다.
“무인인 이상 경쟁심을 표출하는 건 괜찮네. 다만 과한 살기를 내뿜는 건 금지라네. 승부에 너무 집착하지 말게. 혹여 그러다 누군가를 심히 해하는 생도가 있다면, 나로선 처벌할 수밖에 없다네.”
이어서 장백검군이 비무의 주의사항에 관해 얘기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들이었다.
비무는 생사결이 아니었으니까. 검기 등 위험한 기술도 금지였다.
애초에 이 나이부터 검기 같은 걸 쓸 수 있는 생도는 몇 되지도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