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31)

“상대는 어떻게 뽑는 겁니까?”

“이렇게 뽑는다네.”

장백검군이 품에서 작은 포인터를 꺼내 눌렀다.

강당 정면의 대형 디스플레이에서 마치 대진표처럼 빈칸들이 나타났다.

“무작위니 불만 품진 말게나. 어차피 자주 바뀔 거라네.”

묘하게 이런 부분에선 현대식이구나.

제비뽑기인 줄 알았는데, 그냥 간단한 프로그램을 돌려서 정해버렸다.

“오, 김무공. 파이팅...!”

정면을 보던 한여름이 쿡쿡거리며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뭔가 했더니, 내 상대가 정해졌다.

...에라이 시바.

다짜고짜 처음부터 중2검제라니.

“나는 황보륜인데? 이거 누구지.”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황보세가 출신이네. 황보륜이면 누구더라....”

기억이 날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고.

가물가물했다. 그리 유명한 애들은 아니었을 텐데.

“너도 모르는 게 있구나?”

“닥쳐봐. 지금 생각 중이니까.”

“닥치라니, 너무해.”

“시끄럽고, 기억났다.”

“...응?”

한여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철격쌍웅鐵擊雙熊. 저기 쌍둥이들.”

“...어, 맞아. 그런 애들도 있었지. 넌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 대단하네.”

“나의 위대함을 다시 깨달았냐? 좀 더 칭찬해라.”

“싫어.”

내 이죽거림에 한여름이 고개를 홱 돌렸다.

비록 천하연 같은 초특급 네임드에 비하면 조금 모자랐지만, 철격쌍웅 역시 나름 끗발을 날리는 친구들이었다.

쌍둥이 형제의 합격술은 천하일절이라나.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황보륜이면 형 쪽인 대웅大熊이다.”

“나 맞아 죽는 거 아냐? 저 덩치 좀 봐.”

별호에 괜히 ‘곰’이 들어간 게 아니듯이, 둘은 거대한 바윗덩어리 같은 덩치를 자랑했다.

직각으로 꺾인 어깨선만 봐도 교복이 거의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올라있었다.

“...괜찮겠지. 비문데. 일단 나부터네.”

사실 저쪽보다 내가 더 문제였다.

중2검제라고 신나게 비꼬긴 했지만, 검룡 김용의 실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이 탁월했다.

“그러게. 재수도 없지. 죽지만 마.”

“내가 이기면 어쩌려고?”

“이기면, 기념으로 하자”

“하긴 뭘.”

“그거 있잖아.”

한여름이 손가락 끝을 꼼지락거렸다.

어설픈 연기 하는 거 다 티 난다.

“응, 안 통함.”

“칫.”

역시나 장난치는 게 맞았다. 어딜 낚으려고.

“너나 조심해라.”

“야쓰. 싸울 때 어디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줘.”

“당연하지. 내가 너 놔두고 어딜 가겠냐.”

“그럼 괜찮아.”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여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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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 차례가 다가왔다.

비무대로 올라가자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며 턱을 45도 각도로 들어 올린 검룡, 김용이 보였다.

“훗.”

나를 보며 김용이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 저 면상을 보니까 참을 수 없는 아니꼬움이 내면에서 솟구쳐올랐다.

“이름이 뭐지?”

비무 시작에 앞서 김용이 나를 보며 물었다. 디스플레이에 빤히 적혀 있는 것도 보지 않았다는 얘기잖아? 건방진 새끼 같으니.

“김무공이다.”

“들어본 적 없군. 사문은?”

“비밀이다.”

“아아, 신비문파인가. 훗, 요즘도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는 곳이 있단 말인가.”

“...마음대로 생각해라.”

“삼 초를 양보하지. 자아, 마음껏 덤벼 보거라.”

김용이 검집을 머리 위로 들어 검을 뽑으며 양팔을 벌렸다. 인정하긴 싫지만, 중2병도 저쯤 되니 자못 봐줄 만하다. 주둥아리만 닥치고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일단 객관적인 승산은 제로.

없다.

검기를 쓰든 안 쓰든 상관없이 100번 싸우면 100번 다 진다.

그만큼 나와 김용의 경지 차이는 극심했다.

상대는 젖을 뗀 순간부터 온갖 지원이란 지원은 다 받은 구성 그룹의 유일 후계자다. 구성 그룹은 대한민국 최대 기업인 데다가, 최강의 무력 조직인 구룡 길드를 산하로 두고 있다.

중국에서 수많은 문파가 건너왔음에도 구성 그룹의 위치는 확고했다. 김씨 가문 가전 검법은 세계제이이일-이라던가?

국뽕이 첨가된 설정의 수혜를 직빵으로 받은 게 저 김용이라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천무지체라는 사기급 신체까지.

‘주인공’이라는 게 있다면 원래 저런 인물이었겠지. 검기를 쓰지 못한다는 패널티가 있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였다.

‘어쩐다.’

삼 초를 양보하겠다는 말이 허언은 아님을 증명하듯이, 김용은 제 자리에서 오만한 태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시퍼런 날붙이를 앞에 두고 있음에도, 생각보다 긴장되진 않았다. 양심출타 특성이 이런 곳에선 제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비무용 권갑 정도야 받았지만, 리치 차이도 있고 정면에서 부딪치기엔 위험부담이 크다. 애초에 상대의 실력 자체도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천천히 보법을 밟아가며 천마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응?’

뚫어지라 김용을 관찰하던 중.

자연스럽게 난 깨달았다.

‘왜 그냥 공격하면 될 거 같지?’

김용의 삐딱한 자세에서 보이는 빈틈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상대가 극도로 방심한 것도 있겠지만.

마치 이마에 새로운 눈이라도 달린 듯 상대의 허점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어딜 어떻게 공격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도.

결정적으로, 김용은 ‘남자’였다.

내 미친 유니콘 신공은 남자가 상대일시 강화 효과가 있다. 상태창에서는 스탯 증가를 알리는 알림이 깜빡였다.

근력 : 10(F)->20(E)

내구 : 10(F)->20(E)

민첩 : 10(F)->20(E)

내공 : 60(A)->70(S)

온몸에 힘이 넘쳤다.

다른 스텟도 전체적으로 올랐지만, 안 그래도 영약 복용으로 60(A)에 달했던 내공이 70(S)까지 상승했다.

천마신공을 순환시켜보며 확신했다. 이거 다 때려 박으면 김용은 즉사다.

A와 S는 고작 한 단계 차이였지만, 느껴지는 기운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물론 어디까지나 공격을 먹일 수 있을 때 얘기고.

지금 모습도 일부러 빈틈을 내비쳐 공격을 강제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으니, 정확한 건 미지수였지만.

‘고맙다, 김용.’

삼 초를 양보해준다는 얘기 덕에, 나는 위험부담 없이 시험할 수 있게 됐다.

무혼을 얻으면서 깨달은 구결을 토대로 슬쩍 오른손 장심에 혈수마공의 기운을 모았다.

혈수마공은 기본적으로 내가중수법이 가미된 수법手法이었다. 힘 조절을 했다 하더라도 정타로 맞으면 버틸 리가 없다.

“야, 김용.”

넌지시 말을 건넸다.

“벌써 무력함을 느꼈느냐? 하아, 재미없구나. 항복할 거면 빨리하거라.”

김용이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놈은 갑자기 김칫국을 왜 사발로 들이키는지 원. 저러면 나야 좋지. 얼마나 방심했는지, 무인이라는 녀석이 눈꺼풀까지 반쯤 감았다.

검은 이미 바로 앞에 꽂고 손만 올리고 있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빈틈이 2배는 늘었다. 좀 치사하긴 하지만, 쟤도 이번 기회에 좀 철 좀 들어야지.

쾅- 발로 땅을 찍어누르며 전진했다.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음에도 마치 누가 내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법을 밟았다.

김용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뭣...?!”

내 기습을 알아차린 듯했지만 이미 늦었다. 천마신공에 포함된 천마군림보天馬君臨步는 우스꽝스러운 이름과 다르게 천하일절이다.

아직은 경지가 미약하여 제대로 활용할 수는 없었지만, 천마군림보에 일시적으로 김용의 움직임이 억압당했다.

괜히 EX급의 무공이 아니다. 당황한 김용을 향해 전신의 무게를 실어서 손을 내질렀다.

혈수마공 血手魔功

혈염파천 血炎破天

극양의 기운이 담긴 묵직한 장이 김용의 복부를 향해 쇄도했다. 내가 시전하면서도 놀랄 정도로, 자연스럽게 투로가 이어졌다.

쿵!

작은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이 김용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패도적인 혈수마공의 기운이 맞닿은 면에서 침투하여 김용의 내부를 휘저었다. 녀석의 허리가 거의 반으로 접힐 듯이 꺾였다.

“이, 이놈...! 쿠웨에에엑!”

울컥 피를 뿜으며 김용이 뒤로 물러섰다. 나는 슬쩍 장백검군 쪽을 바라봤다.

그는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괜찮냐? 힘 조절은 했는데.”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가 핏발 선 눈으로 날 노려봤다.

이거 괜히 원망 산 거 아닌가?

내뱉고 나니 조금은 후회됐다. 어차피 되돌릴 수는 없다만.

“김용, 더 할 수 있나?”

결국 지켜만 보던 장백검군이 정신을 차리고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한동안 몸을 추스르던 김용이 이를 으드득 악물었다.

“크윽... 치료가... 필요....”

김용이 입을 가리고 뒤로 물러섰다.

내 승리였다.

혈수마공 성능 확실하군. 손에 타격감이 있긴 했었지만, 고작 한 방에 끝나버릴 줄은 몰랐다.

무리해서 더 싸우려면 싸울 순 있을 텐데, 비무인데 굳이 모험할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김용의 반응은 나름 합리적이었다. 태양지체에서 비롯된 양기를 극양의 무공인 혈수마공으로 직접 내장에 때려 박았으니.

모르긴 몰라도 내부가 만신창이긴 할 거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었다.

물론 저 중2검제가 설마 자존심을 버릴 줄은 몰랐다. 이 상황에서도 나름 이성을 유지하는 걸 보면 괜히 상승의 경지에 이른 건 아닌 듯했다.

“몸조리 잘 해라.”

비무대를 내려가는 김용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김용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홱 돌리며 외면했다.

남자 놈이 저러니 한 대 더 패주고 싶은데.

다시 온전한 상태로 싸우면 내 필패였다.

방금 비무는 어디까지나 상대의 극심한 방심 덕에 운 좋게 이긴 거니까.

그래도 이긴 건 이긴 거고, 빈틈이 본능적으로 보이는 경험은 꽤 신기하긴 했다.

액티브 스킬이라도 쓰는 것처럼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역시.

‘이것도 무혼 효과인가?’

아래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곰곰이 생각했다. 제대로 된 실전을 겪어보지도 못한 내가 인간 병기들과 싸울 수 있는 원인은 결국 무혼 밖에 없다.

갑자기 천재가 됐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내가 발걸음을 옮기는 것에 맞춰, 주변이 꽤 시끌시끌해졌다.

쟤들로선 갑툭튀한 놈이 차기 천하제일인 후보를 일격에 쓰러트린 거로 보일 테니까. 처음에는 무시에 가까웠던 시선들이 슬슬 경계로 바뀌고 있었다.

“오빠 이기고 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보는 한여름에게 어깨동무했다.

“오빠는 무슨... 어떻게 한 거야?”

“걍 되더라. 무혼 공유한다 했지?”

“응.”

“직접 겪어보면 알 거다. 아직은 순번 좀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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