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한여름까지 비슷하게 승리한다면, 내 가정이 확실해지는 거다.
“오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마 해도 마지막쯤?”
“구경이나 하자.”
고개를 갸웃하는 한여름을 데리고 좌석 쪽으로 향했다. 우리에게 향하는 시선이 곱절은 늘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어차피 곧 새로운 비무가 시작된다.
다음은 파오운破燠雲 후덕훈과 철격쌍웅 중 동생 쪽인 소웅小熊 황보광이었다.
“개발자 진짜 악질이다. 별호랑 이름이 뭐야 저게.”
한여름이 비무대를 보며 혀를 찼다. 거대한 근육 덩어리인 철격쌍웅과 거대한 살덩어리인 후덕훈.
둘의 모습은 덩치만 보면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완벽하게 반대라 실소를 자아냈다.
“우습게 보지 마라. 괜히 나중에 덕왕德王이라 불리는 자가 아니니까.”
“...나도 알지. 검룡이랑 다른 의미로 괴물이잖아.”
또 검룡이냐. 나는 한여름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 검룡 내가 이겼는데?”
“...그럼 천하연.”
귀엽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덕훈의 체형은 단순히 많이 먹어서 저렇게 됐다기보단, 신강지체神强肢體를 타고난 데다가 금강불괴신공金剛不體神功으로 육신갑肉身甲의 경지를 추구하기에 저런 몸이 된 거였다.
지금은 다들 웃음거리로 여기지만, 금강불괴신공을 대성하는 순간 강기조차 몸으로 막아내는 괴물이 탄생하게 된다.
“오, 시작한다.”
덩치 둘이 엉켜서 몸을 부딪치고 있으니, 비무대가 좁아 보였다.
“역시 황보광 쪽이 유리하나?”
한여름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역시 싸움 구경 싫어하는 사람 없는 법이다.
“글쎄.”
당장은 황보광 쪽이 유리해 보였지만, 실질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후덕훈의 느려터진 공격을 피하며 현란하게 권격을 가하고 있었지만.
정작 신나게 얻어맞는 후덕훈의 표정은 평온했다.
권기야 금지당했으니, 실질적으로 타격을 입힐 수단이 너무 제한됐다.
결국, 곰 두 마리가 한참을 투덕거린 결과는 시간제한에 의한 무승부로 끝났다.
이어서 비무는 계속됐다.
천하연과 당소소. 천하연은 마치 당소소를 가르치듯이 여유롭게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암기든 뭐든, 그 무엇도 천하연의 옷소매를 뚫을 수는 없었다.
독은 금지당했지만, 아마 독을 썼어도 결과가 그리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무슨 수를 쓰든 가볍게 쳐내는 천하연을 보며 당소소가 항복했다.
“...진짜 쎄구나.”
한여름이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이 외에도 둘 다 동시에 기절하면서 무승부로 끝난 남궁철과 팽호영의 비무라든지.
살벌한 검초를 내지르던 서문예린 등.
나름 화려한 승부가 많이 나왔다.
“내 차례네.”
정신없이 비무를 관전하다 보니 어느새 한여름의 차례가 다가왔다. 한여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이... 딱 봐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
얘 긴장했다.
나야 양심출타 때문에 별생각 없이 비무에 임할 수 있었지만, 한여름은 대놓고 긴장한 게 보였다. 바로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말랑말랑한 촉감이 나름 중독성이 있다.
“꺅...! 뭔데!”
“긴장 풀고, 무리하지 마.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야쓰.”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는지, 한여름이 성큼성큼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원래도 큰 황보륜이랑 비교하니까 이건 뭐, 거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였다.
“으음... 내 상대가 하필 이런 작은 소저일 줄이야.”
황보륜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 작은 편 아닌 거 같은데.”
한여름이 입술을 샐쭉거렸다.
몇 마디 대화 이후, 곧바로 비무가 개시됐다.
퍼어어엉-!
시작과 동시에 폭음이 터졌다. 원형의 경파와 함께 황보륜의 육중한 몸이 붕 떠서 비무대 끝까지 날아가 버렸다.
일격에 다운이었다.
다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한여름이 내 쪽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쟨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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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해있던 황보륜이 목덜미를 부여잡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장백검군이 황보륜의 손목을 잡고 조심스럽게 기운을 흘려보냈다.
반응을 보아하니 큰 부상은 아닌 모양이다. 황보륜이 멀쩡한 걸 확인한 한여름이 경악하는 사람들을 가르고 내게 다가왔다.
진기 운용의 여파인지 차가운 김이 입에서 연신 새어 나왔다.
“나 왔어.”
한여름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헤실헤실 웃어댔다. 뭐가 그리 좋은진 모르겠다만.
“잘했다.”
이젠 알아서 머리를 먼저 살짝 내밀길래 쓰담쓰담 해줬다. 무슨 고양이가 인사한답시고 박치기하는 것도 아니고 원.
“따뜻해.”
아예 내 다른 쪽 팔까지 양손으로 잡으면서 한여름이 말했다.
나 역시 시원한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
“사이좋게 승리했군. 축하한다만. 그대들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단순 친우라고 보기는 힘들구나.”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천하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깨닫고 보니, 우리를 힐긋힐긋 쳐다보는 시선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아냐. 이거 무공 부작용이다.”
“호오, 신기하구나.”
천하연이 팔짱을 끼고 시선을 위아래로 훑었다.
“우웅, 좋아....”
이미 한여름은 온기에 녹아내리기 직전이다. 눈이 반쯤 풀려있다.
“야, 정신 차려.”
팔로도 모자라 아예 딱 달라붙을 기세길래 슬쩍 밀어냈다. 한여름의 등을 툭툭 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으, 응?”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린 한여름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냐?”
“내가 미쳤지....”
자괴감에 휩싸인 한여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음양인가. 흥미롭구나.”
천하연이 묘한 탄성을 내뱉었다. 한여름을 마지막으로 비무 수업도 끝이 났다. 수업 전과는 우리를 보는 시선이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무사히 첫날 수업을 넘긴 것에 나는 감사한다. 칼로 탱크도 썰어 대는 세계관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천하연은 따로 가볼 곳이 있다 해서 한여름과 둘이서 벚꽃길을 나란히 걸었다.
움트기 시작한 분홍빛 꽃망울에선 봄내음이 물씬 풍겼다.
붉은 저녁노을이 벚꽃 나무 사이로 비추면서 기나긴 그림자를 그려냈다. 조경에 꽤 신경 썼는지 학사에 널린 흔한 거리임에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야.”
갑자기 내 옷깃을 붙잡으며 한여름이 말했다.
“뭔데?”
“그... 아까는 무공 때문에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
“뭐 그런 걸 신경 쓰냐. 볼 거 다 본 사이에.”
“보, 볼 거?”
한여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다.
“이제 와서 부끄럽냐?”
“그럼 안 부끄럽겠냐...! 나도 여자거든.”
“언제는 이기면 하자며.”
대답 대신 한여름이 머리카락 끝을 배배 꼬아댔다. 잠시 우물거리던 한여름이 입술을 뗐다.
“하, 할래?”
“진심이냐? 지금 외출 안 될걸?”
“...그렇네. 시간 늦었구나.”
한여름이 짙은 숨을 내뱉었다.
진짜 할 생각이었냐....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다.
“주말은 외출 자유잖아.”
“...몰라.”
입술을 샐쭉거리는 한여름의 허리 뒤쪽으로 팔을 둘렀다.
“뭔데, 갑자기...!”
“좀만 걷자.”
“누가 보면 어쩌려고.”
“여기 사람 없잖아.”
생각보다 음기가 오래 가는지 아직도 몸이 조금 차가웠다. 내 옆에 딱 달라붙게 한여름을 당겼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몸을 맡겼다.
우리는 보폭을 맞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무공을 익히면서 감각이 발달한 탓인지 콩닥콩닥거리는 한여름의 심장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반면 내 심장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온도 차에, 조금은 복잡미묘한 기분이다.
‘모르겠다.’
어쩌면 ‘평정심’을 유지해 준다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느긋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벚꽃길의 끝이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생도들이 꽤 오가는 기숙사 구역이다.
기숙사는 남성 구역과 여성 구역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누가 유니콘 아카데미 아니랄까 봐.
과거 무협 소설들 보면 무림인들은 이성 관계에 비교적 자유분방하다- 이런 게 많았는데, 어째 현대 무림은 정반대로 변한 듯했다.
아까 봤던 수업에도 남자와 여자 무리가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덕분에 우리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한여름의 허리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잘 들어가라. 낼 보자.”
“야쓰.”
한여름이 여성 기숙사 구역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나도 뒤돌아섰다.
나도 그렇고 한여름도 그렇고.
일반인이나 다름없는데, 어릴 때부터 십수 년 이상을 수련한 괴물 중의 괴물들 상대로 승리한 걸 보면.
시스템의 보정이 있다 해도 실감이 잘 나진 않았다.
무혼 역시, 고금제일인에 근접한 자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 말한 게 절대 허언이 아니었다.
‘어렵군.’
차라리 아예 게임 시작 시점으로 빙의했으면 좀 나았을 텐데.
게임에서 과거의 얘기는 단편적인 배경에 불과했다. 공개된 것도 적고, 당연히 나로서도 많은 정보를 알 수는 없었다.
게임이란 어디까지나 이벤트 위주였으니까.
그 이벤트는 대부분 게이트 사태와 연관이 있었다. 내가 마왕을 잡으려다 눈깔빔 맞고 산화한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게이트는 더 자주, 강하게 발생한다. 물론 이 세계를 위협하는 건 게이트가 전부는 아니다. 같은 인간들도 있었다.
인간 중에서 가장 위협적인 집단이라면 역시 혈교였다.
다음으로는 만독문.
마지막으로 국정원 무림감찰부.
하나같이 지금 내 수준으로 건드리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였다.
부활 같은 게 없는 이상 힘을 갖추기 전까진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한다. 미래 계획을 생각하며 상념에 빠져있었더니 어느새 내 방 앞이다.
딸깍. 문을 열었다.
“늦었구나.”
검은 비단으로 된 잠옷만 걸치고 소파에 기다랗게 턱을 괸 채 누워있던 천하연이 먼저 인사했다. 금빛 머리칼이 소파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당연히 지금 천하연은 여성의 모습이었다.
“할 일 있는 거 아니었어?”
뭔가 일이 있어서 갔다기엔, 이미 샤워까지 마친 모양새였다.
“그대들 사이에 끼어들 만큼 눈치가 없진 않구나.”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천하연은 이미 나와 한여름이 연인인 걸로 확정 지은 모양이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내 앞까지 다가왔다. 맑은 녹안이 날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