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음... 한 가지 충고해도 되겠나?”
“뭔데?”
“애매한 게 가장 몹쓸 짓이다. 사내라면 차라리 쓰레기가 되는 편이 나아.”
“야, 쓰레기라니.”
반박하려던 나는 천하연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디까지 애매한 것보단 낫다는 거다. 오해하지 말거라. 그만큼 이도 저도 아닌 건 사람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드는 법이니라.”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니까.”
나도 몰라서 그러겠는가. 막상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저질렀다간 뒷일이 감당 안 될 것 같으니 망설이는 거지.
물끄러미 나와 눈을 마주치던 천하연이 피식 웃었다.
“그도 그렇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가장 어려운 법이지. 내가 주제넘었구나.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마.”
“아니, 뭐 사과할 것까지야 없고.”
천하연이 다시 소파에 가서 양반다리를 하고 풀썩 앉았다.
“그대는 선인이구나.”
“언제는 쓰레기가 되라며?”
살짝 쏘아붙이며 나도 천하연의 옆으로 가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영웅은 삼서사첩이 기본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어느 정도는 짐작했지만, 쓰레기라는 말이 그런 의미였냐....
“현대에서 그랬다간 칼 맞아요.”
“무인이라면 칼 맞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되는 법이지. 당장 나만 해도 어머니가 셋이다.”
“...그거 불법 아냐?”
천하연이 이상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검으로 사람을 해하고 죽이는 무림인이 불법을 논하는 게 넌센스라 생각하진 않나?”
“난 그런 말투로 넌센스를 말하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은데.”
“세계화 시대니 말이다.”
“여성들은 그런 거 혐오하지 않나?”
“그대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천하연이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음. 하긴, 괜히 쓰레기라 한 게 아니겠지.
“모르겠다.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아.”
“...그대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알고 있지 않나? 우리 몸.”
“월음과 태양이라 했나? 신교에서도 기록된 게 거의 없는지라 잘 알지는 못한다. 차라리 천무지체에 대한 내용이 더 많더구나.”
“그냥, 그거 관련해서라 생각해. 깊게는 말 못 하겠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한여름과 주기적으로 섹스해야 한다는 소리를 어떻게 말하겠냐.
애초에 그건 한여름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그런가. 더 묻진 않겠다만, 그대도 생각보다 힘든 삶을 살고 있나 보구나.”
“오냐. 죽겄다.”
애초에 이 미친 세계에 빙의한 것부터 멘탈 나갈만한 일이었다.
위이이잉-
순간,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이 여러 번 진동했다.
“암튼, 충고 고맙고. 난 씻으러 간다.”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기분 탓인진 몰라도 뒤에서 천하연의 시선이 느껴졌다.
[야! 왜 연락 없어!]
얘도 양반은 못 되는고만. 한여름이 불만 섞인 이모티콘 폭탄과 함께 톡을 보내왔다.
[지금 보낼라 했음.]
[구라 아니지?]
[오냐. 이런 걸 뭐하러 구라치냐.]
[그럼 됐어.]
[잘 들어갔냐?]
[야쓰. 서문예린 얘 너무 말이 없어서 심심해.]
[먼저 말 걸어.]
[내가 뭔 말을 해도 고개만 끄덕여. 살려줘....]
갑자기 왜 톡을 보냈나 했더니, 룸메이트가 영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다.
[그게 친근함의 표현일 수도 있잖아.]
[표정이 아예 없음. 사람이 아니라 예쁜 인형 같어.]
[먹을 거라도 먹이는 게 어때? 달달한 디저트류.]
[...! 좋은 생각이야. 역시 김무공.]
그 뒤로 톡이 뚝 끊긴 걸 보면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듯했다.
다 너를 통해 안 거란다. 한여름 쟤도 처음에는 저렇지 않았거든.
고등학생이라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가, 걸핏하면 삐지고 화내는 탓에 매번 달래느라 자못 고생했다. 가장 효과 좋았던 게 일단 입에 단 거 물리는 거였다.
졸업하니 귀신같이 저런 성격으로 변했지만.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부모 잃고 방황하는 아이를 내버려 두기 좀 그래서 최대한 방법을 찾은 거였는데, 대체 어떻게 견뎠는지 참.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다.
***
샤워를 마치고 난 이후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온 탓에 침대에 그대로 누웠고....
정신을 차리니 따뜻한 아침 햇살이 뺨을 때리는 느낌이 들었다.
‘커튼 쳤을 텐데.’
아무래도 천하연이 먼저 일어난 것 같다.
무거운 눈꺼풀을 슬쩍 들어 올리니 정면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딘가를 빤히 보고 있는 천하연이 있었다.
그녀의 눈길을 따라 쭉 내려가 보니.
정확히 내 사타구니와 겹쳤다.
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불을 걷어차 버린 탓인지, 천하연의 시선 끝에는 태산같이 우뚝 솟은 산이 만들어져 있었다.
...시발.
다음화 보기
“으음.”
이제 막 일어난 척 자연스럽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천하연이 움찔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다 티난다야.
설마 천하연이 이런 쪽에 호기심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대 이, 일어나 있었는가?”
천하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부들거렸다.
“방금. 일찍 일어났네.”
“무인이라면 새벽에 일어나는 것 정도야 당연한 일이다.”
새벽에 일어나신 분이 방금까지 왜 내 앞에서 이러고 계셨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다.
반응이 궁금하긴 한데, 그러면 뒷감당이 좀.
“근데 뭘 보고 있었어?”
바로 물었다. 뒷감당은 무슨. 고고하신 소천마가 당황하는 모습을 쉽게 볼 일이 어디 있겠냐 이 말이야.
“...그대는 참으로 짓궂구나.”
천하연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들켰다.
어제 나와 한여름 사이의 관계를 바로 짚은 것도 그랬지만, 그녀는 상당히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내 의도를 바로 파악 당했다.
그래도 묘하게 귀여운 느낌이다.
“미안한데, 이런 쪽에도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어서.”
“...그냥, 깨우려고 왔다가 자연스레 시선이 간 것뿐이니라.”
“자연스럽게? 그거 참... 윽?”
팍.
반응하지도 못할 새에 이마에 지풍이 박혔다.
아프다. 강렬한 통증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분명 이거 혹 났다.
“그대는 장난이 심하구나.”
내 이마에 벌건 상흔을 남긴 천하연이 고개를 홱 돌렸다. 잠옷만 입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저러고 있으니....
귀여운데?
더 놀리고 싶다.
근데 여기서 더 놀렸다간 혹 정도로 끝날 리가 없다.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같이 살면 껄끄러운 일 생길 거라고.”
“아니, 껄끄러운 건 아니다.”
천하연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럼 다행이다만.”
“미안하다. 내가 과민반응했구나. 이마는 좀 괜찮나?”
“아파 죽을 거 같은데 괜찮아.”
“...미안하구나. 신기해서 무심코....”
신기하다니. 하긴, 내 유니콘 신공의 판별에 따르면 천하연도 처녀였으니까. 한참 호기심 많을 때긴 하다.
“남자들은 원래 아침에 다 그래.”
“모두 말인가?”
“모두... 까진 아니어도 대부분?”
“놀랍군. 다른 남성들도 이렇게....”
천하연이 손가락을 쭉 늘리며 길이를 가늠했다.
야 임마.
바로 앞에서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대체.
아예 한 손으로 부족해서 자신의 팔목에 대고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남의 눈치를 안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크기는 개인별로 차이가 크니 가늠하지 마라. 민망하니까.”
“그, 그렇군. 호기심을 참기 힘들구나.”
이건 뭐 처녀빗치 이런 건가?
돌아버리겠군.
“한 번도 본 적 없어?”
“...없다.”
그럼 그럴 수 있지.
“아무튼, 흔한 생리 현상일 뿐이니까 신기해할 거 없어. 난 먼저 씻는다.”
끄덕.
약간 맹한 눈빛의 천하연을 뒤로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
[최근 들어 수도권 주변에 실종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어제 실종된 시민들의 신원입니다. 혹시라도 실종된 분들이나 범죄 장면을 목격한 분들은 경찰 등의 국가 기관에 제보해주시기 바랍니다. 경찰과 무림맹의 합동 조사에 따르면 무림인이 개입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되니 일반 시민분들께서는 밤중에 외출을 삼가시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니 천하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었다.
“뭔 일 있어?”
“요새 사람이 실종되는 일이 잦다더구나.”
10년 전이면....
모르겠다. 나라 해서 기억력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10년 전에 발생한 사건은 애초에 게임에서 일일이 설명해놓지도 않았다.
“천마신교에서도 파악 못 했어?”
“우리라고 해서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 아직도 정파는 노골적으로 우리를 배척하는 탓에 한국에서 활동조차 쉽지 않구나.”
천하연이 씁쓸한 표정으로 TV를 껐다.
“혹시 혈교, 알고 있어?”
불현듯 뇌리를 스친 의문을 물었다.
천하연이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그대가 혈교는 어떻게 알고 있지?”
이 시점에선 비밀이었나?
“아니지. ‘어떻게’가 중요한 것이 아냐. 정보 교환할 생각 있어? 아직 수업까진 시간 좀 있는데.”
천하연이 워낙 날 일찍 깨운 탓에 대화할 여유 정도는 있었다.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별거 아냐. 사소한 궁금증이니까. 천마신교는 왜 그리 혈교를 적대하는 거지?”
혈교 준동 당시 항상 들었던 궁금증이었다. 혈교와 가장 목숨 걸고 싸운 건 정파가 아니라 오히려 마교 쪽인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의나 협을 부르짖던 정파 문파나 길드 중 상당수는 혈교의 잔혹한 보복 몇 번에 바로 움츠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