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31)

혈교는 단일 세력으로 마교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강했고, 무엇보다 혁리악.

그 미친 새끼의 손속이 끔찍할 정도로 잔인했다.

저항했던 관련자 모두를 학살하고 그 가족까지 찾아서 고문하고 살해했으니까.

주춤했던 정파에 비해 마교는 플레이어의 협조를 얻어, 그야말로 미친 듯이 전쟁을 계속하여 결국 혈교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게임 내에서 마교는 일종의 신비 세력 취급이었던지라,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당연히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계속해 나간 정확한 배경 같은 건 찾기 어려웠다.

“혈교는... 우리의 치부라 볼 수 있겠구나. 한국으로 이주를 결정하면서 사악한 대법과 무공을 전부 봉인하고 폐기하는 데 반발하여 신교를 뛰쳐나간 세력이 혈교라고 보면 된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지.”

천하연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적의가 담겼다.

역시.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혈교 같은 강대한 세력이 갑자기 땅속에서 솟아날 리는 없었으니까.

“혈교 총단은 혁리세가다. 알고 있냐? 차기 혈교주 이름은 혁리악. 아직 혈교주 즉위는 안 했을 거다.”

천하연이 눈을 부릅떴다.

“그 정보, 확실한가?”

“확실하지만 증거는 없어. 아직까진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고 있을 시기니까. 나야 혈교의 위장을 벗겨낼 능력이 없지만, 너라면 다르지 않냐?”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던 천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볼 가치는 있는듯하구나. 그대는 대체....”

내 힘으로 혈교를 치는 건 자살 행위다.

그런데 굳이 홀로 해결할 필요가 있나?

이렇게 힘 있는 친구가 생겼는데 말이다.

만독문은 아직 없고, 무림감찰부는 정부 기관이라 야욕을 대놓고 드러내기 전까진 공격하기 힘들다.

근데 혈교는 다르지.

삭주굴근削株堀根.

화근은 미리 제거할 수 있으면 좋다. 아직은 과거보다 약할 테고, 혈교주가 가져야 할 기연도 내가 가로채 버렸으니.

완벽하게 뿌리 뽑는 게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

마교가 미리 견제만 해줘도 추후 일 처리가 훨씬 쉬워지겠지.

“그리고 이놈들도 확인해봐.”

혈교 준동 이벤트 당시 유명했던 놈들 몇의 이름과 특징을 종이에 적어서 건넸다.

“...교에 말해보도록 하지.”

“오냐. 고맙다.”

“나야말로. 만일 사실이라면... 그대는 나의 은인이자 신교의 은인이겠구나.”

“뭘 은인까지야. 수업이나 준비하자.”

천하연이 고개를 주억거리곤 씻으러 들어갔다.

그나저나, 실종이라.

백주대낮 수도권 한복판에서 하루에 수십 명씩 사라지는 세계라니.

다시금 느끼지만, 역시 이 세계는 시궁창이 맞다.

***

“무서운데.”

한여름이 내 옷깃을 슬며시 붙잡았다.

오늘은 전공필수, 실습수업이 있는 날이다.

‘실습’이라는 말처럼 실제 게이트에 등장하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유는 결국 게이트 사태라는 미증유의 재난을 막기 위해서니.

당연히 그쪽으로 커리큘럼이 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뭘 긴장까지야.”

“나 벌레도 못 죽인단 말야.”

눈동자가 슬쩍씩 떨리는 게,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다.

“게임에선 잘 죽였잖냐.”

“그건 게임이고...! 너는 막 죽일 수 있어?”

“아마도?”

“...진짜?”

“이따 봐라.”

경악하는 한여름의 등을 토닥였다. 어차피 나는 양심출타 덕에 사람을 죽여도 끄떡없을 거다.

...아마도.

고작 몬스터 따위에게 평정심이 흐트러질 것 같진 않았다.

“몸은 괜찮냐?”

수업 장소로 들어가며 김용에게 넌지시 말했다.

김용은 눈을 반개하고 근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팔짱까지 끼고 폼을 잡은 모습이, 완벽한 중2병 그 자체였다.

“흥, 신경 쓰지 마라...!”

김용이 콧김을 뿜으며 머리를 홱 돌렸다. 남자 놈이 저런 행동을 하면서 말하는 걸 보니 존나 꿀밤 마렵다.

기습해서 머리통을 혈수마공으로 내리치면 내가 이기지 않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지만 애써 자제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담당 교수님 여자던데. 화산파 매화검수 출신이라던가?”

한여름이 눈을 빛냈다.

“관심 있냐?”

“멋있잖아. 나 게임에서도 좋아했거든. 매화검수.”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도 쫄딱 망하는 판국에 바로 옆 섬서에 있던 화산이라고 멀쩡했을 리는 없었다.

일부만 살아남아 뿔뿔이 흩어졌던 화산파는 그래도 한국에서 재집결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경상남도 매화산에 새로운 도관을 세우고 NEW 화산파를 만들어 명맥을 이었다나.

아무튼, 그런 어이없는 설정이지만 열심히 재건하려 노력한 덕에 얼마 안 가 꽤 훌륭한 검수들을 배출한 모양이다.

재능만 있다면 바로 장문인이나 장로의 직계제자로 집어넣어 배분이 사정없이 꼬여버린 탓에, 10년 후 기준으로 보면 나이만 가지고는 위치 짐작이 힘들었다.

“저기 오네.”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있는 한여름의 옆구리를 툭 쳤다.

비단결같이 검은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머리에는 매화 모양 머리 장식을 꽂은 여성이 차분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면포로 만든 옷의 소맷자락에는 정교한 매화 무늬가 자수 되어있었다.

최소 20대 후반일 텐데, 과장 좀 보태서 한여름과 동갑이라 해도 믿을 듯했다. 조금 성숙한 한여름? 당연히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녀였다.

“왜 너랑 닮은 거 같냐?”

“...그치? 내 착각 아니지? 누군지 알아?”

한여름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얼핏 보면 자매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가물가물했는데, 확실하다. 10년 후에도 딱 저런 모습이었거든.

“매화검봉梅花劍鳳 청하. 최연소 매화검수다.”

“누구지.”

“그냥 우리 윗세대 중에 가장 잘나신 분 중 하나라 보면 돼.”

운청선태풍雲淸善太風의 화산 배자輩子에서 청자배라는 건, 곧 저 여성이 장문제자 배분이라는 뜻도 된다.

지금 화산 장문인은 운현진인雲賢眞人이었으니까.

중년이 대부분인 1대 제자 배분에 끼어있는 젊은 여성 제자.

저래서 화산은 나이만 보고는 알 수 없다는 얘기였다. 현대 무림에서도 배분은 중요한 문제거든.

게다가 검의 수실을 보니, 이미 이 시점에서 매화검수의 수좌인 화산칠검수華山七劍首에 오른 모양이었다.

“예쁘다... 나도 화산파 들어갈까? 소수마공처럼 무식한 무공 말고 우아한 매화검법 같은 거 익히고 싶어.”

“이미 늦었지. 그리고 거기 가면 나랑 못 만날걸?”

아무리 화산파가 세속적인 면이 강하다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도사들이라 연애 관계에선 꽤 까다롭다.

그래서 그런지, 저 청하라는 교수도 처녀였다.

...이젠 교수까지 처녀냐.

아무리 젊다지만.

“그럼 안 되겠네.”

“익힌 거나 잘 익힙시다.”

“뉘예뉘예.”

한여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들 모이셨네요. 제 소개부터 하자면.”

갑자기 그녀가 검을 뽑더니 가볍게 휘둘렀다.

곱게 흩날리는 꽃잎과 진한 매화 향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인가. 저 나이에 완성했다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온 천하연조차 감탄하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 수업을 맡은 화산, 청하라고 해요.”

노을처럼 은은하게 번지는 자줏빛 기운과.

하늘하늘 떨어지는 붉은 매화 사이로 그녀가 검을 거꾸로 쥐고 포권했다.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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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확실히 대단하군.”

심지어 오만한 중2검제조차 인정할 정도로, 방금 청하 교수가 보여준 신위는 엄청났다.

“저거 매화 하나하나가 검기 맞지?”

가라앉은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천하연에게 물었다.

“맞다. 최소 대문파의 장로급이구나. 차기 화산 장문인이 될 수도 있겠어.”

“그 정도야?”

내 물음에 천하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검에 검기를 덧씌우는 것과 저렇게 유형화한 검기를 사방에 흩뿌리는 건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하물며 그게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완성한 자라면....”

천하연이 팔짱을 끼고 갑자기 상념에 잠겼다. 아마도 승산을 가늠해 보는 듯했다.

...나이 차가 얼만데 ‘승산’을 논할 수 있다는 거부터 천하연도 괴물은 괴물이었다.

“배우고 싶다....”

한여름이 몽롱한 눈빛으로 청하 교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까까지 살생의 두려움에 몸을 떨었던 한여름은 이제 없다.

“예쁘긴 하네.”

한여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전 잡설을 좋아하지 않아요. 단도직입적으로 이 수업에 관해 설명하자면, 여러분은 각자 인공적으로 격리된 방에 들어가 몬스터와 싸우게 될 거예요.”

좌중을 한번 훑은 청하 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것들은 환상 같은 게 아닌, 엄연한 실제 몬스터입니다. 안전장치는 있지만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면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이동할게요. 따라오세요.”

그녀가 뽑았던 검을 납검하며 몸을 돌렸다. 우리는 청하 교수의 뒤를 따라 아카데미 안쪽으로 들어갔다.

높은 나무로 가려진 숲과 콘크리트 벽 사이를 지나 깊은 지하로.

“아카데미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 역시 이곳은 처음이었다.

이윽고 백 명도 넘게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대기 장소에 도착했다.

“모르겠네.”

“너도 모르는 게 있꾸나.”

“당연하지. 시기가 시기잖냐.”

천하연이 들을 수 있으니 한여름의 귀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다들 착석해주세요. 간단한 설명 이후 바로 한 명씩 들어가서 시작하겠습니다.”

등장 몬스터는 ‘고블린’이었다.

온갖 게이트에서 등장하는 가장 흔해 빠진 잡몹.

허나 잡몹이라 해도, 평범한 인간은 무기 없이 상대하기 힘들다.

몬스터들의 원초적인 살기에 내성이 없는 인간은 그대로 몸이 굳었다.

무인이 아니라면 냉병기로 덤비는 건 엄청난 위험을 수반했다.

고블린 정도야 화기를 쓰면 간단했지만.

이 위쪽부터는 아예 현대무기 자체가 통하지 않는 괴물들도 다수 존재했다.

그래서 무인들이 필요했다.

아무튼, 청하 교수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첫 시작은 중2검제였다.

“한 마리는 너무 적은데. 다른 거 없나? 고작 고블린 상대하는 데 내 검을 더럽히고 싶진 않다.”

김용이 청하 교수에게 툴툴거렸다.

“김용 생도, 반말. 경고 1회입니다.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주세요. 또한. 학사 커리큘럼이 있으니 오늘은 제 말에 따라주세요.”

“알겠다... 요.”

청하 교수에게 대놓고 지적당한 김용이 내부로 들어갔다.

“대기하는 분들은 다른 생도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잘 보세요.”

정면에 있는 거대한 디스플레이에 갇혀 있는 고블린 한 마리가 비쳤다.

구석에 있는 문이 열리고, 김용이 돌입했다.

곧바로 고블린이 투박한 몽둥이를 들며 김용을 경계했다.

번쩍-

김용의 검에서 뻗어 나온 검광이 고블린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확히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반으로 고블린이 갈라졌다.

단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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