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의 검에는 일절 망설임이 없었다. 피조차 묻지 않았다.
저번 비무에서는 내가 이기긴 했지만, 저것만 봐도 요행이었음이 실감 났다.
지루한 표정으로 김용이 내부로 들어왔다.
“잘했어요, 김용 생도.”
청하 교수가 칭찬하자 김용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재벌가 도련님이라기엔, 참 알기 쉬운 성격이다.
사실 저렇게 대놓고 드러내는 게, 뒤에서 암계나 꾸미는 음흉한 성격보단 낫다.
그러니까 유저들 사이에서 중2검제란 별명이 붙었어도, 인게임 NPC들 사이에선 대협 소리 들었겠지.
오히려 내게 진 경험 때문인지 이제 방심 같은 건 안 하려는 모양이었다.
...이거 천하연 뿐만 아니라 김용도 더 강해질 여지를 내가 줘버린 거 아닌가?
나를 힐긋 보며 고개를 홱 돌리는 걸 보니 이상한 경쟁심도 생긴 듯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김용이 강해지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나, 이제 내 차례야.”
한여름이 내 옷깃을 살짝 붙잡았다. 순번은 랜덤으로 지정되기에 나보다 오히려 한여름이 먼저였다.
“힘내라.”
한여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심박수가 조금씩 안정되는 걸 보니 효과가 있었다.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상대는 똑같은 고블린 1마리였다.
아무래도 첫 수업이다 보니 몬스터가 내뿜는 살기와 ‘살생’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듯했다.
실력만 놓고 보면 여기 모인 생도들 중에 고작 고블린 따위에 당할 자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다만 실전에선 미약한 망설임이 생사를 가르는 법이고, 대부분 그런 건 살생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차분하게 고블린을 바라보던 한여름이 입술을 달싹이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새하얀 냉기가 몸을 휘감더니 순식간에 손을 타고 그대로 발출됐다.
소수마공의 기운이 담긴 둥근 경파가 고블린의 몸에 적중한 순간.
사방으로 붉은 피와 번들거리는 살점이 비산했다. 고블린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육편 덩어리들만 가득했다. 지독한 냉기 탓에 일부는 얼어붙어 기괴함을 더했다.
정순한 무공임에도 ‘마공’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고블린이 저렇게 됐다는 건, 사람 역시 똑같다는 얘기였다.
“...뭔가, 생각했던 거랑은 조금 다르네.”
끝내고 나온 한여름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새하얀 김이 입가에서 배어 나왔다.
“어차피 쟤들이랑은 생존을 걸고 싸워야 하잖아. 괜히 어설프게 동정심 품을 필요 없어. 그냥 몹이라 생각해.”
“응, 알고는 있는데... 언젠가 사람 죽일 일도 생길까나.”
그런 쪽을 생각하고 있었냐.
“...아마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게이트 침식만 막으러 전전하면 좋겠지만, 게임 내에서도 같은 인간과 싸울 때가 꽤 많았다.
혈교 같은 거대 세력만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온 부산물만 해도 한두 푼이 아니었기에.
그걸 노리고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게이트 내부에서 노리는 상대를 처리한 다음에 닫아버리면 완전범죄 성립이니까.
인간의 선의만 기대하기엔.
이 세상은 악의로 넘쳤다.
문득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니, 천하연이 깔끔하게 지풍을 날려 고블린의 머리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버렸다.
위력 조절을 안 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새삼스레 감탄이 나오는 솜씨다.
천하연 다음은 바로 내 차례였다.
양심출타 특성 때문인지, 솔직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진짜 게임 몬스터 잡으러 가는 기분이다.
그렇다 하여 현실감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마음이 평온할 뿐이지.
들어가자마자 피부를 자극하는 농밀한 살의와.
질질 흘리는 침과 몸에서 나는 고블린의 악취가 지독하게 느껴졌다.
무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왜인지는 몰라도 내가 다가가자 고블린이 몽둥이를 들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가볍게 또 한 걸음.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고블린의 머리통을 기습적으로 붙잡고, 그대로 혈수마공의 기운을 때려 박았다.
“끼에에에엑-!”
밀폐된 방 안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글거리는 열기와 함께 고블린의 온몸에서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왔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붉은 피가 신발을 적시고 고기 익는 누린내와 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역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일부러 직접 손을 썼는데 내 심장은 평소와 똑같은 심박수를 유지했다.
‘이런 거였군.’
이제야 양심출타 특성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인간을 닮은 고블린의 내부를 박살 낸 감각 자체는 생생했다.
그로테스크하다는 생각은 당연히 들었다.
그게 내 정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뿐.
손을 털고 밖으로 나갔다.
“다녀왔다.”
“무덤덤하네. 내가 알던 김무공 맞아?”
굳은 얼굴로 한여름이 나를 쳐다봤다.
“적응해야지. 이런 세상인데 어쩌겠냐.”
그녀의 보드라운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살짝 미소지었다.
“그건 그래.”
그제야 표정을 풀며 내 쪽으로 머리를 살짝 기댔다.
“음음, 수업 중에 과도한 애정 행각은 금지에요.”
맑은 음성이 내 뒤쪽에서 울렸다.
청하 교수가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왔다.
암향부동暗香浮動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부동은 부동不動이 아니라 떠다닌다는 뜻의 부동浮動이었다.
일반적으로 암향은 매화를 뜻했다.
그리고 매화 향기가 떠다니는 것처럼 은밀하고 표홀한 보법이 화산에 있었다.
암향표暗香飄.
화산을 대표하는 보법 중 하나였다.
이십사수매화검법에 암향표.
자줏빛이 감도는 기운을 쓰는 거로 보아 익힌 심법은 자하신공紫霞神功.
이 정도면 그야말로 화산의 상승 절기를 한 몸에 담아낸 수준이다.
괜히 천하연이 차기 장문인감이라 한 게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얘가 처음이라 좀 긴장했거든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첫 실전이면 그럴 수 있죠. 조금만 주의해 주세요. 다른 생도들 보는 눈이 있으니까요.”
청하 교수가 염기艶氣를 내포한 미소를 살포시 머금었다. 그리곤 사뿐사뿐 발소리도 없이 멀어졌다.
이렇게 보니, 진짜 성숙한 한여름 같아서 더 눈을 떼기 힘들다.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한여름이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쳤다.
“신기하잖아. 잃어버린 자매래도 믿을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아까 교수님이 나 빤히 바라보시더라.”
“혹시 잃어버린 자매 있냐고 가서 물어봐.”
“개소리 노.”
한여름이 피식 웃었다. 이제야 평소대로 돌아온 것 같다.
이 세계 사람이라고 다 익숙한 건 아닌지, 심하게 덜덜 떠는 생도도 몇 보였다.
물론 대부분은 김용이나 천하연처럼 능숙하게 처리했다.
확실히 익힌 무공들이 가지각색이다 보니 나름 배울 점도 있었고, 그런 걸 떠나 그냥 보는 맛이 좋았다.
덕분에 오전 수업은 빠르게 지나갔다.
중간에 적발거유 소녀가 시간을 좀 오래 끌긴 했지만.
그래 봐야 몇십 초 차이였다.
막상 소심하게 주먹을 뻗는 순간, 풍압만으로 고블린이 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혀버렸다.
쥐포처럼 납작하게 찌그러진 고블린을 보고 난 확신했다.
쟤 철혈여제 맞구나.
***
현대 무림에는 여러 집단이 존재한다.
정파 쪽만 놓고 보면, 모든 걸 총괄하는 무림맹.
중국 출신 문파가 중심이 된 신주사가神州四家.
신주사가는 다시 유불선속儒佛仙俗으로 나뉘어 각자 파벌을 형성했다.
신주사가에 대항하여 한국 무림 위주로 탄생한 천외천天外天.
무림맹 산하에서는 신주사가와 천외천, 이 두 세력이 가장 거대했다.
물론 신주사가라 해서 한국 무림 출신이 없는 건 아니고, 천외천이라 해서 중국 무인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주축이 되는 쪽에 따라 성향이 갈렸을 뿐.
각 문파는 어차피 소속보다는 자신들의 이득을 최우선시했다.
이런 구도는 아카데미 내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면, 역시 학생회였다.
시선을 강탈하는 연분홍빛 머리칼의 미녀가 영상을 둘러보며 입술을 뗐다.
“올해 신입생들은 괴물이 많네요.”
부학생회장 베아트리체.
졸업 즉시 천외천 세력이 주축이 된 무림맹 최강의 무력집단 중 하나.
흠검단欽劍團의 차기 부단주로 내정된 여성이었다.
“협의는 잊지 않았겠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무복을 걸친 남성이 책상에 앉은 채.
굳은 표정으로 두 손을 깍지껴서 얼굴 앞에 모았다.
학생회장 모용성.
이쪽은 신주사가 세력이 주축이 된 신검단神劍團의 차기 부단주로 내정된 자였다.
당연히 서로 경쟁 관계였다.
이번에는 검을 쓴다는 공통점까지 있어 더 불꽃이 튀었다.
일반적인 학생회와 다르게 중원무공아카데미는 내부에서 신경전이 꽤 치열했다.
당장 ‘학생회장과 부회장은 같은 소속이 아니어야 한다.’ 이런 걸 합의할 정도였으니까.
“물론이지요. 그런데 회장님?”
베아트리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모용성을 쳐다봤다.
“뭐지?”
“그 자세 좀 안 하면 안 돼요? 꼭 뭔가에 타라고 명령할 것 같아서요. 아니면 그 안경이라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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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
모용성이 깍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말했다.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대도 안 했답니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거 봤나?”
그가 태블릿 하나를 건넸다.
“굳이 확인시켜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이죠. 김용 생도가 패배한 게 신주사가에서도 꽤 이슈였나 봐요?”
베아트리체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실습수업은 보통 영상으로 기록된다.
그래야 불상사가 발생했을 때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으니까.
기본적으로는 비밀이었지만, 학생회는 그 특성상 모든 영상에 접근 권한이 있다.
모용성이 건넨 태블릿에는 김용이 김무공에게 패배하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구성 그룹은 천외천을 이루는 가장 큰 축이었고, 당연히 천외천 소속인 베아트리체로서는 김용의 패배가 그리 달갑진 않았다.
“딱히 비꼬려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였나? 이 김무공이란 생도, 사문이 없더군.”
“하긴, 우리 회장님은 너무 고고해서 문제긴 하죠. 근데 그쪽 아녔어요?”
“우리 쪽 아니다. 오히려 천외천의 루키인가 했는데 아닌가 보군.”
베아트리체가 학생회장 책상에 몸을 기대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어디서 나타난 자일까요? 저희 쪽에서도 파악이 안 되더라고요.”
“우리도 그렇다. 혹시... 마교 쪽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