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31)

모용성이 깍지를 풀고 한 손으로 턱을 괬다. 무림의 특성상 문파를 숨기는 일은 흔했다.

사파나 마교 계열 출신도 종종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분쟁을 막기 위해 위장 문파를 내세우거나 아예 소속이 없는 척하는 사례도 많았다.

“글쎄요, 김용을 패배시키려면 마교에서도 소천마는 와야 할 텐데요.”

“총장님도 주목하시는 걸 보니 알아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파악은 하되 개별적으로 접근은 금지. 이 합의사항만 지키면 전 상관없어요.”

서로 경쟁 관계라 하나, 결국 따지고 보면 같은 무림맹 소속이자 정파 식구였다.

사파나 마교 문제에서는 당연히 공동대응하게 된다.

“자네나 조심하도록. 합의 어기고 가로챈 사례는 너희 천외천이 더 많았다.”

“고작 열 번도 안 되는 차이 가지고 그러시면 안 되죠? 회장님.”

“됐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지. 그보다.”

모용성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잠시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던 그가 입술을 뗐다.

“수도권 연쇄 실종 사건, 봤나?”

“요새 난리잖아요.”

“무림맹에서 협조 공문이 왔더군. 이쪽과 멀지 않은 지역에서도 실종자가 나왔다.”

중원무공아카데미는 무적전신을 비롯한 교수진이 지키고 있는 만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편이다. 근처까지도 괜찮다.

면적만 따지면 작은 도시 수준의 아카데미 인근은 학생회 소속 치안유지기관, 묵수대墨守隊도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았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다. 중원무공아카데미 ‘인근’은 안전했지만, 생도들은 범위 밖으로 외출하는 경우가 잦았다. 당연히 나간 생도까지 일일이 안전을 보장하는 건 힘들었다.

“여기 생도들은 다 무인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어제 실종자 중에 개방 출신이 있었다. 삼결, 분타주 급이니 최소 일류 무인이다. 현장에 남은 전투 흔적과 혈흔 분석 결과를 보아하니 일방적으로 당했다더군.”

“뉴스에는 안 나왔던데요?”

베아트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일류 무인이면 거대 문파에서도 핵심 전력 취급받는 수준이다.

하물며 개방 출신이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만한 인재가 아니다.

“비공개로 했지. 일류 무인이 실종됐다는 걸 알려 봐야 일반인들의 혼란만 가중될 뿐이니까.”

“매번 학생회실 출석체크 하던 우리 총무님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 개방이 뒤집혔다.”

한숨을 푹 내쉬며 베아트리체가 학생회실 소파로 가 앉았다.

“이거 보통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외출 금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녜요?”

“...고민 중이다. 일단 총장님과 면담은 잡아 놨다만. 아마 당분간은 외출 자제 권고 정도로 나가지 않을까 싶다.”

모용성은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머리를 쓸어올렸다.

안전이냐, 자유냐.

언제나 참 어려운 문제였다.

오늘따라 아카데미 학생들의 대표라는 것이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모용성이었다.

***

“끄으윽.”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쾅!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중량 원판이 주렁주렁 달린 바벨이 땅에 떨어졌다.

“김무공, 허어접~”

근처에 있던 한여름이 입가를 살짝 가리며 놀려댔다. 살짝 보이는 분홍빛 혀와 앙증맞게 튀어나온 송곳니 하나가 상당히 얄밉다.

“시꺼.”

그녀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물론 쌍으로.

한여름이 바로 못 본 척 뒤돌아서서 제 수련 자리로 가버렸다. 아니꼬움이 배가 됐다.

지금은 ‘체력 단련’ 수업이었다.

수업 내용은 간단했다.

순수한 육체 능력을 기르기 위한 훈련.

당연히 내공을 사용하는 순간 바로 제재가 들어왔다.

내공은 사용할 수 없다.

운동 기구 상대로는 당연히 유니콘 신공도 발동하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난 지금 근력과 내구, 민첩이 전부 F인 아카데미 최약체에 불과하다는 거다.

물론 F라 해도 어디까지나 무인 기준이지, 일반인들보단 훨씬 강했지만.

그러면 뭐하나, 최하위인 건 변하지 않는데.

그나마 유산소는 악으로 깡으로 버텨냈지만, 이런 근력 운동에선 바로 티가 나버렸다.

수치는 정확하니까.

다들 조소와 신기함이 반쯤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예 그런 수준을 넘어 심각한 충격까지 받은 남자도 있었다.

김용은 내 신체 능력이 최약체라는 것에,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부담스러운데.’

남자 놈의 저런 시선을 받아 봐야 좋을 것도 없다.

“이 정도면 견습 무인보다 약간 나은 수준인가. 그대는 참으로 신기한 사내로구나. 너무 내공 위주로만 수련하는 건 그리 좋지 않아. 언제나 균형이 중요한 것이다.”

“나도 당연히 알고는 있지.”

천하연이 내가 들었던 바벨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충 이 가벼운 걸 왜 제대로 못 들고 끙끙거리고 있지?

이런 의미로 보였다.

억울하다.

근력이 떨어지는 건 수련을 안 해서가 아니다.

내가 남다른 내공을 자랑하는 것처럼, 상태창이 강제로 이렇게 보정시킨 거다.

당장 한여름만 봐도 내 몇 배는 되는 중량을 거뜬히 들었다.

...근데 쟤는 왜 저리 힘이 센 거야?

분명 근력 20이라 했는데, 한 단계 차이가 이렇게 컸나 싶다.

천하연도 그렇고 가녀린 팔뚝으로 저러는 걸 보니, 현실감이 지독히도 떨어졌다.

실전압축근육도 아니고 원.

꽝!

귀를 때리는 굉음이 상념에 잠겨 있던 나를 깨웠다.

고작 바벨 내려놓는 소리일 텐데, 무슨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진동했다.

“죄, 죄송해요...!”

적발거유의 여성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그녀의 발치에는 수십 개가 넘는 중량 원판이 달린 거대한 바벨이 있었다.

...역시 쟨 철혈여제 이지아가 맞다.

저런 괴력이 있으니 악인들 머리통을 수박 깨듯이 박살 내고 다녔겠지.

“후우....”

심호흡하며 다시 바벨 앞에 섰다.

어차피 이런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리도 없었다.

그저 꾸준히 단련하는 수밖에.

***

“....”

죽겠다.

한계까지 몸을 밀어붙였더니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근력 자체는 낮지만 태양지체 때문에 회복력은 꽤 좋은지, 조금만 휴식해도 금방 회복이 됐다. 예전부터 양기란 체력의 상징이었거든.

덕분에 비웃음 실린 시선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놀라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무리 근력이 약하다 하나 그걸 무식하게 반복하면 조금은 달라 보이는 법이니까.

오히려 내가 엄살피우는 거 아닌가 의심하는 목소리까지 들었다.

난 진짜 죽을 둥 살 둥 세트를 반복한 건데 말이다.

“김무공, 허어접.”

물론 내 근처로 슬쩍 다가와서 또 놀리는 한여름 같은 인간도 있었다.

“이게 확.”

“확 뭐?”

고개를 살짝 꺾은 한여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주말에 두고 보자.”

“어쩔 건데?”

“두고 보면 알아.”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무서운 사람 없댔어.”

“어, 그래?”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한 발짝. 한여름이 뒤로 물러났다.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다시 한번 내가 다가가자 한여름이 뒤로 물러나며 거리 유지를 했다.

“왜 뒤로 가냐?”

“...너무 가까이 오지 마.”

그녀가 입술을 샐쭉거리며 슬쩍 자신의 몸 아래를 힐긋거렸다.

그런 거였군. 깨달았다.

“싫은데?”

“오면 이거 던질 거야.”

한여름이 옆에 있던 80kg짜리 덤벨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얌마, 나 그거 맞으면 죽어.”

“몰라.”

“땀 냄새 안 나는데.”

같이 단련한 건 마찬가지였던지라, 한여름의 이마에는 땀이 한두 방울 맺혀 있었다.

사실 그런 거 감안해도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땀이 안 났지만.

본인은 그것조차 엄청나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한여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그거 때문 아니거든! 나 씻으러 갈 거야.”

그리곤 홱 뒤돌아서서 빠르게 샤워실로 도망쳐버렸다.

귀엽다.

역시 놀리는 보람이 있고만.

그나저나.

오늘 단련으로 확실해진 게 있었다.

고작 하루 단련했는데 상태창의 근력 수치가 10에서 10.1로 증가했다.

여전히 등급은 F였지만.

내공을 생각하면 등급은 10단위로 변하는 듯했다.

‘따로 단련해야겠는데.’

벌써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있었다.

빙의 전에 운동 조지게 하고 나면 팔도 안 올라갔는데.

지금도 직후에 팔이 안 올라가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게 10분이면 회복된다는 점이 달랐다.

“천하연, 부탁 좀 해도 되겠냐?”

옆에서 고고한 자세로 수련을 하던 천하연에게 물었다.

“그대는 나의 은인이니, 무리한 부탁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단련 좀 도와주라. 한여름도 같이.”

어지간한 교수보다 나은 일타강사가 옆에 있는데 굳이 독학할 필요는 없겠지.

천마란 신교 모든 사람들의 대스승이란 뜻도 되거든.

아직은 소천마였으나, 그 기질이 어디 갔을 것 같진 않았다.

“확실히, 그대는 고련이 필요해 보이긴 하더구나. 그 정도야 어렵지 않다.”

“고마워.”

근력이 오른다는 걸 확인한 이상, 빡센 수련은 필수가 됐다.

천마신공의 비처녀와 남성에 대한 보정도 기존 수치가 높을수록 빛을 발하니까.

***

[플레이어 ‘김무공’ 동기화 완료.]

[랭킹 1위 특전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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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시야에 뽀얀 살결이 비쳤다.

봉긋 솟은 새하얀 봉우리와 살짝 드러난 분홍빛의.

‘아.’

처음도 아닌데,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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