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게 익숙해질 날이 온다면, 내가 고자가 될 때가 아닐까 싶다.
아랫도리 근처의 부드러운 감촉과 적당한 무게감에 평정심이 깨질 뻔했다.
이불 사이로 매끈한 다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포근한 쿠션처럼 천하연의 몸 일부가 나를 짓눌렀다.
다행히 중요 부위에 닿진 않았다.
달콤한 향기에 잠에서 깨기 힘들다.
꿈속을 부유하는 듯한 몽롱한 기분이다.
분명 같은 샴푸와 바디워시를 쓸 텐데, 천하연의 살 냄새가 섞이니 아예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일어난 걸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몰라도, 천하연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렸다.
찰랑거리는 금발 사이로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겉보기엔 마치 연인처럼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천하연이 내 이마에 손등을 살짝 가져다 대면서,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일어났나?”
“일어났는데... 우리 너무 붙은 거 아닐까.”
조심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까딱 실수했다간 그대로 닿는다.
그녀의 잠옷이 몸을 가리는 면적이 어째 예전보다 더 줄어든 느낌이다.
아니, 확실했다.
지금은 살결이 드러난 부분이 더 많다.
당연히 자극도 훨씬 심하다.
“미안하구나. 살이 닿아야 공명이 강하게 와서 말이다. 마음 같아선....”
무언가를 말하려던 천하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음?”
“아니다. 실언이었구나.”
...뭘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지만.
잠이 덜 깨서 어질어질했다.
이대로 가다간 또 자고 싶어질 것 같아, 억지로 마른세수를 하며 기지개를 켰다.
밖은 아직 어둑어둑한 게 새벽이었다.
비록 모양새는 이상했지만, 천하연의 심정이 어느 정도는 이해됐다.
무인이라면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목숨이라도 거는 족속들이다.
하물며 고금제일의 무공을 복구할 기회가 생겼다?
만일 천하연이 악인이었다면 난 진작 납치감금 당한 뒤 실험실의 쥐가 됐겠지.
마교의 소교주란 충분히 그럴 힘이 있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마, 그냥 해본 말이니.”
평소에 손이라도 잡고 다닐 수 없는 이상, 어차피 이런 방법밖에 없었다.
남장한 천하연과 사이좋게 손잡고 다닌다?
끔찍한 소문이 퍼지겠지.
그런 건 절대 사절이었다.
“고맙구나. 먼저 씻고 오겠다.”
천하연이 태연하게 욕실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다 보니, 문득 시야에 느낌표 하나가 보였다.
어제까지는 분명 없었다.
마음속으로 상태창을 외쳤다.
굳이 입 밖으로 ‘상태창’을 내뱉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을 땐 다소 허무한 심정마저 들었다.
상태창을 열자 주르륵 알림이 떠올랐다.
[플레이어 ‘김무공’ 동기화 완료.]
[랭킹 1위 특전 부여.]
[파일 기능이 해금됩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상태창에 조그맣게 파일이라 적힌 부분이 생겨났다.
특전을 부여했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게 심지어 ‘파일 기능’이라니.
내가 혈리악의 행보를 알 수 있었던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다.
몰라도 되는 배경 내용들.
게임 공략이나 팁을 위해서라기보단, 설정 덕후들을 위한 부가 요소에 가까웠다.
‘응?’
새로 해금됐으니 비어있어야 정상인 파일에 new가 떠 있었다.
무심코 파일을 터치했다.
딱 하나의 파일에 담긴 내용은 나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부검 감정서
이 변사자의 사인을 설명함에 있어.
1. 변사자는 ■■■■. ■. ■■. 23:30경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인근에서 신고를 받고 수색 중이던 무림맹 신검단 철검대에 의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점.
2. 두개골과 얼굴 뼈의 복합 골절, 얼굴에서 넓은 범위의 표피박탈....
.
.
(중략)
.
.
7. 혈액의 비정상적인 감소가 확인됨.
등을 종합할 때, 변사자의 사인은 외력에 의한 두부 손상사로 추정됨.』
부검 감정서라니.
흔히 볼 수 있는 파일은 아니다.
생략된 부분도 많고, 가장 중요한 ‘일시’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파일은 이런 식이었다.
플레이어에게 100% 모든 정보를 주지는 않는다.
여러 개의 파일을 모아서 한 가지 사실을 도출해내는 것.
그게 이 기능의 핵심이었다.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스마트폰을 켜서 기사를 검색해 봤지만, 해당 지역에 사망 사건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림맹에서 숨겼든가, 아니면 저게 앞으로 발생할 일이라는 뜻이었다.
두부 손상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머리 맞아서 죽는 경우야 흔했으니까.
다만, 혈액의 비정상적인 감소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혀왔다.
‘혈액’에 집착하는 집단은 높은 확률로 그곳이다.
혈교.
갈현동이면 아카데미에서도 코앞이다.
만일 혈교가 이 근처까지 스며들었다면....
상념에 잠겨있으니 진한 샴푸향이 코를 찔렀다.
“그대,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어느새 씻고 나온 천하연이 심유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 천하연에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천하연이 나온 욕실로 들어갔다.
기분 좋은 향기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쏴아아-
찬물을 머리에 끼얹으며 다시 생각했다.
천마신교가 고고한 군림자라면, 혈교는 ‘순수악’ 성향의 마인에 가까웠다.
편견과 다르게 천마신교의 마공은 상당히 안정적인 축에 속한다.
다만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지.
혈교는 아니다.
익히다가 폭주하는 경우는 셀 수도 없고, 사악한 대법이나 수단을 통해 경지를 끌어올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혈교 마공 부작용의 대표적인 증상이 ‘피를 탐하는 것’이었다.
괜히 혈교라 불리는 게 아니다.
단순히 미친 것에 그치면 상관없지만, 그것들은 이성을 대가로 더 강한 힘을 얻게 된다.
물론 한계는 명확했지만, 테러리스트처럼 쓰기엔 그보다 좋은 게 없었다.
그리하여 혈교는 혈살마공血殺魔功이나 적혈마공赤血魔功을 익히다 돌아버린 자들을 의도적으로 양성하여 활용했다.
이들을 게임 내에선 혈살귀血殺鬼나 적혈귀赤血鬼라 불렀다.
문제는, 그것들은 분명 혈교 대란 이후 나타난 상대였다.
지금은 10년 전이다.
‘벌써 암약하고 있다?’
아니면 아예 다른 종류일 수도 있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일단은 보류한다.
어차피 안다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한정적이었지만.
빠르게 씻고 나왔다.
천하연은 어느새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장에 편안해 보이는 무복까지.
평소와 달리 새벽에 일찍 일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부터 새벽 수련하기로 했거든.
“그대는 정말 대단하구나.”
무복으로 갈아입던 나를 보며 불현듯 천하연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전에 그대가 말했던 혁리세가. 혈교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심 가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더구나.”
“아마 대놓고 드러난 증거는 찾기 힘들 거야.”
그러니까 먼저 나서기 전까지 제대로 파악을 못 했겠지.
혁리악 그 새끼가 미친 듯이 깽판 치니까 그제야 무림은 부랴부랴 혈교에 대응하기 시작했거든.
“확실히 증거는 찾기 힘들더군. 어차피 혈교든 아니든, 더러운 사업 쪽에 많이 걸쳐 있더구나. 천천히 정리하는 것도 괜찮겠지.”
“더러운 사업?”
“인신매매, 장기매매, 마약, 청부살인, 아동 성매매 등. 일일이 따지기도 힘들더구나.”
천하연이 혐오스럽다는 말투로 내뱉었다.
역시, 천마신교의 정보력도 보통은 아니었다.
혁리세가 산하의 기업들은 드러난 것만 보면 ‘모범적인 사회적 기업’ 그 자체였거든.
이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밝혀낼 줄은 몰랐다.
듣고 보니 내 예상보다 훨씬 쓰레기였던 모양이다.
“조심히 해야 할 거야. 진짜 혈교면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바로 숨어버릴 수도 있어.”
“걱정 말거라. 우리는 천마신교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며.
당당하게 천하연이 말했다.
하긴, 천마신교는 다른 말로 하면 ‘단일 세력 최강’이었다.
천마신교가 혈교를 쓰러트리는 데 플레이어의 힘까지 빌린 건 워낙 암중에서 깽판을 치고 다녀서였지.
만일 한군데 서로 모아놓고 회전이라도 벌였으면 혈교는 천마신교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대는 원하는 게 있나?”
“어... 갑자기?”
“좋은 정보를 받았으니, 보답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나. 작금의 신교에는 적이 필요하다. 혁리세가가 혈교든 아니든, 딱 좋은 상대구나.”
“그쪽도 내부 문제가 좀 있나 봐?”
천하연이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 까진 아니다만. 마냥 방치할 일도 아니구나.”
“부탁이라, 한 가지 있긴 한데.”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게 있긴 했다.
“뭐지?”
“돈 좀 있냐?”
“돈...?”
고개를 갸웃하면서 천하연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 돈.”
“얼마 정도면... 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