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천하의 천하연조차 다짜고짜 삥뜯는 것에는 당황한 모양이다.
잠시 망설이던 천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신교에 말해보지.”
“빌리는 거야. 두 배로 갚을게.”
“갚을 필요는 없지만. 그대가 갚는 게 편하다면.”
“괜찮아, 대박 낼 거니까. 내가 좋은 걸 알고 있거든.”
“...그래.”
천하연이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멘트만 들으면 확실히 전형적인 사기꾼이나 도박꾼답긴 했다.
나는 담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갚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거든.
게임 내에서 밝혀진, 단기간에 떡상한 길드나 기업 주식만 사놔도 2배?
일도 아니다.
전부는 기억 못 해도, 몇 곳은 분명했다.
“계좌는 폰으로 보내놓을게. 수련이나 하러 갑시다.”
***
아직은 선선한 새벽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아카데미 내부에는 무인들을 위한 24시간 공개 수련 장소도 곳곳에 있었다.
아롱거리는 가로등 아래를 지나 넓은 비무대 같은 곳에 도착했다.
길쭉길쭉한 몸매의 여성이 땅바닥을 빤히 쳐다보다 우리가 오는 걸 보며 고개를 홱 들었다.
“늦었어...!”
툴툴거리면서 한여름이 발끝으로 땅을 찍어댔다.
“미안, 쟤랑 만나서 얘기하느라.”
수련 준비를 하는 천하연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얘기?”
“비밀 얘기?”
“이씨....”
한여름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굳이 숨길 일도 아니니, 장난은 그만하고 순순히 불었다.
“비밀 얘기는 맞아. 혈교 관련이거든.”
“어? 벌써 혈교?”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좋은 친구 뒀다 어디 쓰게.”
“...대체 둘이 어떻게 친해진 거야. 혈교에 수련까지 도와줄 정도면.”
“알면 다친다.”
너 말고 내가.
룸메이트라 한 침대에서 같이 잤더니 친해졌다.
이렇게 말하면 누가 봐도 오해할만한 얘기잖아.
절대 말 못 하지.
함부로 말했다간 천하연이 어떻게 나올지도 미지수였다.
“둘 다. 이거 받거라.”
천하연이 어디선가 권갑 두 개를 꺼내 우리에게 건넸다.
“뭔데?”
“신교에서 제작한 수련용 권갑이다. 대련 시 서로를 보호하는 데 좋지.”
“고맙긴 한데, 다짜고짜 이런 권갑이 필요해?”
문득 드는 의문을 물었다.
천하연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뗐다.
“당연히.”
“대체 뭘 시키려고?”
“일단, 둘이 대련하지 않겠나? 내공 없이.”
...갑작스러운 말에 뇌정지가 온 나와 반대로, 한여름은 곧바로 권갑을 끼고 나와 거리를 벌렸다.
팡! 팡!
한여름은 권갑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주먹을 부딪쳤다. 공기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너 좀 신나 보인다?”
깊은숨을 푹 내쉬며 한여름과 거리를 벌렸다.
“두고 보자며. 주말까지 안 가도 되겠네?”
권갑으로 입가를 가리며 한여름이 배시시 웃었다.
저 초승달처럼 휜 눈가를 보고 있으니.
...묘하게 열 받는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저거.
“후회하지 마라.”
“응, 안 함.”
한여름이 권갑을 까딱거렸다.
“지금껏 한 번도 못 이겼으면서 뭔 자신감이야.”
“게임이랑 현실은 다르다 이 말이야.”
“그 말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시끄럽고, 드루와. 드루와.”
...하여간. 말본새 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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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켜뜬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단정하게 묶은 검은 머리칼이 가로등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그것이 새하얀 피부와 묘하게 대비되어 사뭇 아름다운 느낌이었다.
모르고 봤으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미소녀였겠지만, 다행히 난 지겹게 봐온 탓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다.
내공을 쓸 수 없어도 천마신공의 보정을 받으면 스탯은 이쪽이 더 낫다.
조금은 빨라진 한여름의 심장 박동과 숨소리가 귀를 때렸다.
“긴장했냐?”
“아, 안 했거든.”
한여름이 새침하게 눈을 흘겨댔다.
참 알기 쉬운 성격이다.
양심출타 특성은 내가 아니라 쟤한테 가는 게 맞지 않았을까.
한여름은 내가 오는 걸 맞받아치려는 듯, 여전히 소수마공의 기수식만 취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천하연이 비무를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의도가 있을 터.
옆을 힐긋 보니 천하연은 이쪽을 지그시 응시 중이었다.
서로 무혼을 공유하는 탓에 빈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 정도의 경지에서 빈틈이 없을 리는 없으니, 특성 자체가 상쇄되는 모양이다.
어차피 그게 더 낫다.
언제까지 정체불명의 무혼에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타닥-
기다란 날숨을 내뱉으며 곧바로 땅을 박찼다.
비록 내공을 쓸 수 없었지만, 이미 내 몸은 일반인보다는 압도적으로 강했다.
몸이 가벼웠다.
고작 능력치가 10가량씩 오른 게 이 정도 효과였을 줄이야.
내공을 쓰지 않으니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진각을 밟으며 주먹을 뻗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내 주먹을 응시하던 한여름의 주먹이 곧장 뻗어졌다.
꽝!
주먹과 주먹이 맞닿았다.
이상하다.
분명 스탯은 내 쪽이 앞서야 정상일 터.
그러나, 수를 교환할수록 밀려나는 건 내 쪽이다.
특히 한여름의 가벼운 손짓에 담긴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내공을 쓰는가 해서 기감으로 감지해봤으나, 지금 한여름은 순수한 육체 능력으로 받아치는 게 확실했다.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몸에서 대체 어떻게 저런 거력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려진 시계 속에서 사고를 가속하여 판단했다.
‘진다.’
이대로 가다간 필패였다.
한여름에게 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탁-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너 무슨 짓 했냐?”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한여름이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저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특성, 숨겼냐?”
“아, 아니?”
야, 당황하면 빼박이잖아.
“대체 뭔 특성이길래 숨기고 그러냐.”
“시끄럿...!”
홍시처럼 빨개진 얼굴로 한여름이 돌진해왔다.
덕분에 동작이 커져서 읽기가 쉬워졌다.
냉정하게 판단했다.
전에 서로의 스탯을 공유하며 비교해본 결과 내공은 내 쪽이 우위, 근력은 한여름이 우위였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러난 ‘상태창’이고.
인간은 저렇게 단순히 재단되지 않는다.
방금 수를 나누면서 느꼈다.
같은 EX급이지만, 천산신녀공보다는 유니콘 신공이 우위다.
특히 가장 차이 나는 부분은 보법.
힘으로 밀어붙인 거지, 천마군림보 특유의 움직임을 한여름은 종종 놓쳤다.
내가 물러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한여름의 동작이 커진 만큼 공격의 위력은 더 강해졌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보법을 밟으며 한여름의 권갑 손등 부분을 후려쳤다.
“아얏!”
한여름이 비명을 지르며 가드를 살짝 내렸다.
무혼이 알려주지 않아도 한여름의 움직임과 빈틈이 훤히 읽혔다.
품으로 한 발짝 파고들었다.
이대로 복부에 정확히 주먹을 꽂으면 내 승리....
“씹...!”
입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한여름의 반격을 겨우 피했다.
복부에 주먹을 꽂으면 된다.
근데 저 가녀린 복부에 주먹을 꽂는 건 좀.
역시 좀 그랬다.
혹시라도 다치면 큰일이잖아.
이건 보여주기 위한 비무지 쓰러트리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다급하게 천하연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거기까지.”
다행히 내 시선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는지, 곧장 천하연이 난입하며 제지했다.
“우씨, 내가 이길 수 있었는데.”
한여름이 씩씩거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그래, 니가 이겼다.”
한숨을 푹 내쉬며 한여름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다.
“응?”
한여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봤다.
“니가 이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