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31)

“아니, 뭔데.”

“내가 졌다고.”

“그래? 물리기 없다? 진짜지?”

“오냐.”

“야쓰...!”

혼자 양손을 꽉 쥐는 걸 보니, 어지간히 좋나 보다.

대충 199패 하다 마지막에 1승 한 기분이라도 느끼는가 싶다.

진실을 아는 내 입장에선 그저 웃을 뿐이지만.

이대로 넘어가나 싶었는데.

“아니, 한여름 그대가 졌다.”

심판의 판정은 냉혹했다.

“어...?”

“마지막 공격을 김무공이 거두지 않았다면, 그대는 이미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겠구나. 내가 보기엔 한여름 그대의 명백한 패배다.”

“마, 말도 안 돼. 야, 거짓말이지?”

한여름이 애절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마지막에 공격을 그만둔 건 맞긴 한데, 한방에 누웠을지는 모르겠네.”

“...또, 또 졌어.”

한여름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얘한테 꼬리가 있다면 열심히 흔들다가 바로 축 내려가지 않았을까.

나름 배려해서 무승부의 가능성도 말해줬는데, 한여름의 뇌리엔 이미 ‘패배’라는 단어가 강하게 박힌 모양이다.

“그래서, 소감은?”

풀이 죽은 한여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천하연에게 물었다.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있구나.”

“뭔데?”

“내공을 사용한 공격도 좀 봐야겠다.”

“내가 할게.”

반쯤 넋이 나간 한여름과 거리를 벌렸다.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다가도 막상 무공 시연한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눈을 빛내는 게, 한여름 쟤도 참... 천생 싸움꾼이다.

“위력은?”

천하연을 상대로는 능력치 보정이 없다.

능력치 상승 지속 시간은 준비하는 동안 이미 끝났다.

그래도 A급의 내공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A급과 S급은 한 단계였지만 실제 체감은 어마어마했던지라 조금 아쉬웠지만.

“그대는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일격. 전력으로 오너라.”

천하연이 오연한 자세로 뒷짐을 지며 말했다.

“...그래.”

머리를 끄덕이며 천마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막대한 기운이 전신 혈도를 질주했다.

일격에 모든 걸 담는다.

상대는 차기 천하제일인에 가장 근접한 여성이었다.

천마신공의 기운이 혈수마공의 구결에 따라 변환되어 오른손에 응축되기 시작했다.

핏빛의 진기가 손목 아래로 아른거렸다.

쿵!

곧바로 대지를 박차고 전진했다.

내공이 실린 발걸음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틈은 노리지 않는다.

정면.

김용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적 있었던 초식.

혈수마공 혈염파천을 천하연의 일 보 앞에서 내질렀다.

직전까지 가만히 있던 천하연의 손이 기이한 움직임을 그렸다.

꽈아아앙-!

서로의 손에 실린 막대한 경력이 충돌했다.

주변의 바닥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흙먼지와 돌 부스러기가 비산했다.

붉은 기운과 검은 기운이 서로 어우러지다 하늘 높이 날아가며 해소됐다.

‘...미친.’

방금 일어난 일을 깨닫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무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며 천하연의 대응을 분석했다.

그건 이화접목移花接木의 묘리에 가까웠다.

내 혈수마공을 그대로 맞받아치는 데 그치지 않고, 경력을 해소하고자 힘의 방향을 틀어 공중으로 빗겨낸 것이었다.

“...지독한 공격이구나. 천마지존수天魔至尊手를 일부나마 뚫고 들어올 줄이야.”

천하연이 가볍게 손을 털며 말했다.

“네가 더 괴물 같은데. 그 짧은 사이에.”

“나는 신교의 소천마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

“끝났어?”

우리가 맞붙는 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던 한여름이 쪼르르 다가왔다.

“그래. 대충은 알겠구나. 저기로 가지.”

천하연이 수련 장소 근처에 있는 정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동양풍이 섞여 있는 아카데미라 그런지, 이런 장소가 곳곳에 존재했다.

은은한 달빛이 내리쬐는 장소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으니, 이게 또 나름의 운치가 있다.

“그대들의 사문 방침이 어떤지 나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구나.”

“독학이라 그래.”

내 대답에 천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믿기 힘든 얘기구나. 그건 차차 논하기로 하고. 그대들에게 지금 가장 시급한 건 ‘기본’이다.”

“기본? 어떤 면에서?”

“무공이란 무엇인가. 무인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 답을 내기 위해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무인들이 목숨 걸고 싸워왔다.”

“정답이 있는 문제야?”

“정답에 가까운 것은 있구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내린 결론. 무인이라면 정기신精氣神의 합일合一을 추구해야 한다.”

머릿속에 강제로 여러 정보가 주입된 탓에, 이론상으론 당연히 나도 알고 있었다.

정은 신체, 기는 진기, 신은 정신.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다.

다만 게임이 현실에 됐을 때, ‘어떤 식’인지 모호했던 거였지.

“우리 문제가 그쪽이다?”

천하연이 괜히 얘기를 꺼내진 않았을 거다.

“...김무공, 한여름. 그대들의 신체는 너무 비정상적이다. 특히 김무공, 그대가 더 심각하구나. 막대한 내공에 비해 빈약하기 그지없는 신체, 기운을 다루는 건 능숙함에도 정작 공격에서 의意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구나.”

무혼 때문에 가능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타고난 기질...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야.”

“그렇겠지. 그대들은 태양과 월음이란 전설상의 신체니. 나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로구나.”

“신체는 단련한다 치고, 의는 뭔데?”

시간이 문제지 체력 단련이야 어차피 꾸준히만 하면 된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정精은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줄 수 있다.

문제는 정기신에서 신神.

즉, 정신 부분이었다.

인간에게 갑자기 꼬리와 날개가 생긴다고 생각해 보자.

그걸 단숨에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까?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렇다.

무혼 덕에 ‘무의식중에’ 사용은 하는데, 정작 사용하는 나조차 그게 ‘왜’ 가능한 건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니 천하연이 실제로 의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 거겠지.

천하연의 시각에선 어린애가 본능에 따라 주먹을 내지르는 것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였을 테니.

“신神이란 곧 의념意念의 표출. 그대들은 이미 무의식중에 사용하고 있다. 이걸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면....”

천하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쉬운 길, 어려운 길, 무식한 길. 선택하거라.”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무식한 길은 뭔데?”

“말 그대로다.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가장 빨리 경지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지.”

“가장 빠르다... 무식한 길 하지 뭐. 한여름 씨?”

“으, 응? 나도.”

멍하니 우리 얘기를 듣던 한여름이 화들짝 놀랐다.

얘 제대로 이해한 거 맞나?

“좋은 결심이다. 그렇다면. 일단 그대들이 익힌 혈수마공과 소수마공 초식 중 하나를 각자 택해 가볍게 만 번 반복하는 걸 목표로 해보는 것이 좋겠구나.”

“...가볍게 몇 번?”

잘못 들은 건가 해서 다시 물었다.

“만 번.”

천하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나눠서 하는 거지?”

그녀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남장 상태임에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소인데, 본능적으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한 번에 만 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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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왜 천하연이 ‘무식한 방법’이라 했는지 깨달았다.

수련할 때마다 쉬지 않고 만 번씩 한 가지 초식을 반복하라.

단순한 정권 지르기도 아니고 혈수마공의 난해한 초식을.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선 이쪽이 마음에 들긴 하는데. 설명 좀 더 해줄 수 있어?”

어렵게 구결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보단, 이런 직관적인 수련 방식이 훨씬 나았다.

아마 한여름도 비슷할 거다.

나를 보며 천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념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아無我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만 번 반복은 그걸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정과 기가 하나의 의념으로 이어지니 그것이 곧 무아지경無我之境이다.”

[...따라서 의지에 따라 기운이 움직이고, 저절로 육체가 행한다.]

천하연의 말과 동시에, 무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게 모든 걸 넘기고 사라진 줄 알았더니, 일종의 트리거처럼.

특정 조건에 도달하면 무신의 깨달음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처음 예상과 달리 무혼은 마냥 날로 먹는 스킬은 아닌 듯했다.

좀 더.

아직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분명 고차원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야, 이해했냐?”

맹한 눈을 하고 있는 한여름의 어깨를 잡았다.

“응...?”

“...그냥 죽어라 반복하면 될 거다.”

“야쓰. 너만 믿을게.”

한여름이 배시시 웃었다.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공부랑 담쌓고 살았던 애니 이론적인 부분은 기대도 안 했다.

대신 무혼을 공유한다는 건, 얘도 무공을 익히는 오성 자체는 같이 발달했다는 거니까.

수련하다 보면 나보다 더 빨리 깨달을 수도 있다.

***

만 번.

일 초에 한 번씩 초식을 내질러도 3시간 가까이 걸린다.

물론 ‘빠르게 반복하는 것’만 목적으로 한다면 훨씬 쉽겠지만, 그래서야 의미가 없다.

천하연은 내게 ‘한 가지 동작에 극한까지 의식을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단순한 호흡이든, 초식을 구현하는 행위이든.

“다시.”

내가 딴 데 정신이 팔린 걸 어떻게 알았는지, 천하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시.

벌써 몇 번째 들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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