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31)

천하연의 저 ‘다시’라는 말은 횟수를 0으로 되돌린다는 얘기였다.

내가 대충 한다고 느끼는 순간, 여지없이 천하연의 개입이 들어왔다.

“...조금만 쉴게. 쉽지 않네.”

깊은숨을 내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내 옆에는 이미 엎어져 있는 한여름이 있었다.

“나 죽어....”

한여름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번 체력단련 때는 땀 냄새가 난다 어쩐다 하더니, 그런 걸 신경 쓸 여력도 없는 모양이다.

미친 듯이 반복훈련을 한 탓에, 힘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수련이란 원래 고단한 것이다.”

나와 한여름을 훑어보며 천하연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공강이라 다행이야.”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한여름이 읊조렸다. 나도 작은 고갯짓으로 동의를 표했다.

“수업 있는 날은 조금 조절하는 게 낫겠구나.”

우리를 번갈아 보던 천하연이 한 발짝 양보했다. 그래도 천하연이 저 정도 융통성은 있었다.

“...그래야겠네.”

새벽부터 이렇게 하드한 수련을 했다간 정작 수업도 못 받을 수 있다.

강도는 알아서 조절하는 수밖에.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부여잡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시작할게.”

끄덕. 천하연의 수락이 떨어지자, 나는 다시 혈수마공 폭렬장爆裂掌의 초식을 시전했다.

혈수마공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초식임에도 이 모양이었다.

“....”

들숨과 날숨을 내쉬며 초식을 지르는 것만 생각했다.

육신은 이미 한계다.

내공을 돌려 강제로 근육을 쥐어짰다.

횟수를 세는 것도 멈췄다.

“....”

어느 순간부터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루하다.

몇 번이나 반복했지?

피로하다.

내가 숨을 내쉬고 있는 건 맞나?

쉬고 싶다.

이 무식한 수련이, 정녕 옳은 방법일까?

이대로 눕고 싶다.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할수록 더 무언가를 갈구하는 존재였다.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초식을 펼치는 걸 방해했다.

그나마 특성의 힘으로 얻은 정신력과 막대한 내공 덕에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진작 쓰러졌으리라.

***

‘2141, 2142, 2143....’

천하연은 김무공의 반복 수련을 보며 기계적으로 횟수를 셌다.

본래 이 수련은 천하연도 아무에게나 쉽게 권하진 않았다.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는 누군가 삼재검법 같은 삼류 무공의 초식을 수십만 번 반복했더니 절대 고수가 되어있더라.

이런 얘기가 흔했지만, 현실에서 그런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현실은 냉혹한 법이다.

어릴 때부터 벌모세수를 받고 꾸준히 영약을 복용한 명문의 제자들이 탁월한 무공까지 익힌다.

이걸 삼류 무공의 단순한 ‘반복 수련’으로 따라가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횟수가 필요할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보통은 그 전에 심신이 피폐해지고 물리적으로 육체가 망가진다.

설사 삼류 무공이 아니라 해도.

체계적으로,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토대를 쌓으며 익히는 게, 경지를 끌어올리는 데도 더 낫다.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현대 무림까지 오면서 어느 정도 증명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식한 선택지를 제시한 건.

순전히 ‘직감’ 때문이었다.

왠지 김무공과 한여름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런 무식한 수련을 견디고, ‘무언가’를 보여줄 것 같다.

정확히 그게 뭔지는 천하연도 아직은 모르겠다.

실제로 김무공은 첫날임에도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다.

조금만 더 하면 망아忘我에 근접할 만큼.

예상보다도 더 집중력과 심지가 뛰어났다.

한여름은 그런 김무공을 보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으니.

서로가 발생시킬 상승효과가 어디까지 갈지 기대됐다.

무인의 발전을 지켜보는 건 천하연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다만.

여기까지다.

“그만.”

수련 중인 둘의 앞으로 나섰다.

김무공과 한여름의 멍한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더 하면 몸 상하겠다.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는 게 낫겠구나.”

천하연은 거의 쓰러질 것 같은 한여름의 손목을 잡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한여름의 창백한 피부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하아... 신기하네. 이거 뭐야?”

“임시방편에 불과하니, 가서 푹 쉬어라.”

“응.”

한여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굳이 필요 없겠군.”

천하연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김무공을 보며 말했다.

“어, 쟤나 좀 신경 써 줘. 오늘 고맙다.”

확실히 양기 계열은 체력이 좋다.

오히려 너무 좋은 탓에 폭주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다행히 김무공에게서 그런 증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잘 들어가라.”

김무공이 한여름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대답할 힘도 없는지 한여름은 작게 고개만 끄덕이곤 터벅터벅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수련 장소는 여성 기숙사 바로 근처였기에, 금방 한여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우, 땀. 돌아가자.”

김무공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을 털어댔다.

흥건한 땀이 이마부터 볼을 타고 턱 끝까지 흘러내렸다.

머리 위로 마시던 생수를 끼얹은 탓에 온몸이 젖어 거의 물에 빠진 생쥐 꼴에 가까웠다.

“첫날치곤 괜찮았구나.”

기숙사로 돌아가며 천하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뭘 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는데.”

“원래 깨달음이란 건 말로 쉬이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그대는 몰아沒我의 경지에서 무아無我를 체현하고 의념을 깨달았을 것이다.”

“조금이라... 그 조금에 도달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데?”

“모른다. 누구에게는 평생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하룻밤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찰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벽이란 그런 거지.”

김무공이 침음을 흘렸다.

“어렵네.”

“어렵지. 그러니 단초를 잡기 위해서는, 꾸준히 수련하며 기회를 잡는 수밖에 없다. 언제나 기회는 미리 준비한 자에게만 오는 법어니.”

“너도 마찬가지야?”

“당연한 걸 묻는구나. 나는 이제 육체적 수행보단 다른 쪽이 필요하지만. 나 역시 벽을 마주하고 있구나.”

천하연이 입을 꾹 다물고 무거운 낯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말간 해가 떠 있었다.

동 나잇대에서는 적수가 없는 천하연이라 할지라도, 마냥 쉽게 이 경지까지 올라온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천재였기에, 남들보다 더 뼈를 깎는 수련을 해왔다.

무공 외에는 관심도 둔 적이 없었다.

흔한 취미조차 가지지 않은 채, 신교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끝없는 고행만 반복했다.

그렇게 천하연은 신교의 소천마로서,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든 되겠지.”

김무공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미소를 보고 있으니 천하연은 살짝 마음이 떨렸다.

따지고 보면 조금은 비루한, 만신창이나 다름없는 모습인데.

“...그렇구나.”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천하연은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

쏴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이 머리를 적셨다.

‘죽겠고만.’

처음에는 생각보다 쉽네.

‘고작 만 번’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한 수백 번쯤까진?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하연의 요구대로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건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대충 한다 싶으면 바로 원점으로 돌려버렸으니.

솔직히 오늘 몇 번 반복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이 몸이 회복은 빨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씻는 것도 힘들어했으리라.

띠링-

멍하니 거울을 쳐다보고 있으니, 알림음 비슷한 게 떴다.

폰에서 나는 게 아니라면 답은 하나다.

자연스럽게 상태창을 켜니 파일 쪽이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어?”

무심코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파일은 원래 내가 ‘수집’해야 업데이트되는 식이다.

그런데 누가 부여해준 것처럼, 알아서 업데이트됐다.

찝찝한 기분에 바로 파일을 눌렀다.

『무림일보武林日報

성남시 살인 사건 ‘충격’ 중원무공아카데미 생도 사망

(현장 사진)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에서 중원무공아카데미 생도가 괴한들에게 살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무림맹과 성남중원경찰서에 따르면 ■■일 오후 11시경 갈현동 인근에서 신원미상의 괴한들이 중원무공아카데미 1학년 이모 씨와...(중략)

■■ 씨의 가족도 은행동 난화 주식회사 냉동창고 내부에서 변사체로 발견. 사인은 동사로 추정되며....

(이하 생략)』

그곳에는 현장 사진이 첨부된 기사 하나가 있었다.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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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서 나오니 거실 한복판에서 천하연이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남장은 이미 푼 상태였다.

진기 때문에 부드럽게 휘날리는 금발이 은은히 빛나며 사뭇 신비로움을 더했다.

내가 나오는 걸 인지했는지, 천하연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렸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천하연의 정면 소파에 앉았다.

천하연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냐?”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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