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얜 역시 쓸데없이 예리하다.
“고민이라기보단,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판단이 안 되네.”
“이성적으로 판단이 안 될 때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행하는 것도 답이 될 수가 있다.”
“마음 가는 대로라....”
왜 이 타이밍에 파일 내용이 업데이트됐는지는 모르겠다.
갈현동이면 아카데미 부지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동네였다.
아카데미 인근은 무림맹은 물론이고, 학생들의 자체적인 치안유지기관.
묵수대까지 순찰을 하는 지역이다.
그런 경계를 뚫고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면, 아마 단순한 일은 아닐 거다.
게다가 일가족까지 희생당했다.
섣불리 뛰어들었다간 나까지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아카데미 인근에서 그런 짓을 벌이려면 어지간한 놈들로는 안 된다.
만일 부검 감정서로 추측한 대로 상대가 혈살귀나 적혈귀라면.
지금의 내 능력으론 어림도 없다.
혈살귀면 그나마 낫다.
적혈귀면....
최소가 일류다. 게다가 인위적인 주화입마 덕에 일반적인 일류 무인보다도 훨씬 강한 편이었다.
그 위력은 혈교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을 때 증명된 바 있다.
대형 문파들조차 상대를 꺼렸었으니까.
경찰이나 무림맹에 신고할 수도 없다.
검색해보니 저런 기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미래에 저런 일이 일어난다는 얘긴데, 말해봐야 누가 믿겠는가.
당장 나만 해도 반신반의 상태인데.
복잡한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탔다.
“너도 마실래?”
“좋다.”
이내 향긋한 커피 향이 집안 가득 퍼져나갔다.
탁.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천하연의 반대편에 앉았다.
무엇이 정답인가.
설사 내 목숨이 위험에 처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건을 미리 방지해야 하나.
아니면 그저 흘러가는 대로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가.
어려운 문제였다.
내가 어떻게든 틀어막았다 해서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곳에서 나비효과가 발생하여 더 끔찍한 사건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몰랐으면 모를까.
알아버린 이상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여기서 회피했다간 나는 결국 끝없이 도망만 칠 것 같다.
불현듯 그런 예감이 들었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질 사건도 못 막는 놈이, 앞으로 세계구급으로 닥쳐올 재난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나? 진짜 그렇게 생각하나?]
마치 상태창이 이런 질문을 내게 건네는 듯도 했다.
결국, 내가 내릴 답은 하나였다.
결심을 마치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부탁 좀 바꿔도 되겠냐?”
“확인 안 했나?”
“뭔 확인?”
“그대가 말한 ‘돈’은 이미 입금했다. 일단은 내 직권으로 유용할 수 있는 정도만이지만. 부족하면 말하거라. 신교에 따로 말해놓을 터이니.”
“잠시.”
스마트폰을 켜고 은행 앱으로 들어갔다.
입금 알림을 보는 순간, 나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일, 십, 백, 천, 만....’
끝없는 0의 향연이 이어졌다.
‘백억.’
...미친.
천하연은 내가 돈이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에, 현금 백억을 그냥 넘겼다.
경제관념이 맛이 가도 정도가 있다.
아무리 세계에서 유명한 부잣집 아가씨라도 얼마 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선뜻 투척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었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어디서 조사 나오는 거 아냐? 국세청이라든지.”
“신교의 행사를 감히 누가 방해한단 말이냐. 걱정하지 마라. 그런 문제를 처리하는 것 따위, 간단하다.”
천하연이 오연한 말투로 어깨를 폈다.
마교쯤 되면 정부 기관과 힘 싸움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대는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착각?”
“지금 그대의 가치가 얼마나 된다 생각하나?”
“글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나도 일단은 무인이니 당연히 몸값이야 비싸겠지만.
“그대가 넘겨준 혈교에 대한 정보는 차치하더라도, 천마신공을 보완할 실마리를 제공해준 것만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수준이구나.”
“내가 딱히 하는 건 없는데.”
“상관없다. 내게 그대는 마치... 무가지보無價之寶의 영약과 마찬가지다. 그대의 가치란 고작 돈 몇 푼과 비할 바가 아니구나.”
인간 영약이라니.
천하연의 입으로 들으니 조금은 오묘한 기분이었다.
“좋게 봐주니 고맙긴 하다만....”
“그러니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된다. 더 요구해도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선 도와줄 터이니.”
어쩌면, 천하연과 이렇게 룸메이트가 된 것부터 엄청난 기연이 아닐까.
우아한 손짓으로, 담담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천하연을 보니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리 말할게. 정파나 신교의 첩자로부터 얻은 정보 아냐.”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구나.”
“무흔마영無痕魔影. 몇이나 근처에 있어?”
탁. 천하연이 커피잔을 곧바로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알고 있었나?”
“대충은. 신교의 소교주가 정파 영역 한 가운데 그냥 들어오진 않았을 거 아냐.”
무흔마영은 마영수라대魔影修羅隊에 속한 자들을 뜻했다.
마영수라대는 곧 소교주의 직속부대라 볼 수 있었다.
수족과도 같은 마영수라대를 전부 신교에 두고 오진 않았을 터.
일부나마 아카데미 인근에 상주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열이다.”
잠시 상념에 잠겼던 천하연이 입을 열었다.
마영수라대는 소수정예였다.
괜히 ‘무흔마영’이라는 이름을 따로 받은 게 아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절정 고수였으니까.
중소 문파에서는 문주급인 절정 고수로 이루어진 부대가 따로 있다는 것부터, 신교가 얼마나 강대한지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열이면....
최소 절반은 천하연 근처를 호위해야 한다.
마영수라대의 가장 큰 목적은 천하연을 수호하는 것이었으니까.
“무흔마영, 움직여 줄 수 있어?”
“용도는?”
“감시 좀 해줬으면 해.”
‘머나먼 미래의 일’이 파일로 업데이트되진 않았을 거다.
이 게임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분명 대비할 시간이 길진 않을 테니, 길어야 한 달이다.
“어디를 말이지?”
“은행동 근처, 난화 주식회사 소유 냉동창고.”
찾아본 결과 총 다섯 곳.
만일 천하연이 내 요청을 받아들여 한 명씩 감시한다 치면 결국 살인 사건 현장 자체를 감시할 인원이 없다.
내가 대신 냉동창고 쪽으로 가자니, 익힌 잠행술도 없을뿐더러 그런 쪽 경험도 없다.
아카데미도 다녀야 하고.
차라리 힘으로 막아야 하는 살인 현장 쪽이 내게는 더 쉽다.
“기간은?”
“대략 한 달 이내. 빠르면 이번 주 안.”
“어렵지 않은 부탁이구나. 감시만 하면 되겠나?”
“내부 조사도 병행해줬으면 좋겠어. 너무 건드리진 말고... 혹시 누가 납치되어 오면 그거 구출하는 정도면 족해.”
천하연이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의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구나.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머리 뚜껑 열면 죽어.”
“농담이니라.”
“부탁할게.”
잔잔한 웃음기와 함께 천하연이 몸을 일으켰다.
“믿어도 된다. 그대의 부탁은 이루어질 것이다.”
“고맙다.”
나는 턱을 괴고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아까 파일 기사에 있던 사진만 손가락으로 스윽 확대해서 바라봤다.
폴리스라인이 그어진 근처의 풍경.
갈현동.
이거면 충분했다.
한국처럼 발달한 지역은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발로 뛰어다닐 필요가 없다.
시골이라면 모를까, 이곳은 수도권이다.
태블릿을 들고 지도를 켰다.
사진상의 구조물로 보이는 것들을 추정하여 위성 지도를 통해 1차로 거르고.
거리뷰를 찍어가며 2차로 파악한다.
몇 단계의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후보 지역은 신기할 정도로 좁혀지기 마련이다.
완전하진 않았다.
그래도 후보지는 세 군데로 좁혀졌다.
이제는 직접 가서 확인할 차례였다.
“잠시 나갔다 올게.”
안방 거울 앞에서 기다란 금발을 정돈 중인 천하연에게 슬쩍 말했다.
천하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봐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냥 외모만 봐도 왜 남장하고 다니라 했는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물론 그런 시답잖은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야, 일어났냐?]
몸도 풀 겸, 후보지 인근으로 달리면서 한여름에게 톡을 보냈다.
[죽었냐?]
한참을 달렸는데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몸이 터질 정도로 넘치는 양기 때문에 미친듯한 회복력을 자랑하는 나와 달리, 한여름은 수련의 여파로 기절해버린 모양이다.
첫 번째 후보지. 탈락.
두 번째도 탈락.
슬슬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릴 때쯤, 마지막 세 번째 후보지에 도착했다.
‘정답.’
기사 사진과 비슷한 각도로 확인하니, 정확히 일치했다.
확실히 주변을 둘러보니 인적도 적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를법한 장소였다.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은 남는다.
이런 곳을 왜 아카데미 생도가 돌아다니다 습격당한 걸까?
지금도 주변에는 사람 한 명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