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31)

낮인데도 음산한 기운만 감돌았다.

11시쯤 되는 늦은 밤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일단 지도에 핀을 찍어 체크했다.

‘경공을 써서 최대한 달린다면 대략 10분에서 15분 정도인가.’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힘의 배분을 신경 쓴다면 20분에서 30분.

장소를 알았다면 다음은 일시를 파악해야 하는데, 이게 가장 문제다.

지금 내가 아는 건 ‘어느 날’ 오후 11시에서 11시 30분 사이라는 것밖에 없다.

감시 인력을 고용한다?

아카데미 인근에서 생도를 대놓고 죽일 정도면 어지간한 감시 인력은 소용없다.

오히려 쓸데없는 희생만 커질 가능성이 높았다.

‘머리 아프네.’

굳이 인간이 직접 감시할 필요가 있나?

아니다.

어차피 수상한 움직임만 체크하면 된다.

그 정도야 상용 장비로도 충분했다.

‘천하연의 힘도 좀 빌리고....’

무슨 어딘가의 파란 양산형 돌보기 로봇도 아니고.

점점 천하연에게 의지하는 빈도가 잦아지는 느낌이다.

[나 일어났어.]

상념을 마치고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니, 그제야 한여름에게 톡이 왔다.

[잘 잤냐?]

[웅냐.]

역시 기절한 거 맞았군.

[그래.]

[왜? 뭔데?]

톡을 누르던 손가락을 잠시 멈췄다.

읽고도 대답이 없자 물음표를 띄운 고양이 이모티콘이 잔뜩 날아왔다.

...이번 일에서 한여름은 배제한다.

[아냐. 멀쩡한가 궁금해서.]

인간을 상대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야쓰. 지금은 괜찮아. 우리 주말에 놀러 가?]

[토욜에 갈까?]

[좋아.]

한 번 더, 사건이 일어날 현장을 둘러보고 뒤돌아섰다.

이 세계에서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란.

이다지도 희미한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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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무공아카데미는 학생회 권한이 꽤 강한 편이었다.

일반적으로 학생회 임원들은 대부분 유명한 명문가의 자제인 경우가 많았고, 그들을 따르는 파벌만 해도 상당했다.

현대 무림에 와서도 강자존을 추구하는 무림의 특성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고, 생도들은 교수들보다 학생회를 더 따르는 성향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자연스레 학생회에 힘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기사 봤나?”

여느 때처럼 책상에 깍지낀 양손을 올리고 근엄한 자세를 취한 모용성이 물었다.

“당연하지요. 실종자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게 발견됐다면서요?”

“그래. 부검 결과 나왔다.”

모용성이 서류 한 장을 비표처럼 접어 베아트리체에게 던졌다.

자연스럽게 베아트리체가 낚아챘다.

“이건 꼭....”

부검 감정서를 펼쳐본 베아트리체가 말꼬리를 흐렸다.

“전설상의 흡혈귀와 비슷하지.”

“그러네요. 피가 모두 빨렸다니. 다른 쪽 외상도 심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출혈이 발생하진 않으니까요.”

“일단 묵수대에게 말해서 아카데미 부지 내부 경계를 강화했다.”

“그러면 외부 경계가 조금 소홀해지지 않을까요?”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쩔 수 없다. 게이트에서 나온 특이종일 수도 있으니. 일단 내부 단속이 먼저다. 외부 경계는 철검대에게 지원 요청했다. 아마 내일쯤부터는 괜찮을 거다.”

범인이 꼭 인간이라는 법은 없었다.

게이트라는 미지의 위협이 등장한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진짜 ‘흡혈귀’ 같은 게 나타났을 수도 있다.

“난리네요, 정말. 주말인데 쉬지도 못하고 이게 뭐람. 우리 총무님도 여전히 바쁘신가 보네요.”

“시신을 발견한 것도 개방 공이 컸다. 발견 장소가 아카데미와 멀지 않다는 게 좀 거슬린다만.”

아카데미 근처의 지도를 살펴보며 모용성이 침음을 흘렸다.

이 거대한 아카데미의 생도들을 책임지는 위치란, 당연히 할 일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학기 첫 주부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턱을 괴고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모용성이 입을 열었다.

“흠검단은 지원 불가능한가?”

“아시잖아요. 저희 쪽 인원 부족한 거. 게이트 지원 다니는 것도 빠듯해요.”

“어딜 가나 인력 부족이군.”

“그나마 한국은 낫죠. 다른 국가 봐요. 사실상 인외마경이나 다름없는 곳이 널렸는데.”

“그도 그렇군. 과거 우리 가문의 본거지도... 아니다.”

무언가 말하려던 모용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중국 출신 무인들이 ‘왜’ 한국으로 많이 이주했나.

세계 유수의 나라를 다 제쳐두고.

오로지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로로 연결된 데다가 좋은 인프라 덕에 세력을 키우기도 한국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에.

단순히 지원만 바라보고 온 것만은 아니었다.

그 바람은 아직도 녹슬지 않았다.

모용성의 본가인 모용세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아트리체가 모용성의 책상에 살짝 기대앉았다.

“언젠가는 되찾는 게 가능하겠죠.”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모용성을 꽤 봐온 베아트리체이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비원을 알 수 있었다.

“...그래야지.”

모용성이 낮게 읊조렸다.

지옥도가 된 중원을 정화하고.

다시 구주九州의 이름을 드높인다.

그것이 모용성이 소속된 신주사가神州四家의 진실된 목표였다.

***

“나 어때?”

한여름이 팔을 벌리고 본인을 과시했다.

“괜찮네.”

“뭔 다 괜찮대.”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난 지금 토요일을 맞아 아침 일찍부터 한여름의 쇼핑에 끌려다니는 중이었다.

옷이 부족하다나.

어차피 교복이랑 무복만 입는데 옷 많아 봐야 뭔 쓸모냐는 나의 항변은 가볍게 묵살당했다.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하지. 그럼 별로라고 할까?”

“아니, 좀 더 자세한 소감 있잖아.”

“이게 내 최대다.”

“이씨, 그냥 좀 어디가 예쁘다.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

“다 예쁘네.”

“대충 말하지 좀 말고.”

한여름이 새침하게 눈을 흘겨댔다.

난 억울하다.

방금은 진심을 담아 한 얘기였다.

성격과 별개로 얘 외모는 흠잡을 데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취향 차이지, 누구나 그렇게 말할 거다.

“진심인데.”

“진짜야?”

팔짱을 끼고 의심의 눈길을 보내 봐야 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 네 상대로 굳이 거짓말할 이유가 있냐?”

“칭찬이야?”

“맘대로 생각해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결제를 마쳤다.

천하연이 거액을 투척해준 덕에 상당수를 투자하고도 돈이 꽤 남았다.

게다가 아카데미 생도는 기본적으로 품위유지비가 지급된다.

덕분에 내 통장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다.

“넌 왜 그런 옷만 사냐.”

한여름이 내 위아래를 훑어보며 잔소리했다.

난 지금 위부터 아래까지 검은색 일변도인 품이 넓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옷 사는 김에 나도 좀 샀거든.

“편하잖아.”

“저런 건?”

한여름이 가리킨 곳에는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남성용 무복이 있었다.

“무복은 소모품이잖냐. 적당히 쓰고 버릴 만큼 싼 게 나아.”

“...그래? 난 괜찮을 거 같은데.”

“필요 없네요. 너나 입으세요.”

“쳇, 그럼 난 산다?”

“오냐.”

성큼성큼 내부로 들어간 한여름이 이내 옷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진짜 그거 입게?”

복장이 참... 보면 볼수록 정신이 아득해졌다.

“청하 교수님도 이런 거 입었잖아.”

“그 양반은 매화검수고. 화산에서 지급된 복장이겠지. 애초에 재질이나 스타일부터 다르잖아.”

한여름이 집은 옷은 과감한 차이나 드레스였다. 머리에 다는 꽃장식까지 세트로 있었다.

백색의 고급스러운 실크로 만든 차이나 드레스는 옆트임까지 구현해놓은 탓에, 가슴골부터 시작해서 몸매를 대놓고 드러냈다.

“안 돼?”

“맘대로 하세요.”

내가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하자 한여름이 신난 듯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어때?”

한여름이 옆트임 사이로 새하얀 허벅지를 드러내며 말했다. 순식간에 복장을 바꾸고 나온 한여름을 보고 있자니.

“...이쁘긴 하네.”

인정하긴 싫지만, 이래서 남자들이 좋아하는구나 싶다.

“오랜만에 솔직한 반응이네.”

입가를 가리고 한여름이 배시시 웃었다.

“난 항상 솔직하거든.”

“네에, 그러시겠지요.”

한여름이 내 팔짱을 꼈다.

몽실몽실한 가슴이 그대로 느껴져서 조금은 민망했다.

백만 단위를 한 번에 결제하자니 속이 좀 쓰렸지만, 저렇게 좋아하는데 마냥 거절하기도 그렇고.

난 돈이 많다.

천하연 덕이지만.

앞으로는 더 부자가 될 예정이다.

이미 분할 매수 들어간 주식도 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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