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사 내가 행한 일 때문에 미래가 바뀌어 몇 종류는 꼬꾸라진다 해도 상관없다.
한두 개만 살아남아도 2배로 갚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입혀놓고 보니 예쁘다.
그거면 됐지 뭐.
“아, 배고프다.”
“넌 맨날 배고프냐.”
“성장기가 덜 끝났나 보지.”
“개소리 노.”
“이렇게 예쁜 강아지 봤어?”
“좀.”
본인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무기로 삼는 여성은 상당히 얄밉다.
꿀밤 마려운 걸 애써 참았다.
“저기 가자.”
결국 한여름의 손에 이끌려 식당에 들어갔다.
[연쇄 실종 사건의 피해자로 추정되는 시신이....]
밥을 먹는 내내 TV에서는 저런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난린가 봐.”
우물우물 음식을 먹던 한여름도 TV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파일의 부검 감정서에 나왔던 대로, 이번에 발견된 시신도 혈액이 모두 빨린 상태였다.
“몹 중에 흡혈귀가 있었나?”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흡혈귀라는 ‘종족’은 없었지.”
혈교의 무리야 같은 인간들이 그런 짓을 벌이고 다녔던 거니까.
[그대의 말대로 준비는 해놨구나. 이상이 생기면 바로 연락이 가도록 조치했다.]
[고마워.]
때마침 천하연으로부터 톡이 왔다.
내가 말했던 지역을 감시하는 장비를 설치 완료했다는 얘기였다.
[난화 주식회사 냉동창고는 감시 중이나, 아직 특별한 점은 없다고 하더구나.]
[감시만 계속해주면 돼. 진심 고맙다.]
[뭘. 주말 잘 보내거라.]
[너도.]
폰에서 시선을 거두니 한여름이 물끄러미 날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야?”
명백한 의심의 눈초리였다.
“천하연.”
“개인 톡도 해?”
“친구잖냐.”
“...그렇구나. 벌써 그렇게 친해졌나 보네.”
“질투?”
“아, 아니거든...! 딱히 신경 쓰이는 거 아냐.”
한여름이 고개를 홱 돌리며 입술을 샐쭉거렸다.
저렇게 강하게 부정하면 오히려 긍정이나 다름없는데 말이지.
본인의 모습을 찍어서 보여주고 싶은 기분이다.
입꼬리가 살살 올라가는 걸 강제로 억제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좀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래. 나중에 알려줄게.”
“뭔데?”
“나중에.”
한여름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살짝 닦아주며 말했다.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던 한여름이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믿을게.”
“오냐. 이 오빠를 믿거라.”
“오빠는 지랄.”
“오빠는 맞잖냐.”
“소름 돋으니까 하지 마.”
탁. 한여름이 내 손등을 살짝 쳤다.
얘한테 오빠 소리 들었던 건 처음 만났을 때.
딱 한 달이 끝이었다.
그 이후론 김무, 김씨, 무공, 공이.
별의별 호칭으로 부르더니 요샌 그냥 김무공이나 너로 굳혀진 모양이다.
물론 가끔 자기 아쉬울 땐 오빠 소리 하긴 했지만.
1년 통틀어서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젠 동갑이잖아? 김무공 씨, 나이 몇 짤?”
“야, 계산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어딜 맞먹으려고.”
“몰라. 일어나기나 하자.”
되지도 않는 억지에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옷이 가득 담긴 쇼핑백을 어깨에 걸쳐 맸다.
“카페 가냐?”
“나 그냥 카페 말고 가고 싶은 곳 있어.”
“어딘데?”
“아까 봤던 곳 있어. 따라와.”
한여름이 성큼성큼 앞장섰다.
그렇게 쇼핑몰을 나와 대로 한복판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여기 맞아?”
“응. 맞는데?”
천연덕스럽게 그녀가 대꾸했다.
“차라리 영화관이 낫지 않냐?”
“사람 많아서 싫어. 예전부터 궁금했거든.”
“난 모르겠다.”
“나만 믿어.”
한여름이 당당하게 내 손을 붙잡고 들어간 곳도 카페긴 했다.
앞에 ‘룸’이 붙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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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룸카페의 이미지는 그거였다.
청소년 일탈의 성지.
여기도 크게 다르진 않은가, 교복 입은 학생들이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린놈들이 발랑 까져서 말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한여름의 관심사는 이미 룸카페 안쪽으로 향했다.
내부는 긴 복도를 중심으로 밀폐된 작은 방들이 있는 형태였다.
“분위기 좀.”
무공 때문에 강화된 청각인지, 사방에서 나는 야릇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렇네.”
이제야 한여름도 인지했는지 볼에 살짝 홍조를 띄웠다.
“나갈까?”
“아냐. 이왕 왔는데 놀다 가자.”
한여름이 고개를 천천히 젓고는 내 소맷자락을 살짝 잡았다.
결국, 방을 배정받고 내부로 들어갔다.
안에는 작은 매트리스와 베개, TV가 있었다.
물티슈와 휴지까지.
매트리스는 딱 성인 두 명이 겨우 누울만한 크기였다.
“이거 너무 노골적인데?”
“이런 곳인 줄은 몰랐지.”
그런 것치곤 한여름의 표정이 상당히 미묘했다.
...진짜 몰랐던 거 맞나?
“건전하게만 이용하면 데이트 장소로는 좋긴 하겠네.”
“그건 그래.”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거지, 장소가 뭐 문제겠는가.
“뭐 먹을래?”
쇼핑백을 내려놓고 한여름에게 물었다.
“같이 가자.”
음료를 비롯한 간단한 다과를 비치된 그릇에 담았다.
한여름은 작은 팝콘 기계 앞으로 가더니, 캐러멜 팝콘을 종이봉투에 잔뜩 담아 나를 보며 흔들었다.
“너무 많은 거 아냐?”
“내가 다 먹을 거임.”
“맘대로 해라. 콜라 먹냐?”
“웅냐.”
자연스럽게 역할을 분담해서 먹을 걸 챙겼다.
혹시 모르니 무릎 담요까지.
사냥을 마친 하이에나처럼 먹을 걸 들고 우린 방으로 돌아왔다.
‘뭐 하지?’
막상 방으로 들어오니, 딱히 할 게 생각나질 않았다.
보드게임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한여름은 벌써 매트리스에 기대 팝콘을 하나씩 먹고 있었다.
나도 다리를 쭉 뻗고 한여름과 같이 TV 쪽을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들고 TV를 조작했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이곳은 내가 살던 현실과 다르다.
게임 내에서 ‘모든 걸’ 표현하진 않았다.
애초에 그럴 수도 없고.
사소한 부분은 당연히 여백으로 남아있었다.
게임이 현실이 됐을 때, ‘여백’은 어떤 형태로 표현되는가.
그 답이 내 눈앞에 있다.
“뭐야 이거.”
한여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TV를 쳐다봤다.
우리가 현실에서 봤던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영화들로 화면이 가득 차 있었다.
“글게, 어쩌냐.”
“암거나 보자.”
결국, 무난한 블록버스터로 짐작되는 영화를 틀었다.
영화 내용은 생각보다 무난했다.
딱 팝콘 무비.
현실에서도 충분히 있을법한 영화였다.
“나 좀 추운데.”
원래도 몸에 한기가 많은 데다가, 에어컨을 워낙 빵빵하게 틀어서 그런지 한여름이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게다가 지금 한여름이 입은 옷도 아까 샀던, 가슴과 다리가 다 드러나는 차이나 드레스였다.
“안 그래도 이거 가져왔다.”
한여름의 매끈한 허벅지 위에 무릎 담요를 펼쳐 덮어줬다.
“역시 김무공. 준비성 좋아. 마음에 들어.”
“국어책 읽기 하지 말고.”
“진심인데.”
한여름이 배시시 웃으며 내 어깨 쪽으로 머리를 기댔다.
“오냐. 좀 더 찬양해라.”
“그건 싫음.”
“나 궁금한 거 있어.”
화면을 쳐다보며 한여름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