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31)

“무슨 실험 하냐.”

“남자들 질싸 좋아한다며.”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

“인터넷 찾아봤지.”

“...자랑이다.”

“그래서 싫어?”

“아니, 찝찝하다고 후회하지나 마라.”

“응, 안 함.”

하여간, 이걸 과감하다고 해야 할지.

불과 얼마 전까지 남자 거기 한번 본 적 없는 처녀였던 애가 맞나 싶다.

“우리 이제 뭐 하냐?”

“잠시, 나 옷 좀 갈아입을래.”

한여름이 차이나 드레스를 훌렁 벗고 쇼핑백에 있던 다른 옷을 집어 들었다.

“근데 아까 신체 조작, 정확히 뭐임?”

주섬주섬 갈아입는 한여름에게 방금 뇌리를 스친 의문을 물었다.

“특전이라고 던져 주던데. 나도 잘은 모르겠어. 배란일이랑... 엔도르핀, 아드레날린인가? 이거 조절할 수 있대. 조절은 상태창 가지고 하면 돼서 어렵진 않아.”

“상태창에 그렇게 나와 있었어?”

“응.”

“엔도르핀이랑 아드레날린은 어지간해서 건드리지 마라. 특히 엔도르핀.”

둘 다 인체 내부에서 생성되는 호르몬이지만.

아드레날린은 아예 치사량이 존재하는 맹독성 물질이고, 엔도르핀은 인체가 생산하는 현존 최강의 마약이다.

무공을 익혔으니 부작용 면에선 훨씬 자유롭겠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뭔데 이게?”

“마약류 도핑이라 생각해. 목숨이 위험할 상황 아니면 봉인. 알았지?”

“웅냐. 어차피 저 둘은 완벽히 내 마음대로는 안되나 봐.”

한여름이 어딘가를 쳐다보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내에서 광전사 수준이었던 한여름이 저런 특전을 받은 게 우연 같지는 않았다.

내가 다른 것들을 놔두고 파일 기능을 특전으로 얻은 것과 마찬가지겠지.

다만, 조금 안심되는 부분도 있었다.

특성으로 강한 고통 내성이 있는 나와 다르게 한여름은 그런 게 없으니.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광전사처럼 싸울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이점이었다.

“나가자.”

차이나 드레스에서 단정한 교복으로 갈아입은 한여름이 말했다.

깨닫고 보니,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

룸카페를 나와서 출출한 기분에 뭐 좀 먹고, 커피 좀 마시다 집에 들어오니 어느새 시간이 꽤 늦었다. 주말까진 기숙사 생활이 강제되진 않았다.

“피곤해....”

한여름이 녹아내리듯 소파에 드러누웠다.

“씻고 누워라, 씻고.”

“으아앙, 피곤해...!”

“언젠 한 번 더 하자며.”

“하고 싶은데 넘 귀찮은걸. 그냥 할래?”

부스스한 자세로 한여름이 몸을 일으켰다.

“놉. 당장 욕실로 들어갑니다. 한여름 생도.”

욕실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5분만 쉴게.”

“...에휴.”

한숨을 푹 내쉬며 한여름의 옆에 가서 앉았다.

“헤헤....”

현여름이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한가롭게 머리를 쓰다듬던 도중.

시끄러운 상태창 알림이 귀를 때렸다.

열어보니 파일이 새로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찢긴 일기의 일부.

■■서부터 ■못된 거였을까.

내가 좀 더 ■■했더라면.

(잉크가 번져있다.)

■■가 죽■ 않았을까.

3월 5일 오후 11시.

절대 잊지 않아.

쓰레기 놈들을 전부 쳐죽일 때까지.

(거칠게 뜯겨 나가 확인이 불가능하다.)』

보자마자 몽롱했던 정신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3월 5일.

오늘이다.

오후 11시.

지금 시각, 오후 10시 45분.

남은 시간, 고작 15분.

...참, 좆같은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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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조심히 일어났다.

“응?”

멍한 눈으로 한여름이 나를 쳐다봤다.

“좀 나갔다 올게.”

“...갑자기?”

“미안하다. 먼저 자고 있어.”

“설명도 없이 뭔데.”

한여름이 이마를 좁히며 눈을 찡그렸다.

“...시간이 없어서. 갔다 와서 설명해 줄게.”

“나도 갈래 그럼.”

“한여름.”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여름을 위험에 빠트릴 순 없다. 지금부터 갈 곳은 뭐가 도사리고 있는지 나조차 모른다.

“...알았어. 대신 다녀와서 확실하게 설명해.”

주먹을 꽉 쥔 채, 한여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바로 뒤돌아서서 집 밖으로 나왔다.

경공을 쓰며 달리기 시작하자,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이 격하게 울렸다.

[그대, 깨어있나?]

[안 그래도 연락하려 했어.]

[난화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더구나. 다섯 군데 중 세 곳. 지금 파악 중이다.]

[감시장치 쪽은?]

[...그쪽이 더 문제구나. 방금 모든 감시장치가 꺼졌다. 무슨 간섭이라도 받은 듯이.]

[난화 쪽만 어떻게 해줘. 다른 쪽은 내가 가 볼게.]

[알겠다. 난화 쪽 일 처리가 끝나면 그쪽으로 무흔마영을 보낼 테니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고마워.]

[뭘, 무운을 비마.]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하고 있음은 틀림없었다.

문제는 내 힘으로 그걸 막을 수 있냐.

전력으로 경공을 써서 달리다 보니 온갖 망념이 뇌리를 잠식했다.

과연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혹시 죽기라도 하면, 혼자 남은 한여름은 어떻게 하고.

가도 구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아니.’

이미 결정한 일이다.

이제 와서 유혹에 넘어가선 안 된다.

좆같은 게임이고 시궁창 같은 세계라지만, 분명 정답에 가까운 길은 있을 터이다.

관련 파일이 괜히 업데이트됐을 리가 없다.

같은 생도가 살해당하는 걸 막는다.

정답에 가까우면서, 인간적으로도 당연히 ‘옳은 길’이라 생각한다.

고민을 내려놓고 발바닥의 용천혈에 내기를 실어 강하게 땅을 박찼다.

일순, 빛이 명멸했다.

‘뭐...?’

순식간에 풍경이 뒤바뀌고 나는 어둠 속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동작을 멈추고 주변을 응시했다.

짙은 암흑 속에서 별빛이 반짝였다.

마치 우주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정면에 밝은 빛이 느껴졌다.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땅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걷는 게 가능했다.

빛이라 생각했던 건, 평범한 빛이 아니었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선풍도골의 노인이 정좌해 있었다.

얼굴은 강한 빛무리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연자여.]

들어본 적 있던,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신...? 신선이 된 겁니까? 이곳은 대체 뭡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여긴 연자의 심상 세계라네. 나 역시, 신선 같은 게 아니라 연자의 마음이 빚어낸 환상에 불과하지.]

차가운 우주와 다르게 이곳은 포근함이 감돌았다.

이런 곳이 내 심상 세계라고?

사뭇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제겐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럴 시간도 없습니다.”

[바깥의 일 초는 심상 세계에서 백 년이 될 수도, 천 년이 될 수도 있는 법이지. 밖의 시간은 흐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게. 차 좀 들겠나?]

갑자기 바둑판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생겨났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나는 그 앞에 앉아 차를 들었다.

씁쓸한 차향과 따뜻한 찻잔의 온기까지 그대로 전해져왔다.

“환상치곤 너무 생생하군요.”

[무혼에 남은 ‘나’를 통해 만든 환상이니 말일세. 아직 연자에게는 이른 얘기지만.]

“갑자기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가 뭡니까?”

하필 그것도 다급하게 뛰어가던 도중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신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묻노니, 협俠이란 무어라 생각하는가?]

다짜고짜 협이라니. 뜬구름 잡는 소리도 정도가 있다.

“모르겠습니다.”

무신이 껄껄거리며 웃어댔다.

[그렇지. 마음에 검을 품는 경지에 이르러서도, 협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더구나.]

“그런 게 중요합니까?”

[중요할 수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지. 누군가는 고루한 질문이라 말하겠지만 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네. 협이 없는 무武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름 게임을 꽤 해오면서도, 협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정파 인물들이 소협, 대협 이렇게 서로 띄워주며 노는 거로만 알았지.

“협이라는 기준이 없어도 무인답게, 정의롭게 잘 살면 그만 아닙니까?”

[그렇지. 정의正義. 어쩌면 정의 또한 누군가에겐 협의 또 다른 이름 아니겠는가?]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묻겠네. 연자가 지금 행하고자 하는 일은 협인가? 아닌가?]

“그런 대단한 생각을 가지고 판단한 건 아닙니다.”

애초에 사람을 돕는 데 협이네 뭐네 하는 이유가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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