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31)

천하연의 말대로 나는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한 것뿐이다.

거창한 협이나 대의.

그런 건 모른다.

내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천지사방이 진동하며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옳은 얘기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묻노니, 협이란 무엇인가?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백 명의 협사俠士가 있다면, 백 가지의 협이 있는 법이다. 이것을 단순히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무신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내면에서 무언가 솟구쳐올랐다.

[아니다.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협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가? 호사가들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허상에 불과한가? 그것 역시 아니다. 연자가 지금 행하려는 일들은 협이 맞는가? 나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협이 맞다. 누구에게 물어도 그렇게 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협의 기준점 역시 존재하는 게 아니겠는가?]

“...어렵군요.”

어째선지 무신이 미소짓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표정은 하나도 보이지 않음에도.

[간단하게 생각하게나. 그대가 의義를 세우지 않았다면 내가 다시 나타나는 일도 없었을 거라네. 그러므로 연자여, 부디 당부하노니.]

쩌저적- 유리가 깨지듯 사방이 금가기 시작했다.

[무武로써 협俠을 행하길 바라네.]

세계가 일변하며 현실로 의식이 부상했다.

시간을 보니 무신의 말대로 1초도 지나지 않았다.

다시 경공을 써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분명하게 힘이 넘쳐흘렀다.

불현듯 드는 직감에 상태창을 열었더니, 무혼과 연계된 특성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무혼武魂-협인지로俠人之路]

협俠이란 무엇인가?

협을 행하는 동안 능력치 증가.

...그런 거였나.

무신과의 대담이 발생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만일 내가 외면한다는 선택지를 택했다면.

아마 이 연계 특성은 영원히 얻지 못했겠지.

무신이 말한 협의 기준점에 대해선 잘 모르겠으나, 분명히 내 능력치는 상승했다.

그 말인즉슨, 특성은 지금 내 행동을 협이라 규정했고.

...사건 현장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였다.

***

혼원문.

비록 일인전승을 원칙 삼고 있긴 해도, 과거 천하제일인도 몇 배출한 적 있었던 유서 깊은 문파였다.

일인전승 문파라 해서 혼자만 생활하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생활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물품이 필요한 법이고, 무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신씨 가문.

혼원문을 오랜 세월에 걸쳐 지원해온 가문이었다.

올해는 혼원문의 후계자와 신씨 가문의 후계자가 동시에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기사가 일어났다.

어릴 적 자주 봤던 탓에,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아리야? 여기 맞아?”

이지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신아리. 신씨 가문 후계자의 이름이었다.

주말을 맞아 둘은 외출을 나왔다.

시간도 잊을 정도로 놀다가 기숙사에 들어가기 직전, 같이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다며 신아리가 데려간 곳은....

인적 하나 없는 음침한 장소였다.

신아리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몸을 떨었다.

“여, 역시 안 되겠어. 지아야, 잘 들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서 아카데미로....”

“무슨 일이야?”

“시간 없어. 빨리...!”

어리둥절하고 있는 이지아의 손을 잡고 다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치직-

갑자기 주변의 가로등이 한번 깜빡였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니, 정면에 시커먼 무언가가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어딜 그리 가십니까?”

또각또각. 동그란 안경에 말끔한 양복을 입은 사내가 ‘무언가’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안돼... 안돼....”

사내를 본 신아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진한 피비린내와 지독한 악취.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이 이지아의 예리한 감각에 느껴졌다.

“이렇게 도망가는 건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가족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을까요?”

신아리를 보며 사내가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말이야?”

“간단한 얘기죠. 혼원문 이지아. 당신을 팔아넘겼다는 겁니다. 당신이 친우라 생각했던 신아리가. 이리 쉽게 혼원문의 소체를 얻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로군요.”

“...고작 이따위 놈들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이지아는 이미 주변에 어떤 자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전부 파악했다.

평소에 책만 읽고 살생을 극도로 꺼리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많이들 오해하지만.

혼원문이 괜히 지금껏 일인전승 문파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압도적인 무력. 혼원이란 곧 우주를 뜻함이니.

우주를 몸에 담아 무극을 추구하는 혼원문의 독문무공.

혼원무극신공混元武極神功은 가히 천하제일을 논할법했다.

“글쎄요.”

사내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이지아는 전후 사정을 전부 파악했다.

“신아리, 뒤로 물러서.”

신씨 가문은 세가 그리 크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만으로도, 가문의 홍복이라며 기뻐할 만했다.

당연히 입학을 기념해서 신아리의 부모님도 찾아왔을 테고.

그 직후 납치당했을 거다.

자신을 팔아넘겼다?

가족을 빌미로 협박한 거겠지.

이지아는 확신했다.

“순박한 사람들이야. 네놈 같은 마인들이 건드려도 될... 분들이 아냐.”

신아리의 부모님은 이지아도 자주 봤었다.

혼원문에 물품을 전해주러 직접 온 적이 많았으니까.

저런 쓰레기들은 언제나 약자를 노린다.

그러면서 약자에게 피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고, 마치 ‘네가 선택한 일이다.’라는 식으로 겁박한다.

그것을 ‘선택’이라 부를 수 있는가?

사내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사람의 의지를 가지고 놀면서 자신의 저열한 의도대로 인간이 망가지는 걸 기꺼워한다.

당하는 건, 언제나 약자다.

활화산 같은 분노가 이지아의 뇌리를 휩쓸기 시작했다.

혼원무극신공은 균형을 중시한다.

인간의 몸으로 우주를 논하는 광오한 무공은 극도의 평정심을 요구했다.

평정심. 이지아의 사부가 부단히 강조한 얘기기도 했으나.

저들을 보며 이지아는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혼원무극신공의 맹렬한 기운에 휩싸여 나부꼈다.

곧바로 정면을 가로막은 마인의 머리통에 주먹을 내질렀다.

꽝- 마치 철벽을 때리는듯한 굉음이 일었다.

족히 2m는 넘어가는 괴인은 이지아의 공격에도 멀쩡했다.

‘외부 공격에 극도로 강하다.’

상성이 좋지 않았다.

이지아의 사문은 강한 외력을 통한 파괴를 추구했다.

아마 미리 파악하고 이런 것을 데려온 거겠지.

“약속을 지키세요.”

이죽거리는 사내의 말과 동시에, 숨어있던 괴인들이 이지아에게 달려들었다.

퍽-

순간, 무언가 이지아의 등 뒤로 다가왔다.

“미, 미안해.”

이지아의 후방에서 가해지는 공격을 신아리가 몸으로 막아버렸다.

깊은 자상이 신아리의 등줄기에 죽죽 그어졌다.

촤악- 붉은 피가 흩뿌려지며 이지아의 뺨을 적셨다.

“쯧, 이래서 정파 놈들은.”

사내가 혀를 차며 신아리와 이지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신아리는 이지아의 등 뒤를 공격한다.

그것이 신아리와 사내가 나눈 ‘약속’이었다.

“아...?”

이지아가 멍하니 신아리를 안았다.

괴인들의 공격도 멈췄다.

“그거참, 유감스러운 일이군요. 친우를 팔아넘긴 주제에 이제 와서 희생하는 척 해봐야 의미가 있을까요?”

“그, 더러운 입.”

이지아가 이를 악물며 으르렁거렸다. 덜덜 떨리는 손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닥쳐...!”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살심이 이지아의 마음을 지배했다. 심마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싫습니다만.”

사내가 비웃으며 손짓하자 괴인 하나가 달려들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신아리의 몸을 눕혀놓고 괴인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려는 순간.

뻐억-!

무언가가 날아와 괴인을 날려버렸다.

순식간에 나타나서 괴인을 막아버린 사내의 넓은 등은, 이지아도 알고 있었다.

김무공.

어떻게 여기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였다.

“점혈. 정신 차려라. 아직 안 죽었다.”

나직한 목소리에 이지아의 이성이 점점 돌아왔다.

김무공의 말대로, 아리는 죽지 않았다.

출혈이 심한 거지 의외로 핵심 장기는 전부 피해갔다. 살릴 수 있다.

급하게 점혈하며 출혈을 틀어막았다.

“병원으로 가라. 여긴 내가 맡을 테니.”

이지아가 굳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이며 신아리를 안아 들었다.

“가긴 어딜 가십니까?”

사내가 다시 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뭐...?”

명령에도 불구하고, 괴인들은 여전히 멈춰 서서 김무공을 쳐다봤다.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역겨운 혈교 놈들이.”

김무공의 전신에서 검붉은 기운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사내와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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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화 쪽은 아직 제압 중이다. 납치된 사람은 전부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더구나.]

[매번 고마워.]

[조심해라. 심상치 않은 놈들 같구나.]

[알고 있어.]

사건 현장에 도착하기 직전, 천하연에게 연락이 왔다. 천하연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난화 쪽도 쉽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인질은 전부 구출했다 하니, 한 시름 덜었다.

도착하자마자 이지아의 앞에 있던 혈살귀 한 놈을 발로 차서 날렸다.

강화된 근력 탓에 조금만 힘을 줬는데도 느껴지는 각력 자체가 달랐다.

상태창에선 천마신공과 협인지로의 동시 발동을 알리는 알람이 요란했다.

근력 : 11(F)->4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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