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니었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아니, 좀 졸려서 그래.”
실수했다.
안색을 바로 하고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냐. 얼른 자라.”
한여름은 말없이 김무공의 정면에 가서 섰다.
눈을 마주치며, 가슴팍에 머리를 끌어안았다.
“야, 뭔데 갑자기.”
조금은 당황한듯한 목소리가 심장 언저리에서 들려왔다.
“그냥.”
머리를 양손으로 꽉 감싸 안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처음과 달리,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사라졌다.
“....”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는 잠자코 한여름의 품에 안겼다.
조금은 오랜 시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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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이 많은 걸 막아줬지만, 정신적 피로까지는 해결해주지 못했다.
덕분에 어제는 쓰러지듯 잠들었다.
침대로 갈 생각조차 못 하고, 소파에 누워서 그대로.
의식을 일깨우자 가슴팍에서 미약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손끝을 천천히 움직이며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온기와 적당한 무게감에 기분이 평온해지는 느낌이다.
“우음....”
내 손길에 잠이 깼는지, 한여름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렸다.
“일어났냐?”
“...웅냐.”
딱 달라붙어 있던 한여름이 자세를 바꾸며 몸을 일으켰다.
내 위에 아예 올라탄 수준이라 아랫도리가 눈치 없이 제멋대로 반응했다.
한여름의 눈이 동그래졌다.
“밥이나 먹자.”
깨닫고 보니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다.
어제 그렇게 한바탕 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니까.
지그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한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뭐 시킬까?”
“여기도 배달와?”
“전에 보니까 있었어.”
한여름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미 찾아봤냐.
역시 먹을 것엔 항상 진심인 여자다.
“너 먹고 싶은 거 시켜.”
“진짜 마음대로 시킨다?”
“오냐.”
“시켰당.”
폰을 열심히 만지작거리던 한여름이 다시 내게 풀썩 쓰러졌다.
“얌마, 일어나야지.”
“싫어. 허리나 안아 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작게 한숨 쉬며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고 토닥였다.
주말 오전의 따스한 햇볕이 커튼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이러다 자겠다.”
나른한 기분에 눈이 저절로 감긴다.
“배달오면 알아서 깨지 않을까?”
대답 대신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말이다.”
“응.”
한여름이 작게 중얼거렸다.
“혈교랑 싸웠다.”
입안에서 온갖 말이 맴돌았지만, 결국 밖으로 나온 건 담백한 말이었다.
“고생했어.”
뭔가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다. 마치 예상했다는 말투였다.
“서운하냐?”
한여름이 좀 더 내 쪽으로 몸을 밀착했다. 우물거리는 입술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런 거 아냐. 내가 했던 말 때문이면, 굳이 말 안 해도 돼.”
사람을 죽였다. 머리통을 터트려 뇌수를 쥐어짜고, 내장을 잡아 뜯어 곤죽으로 만들었다. 몇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다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생각보다 별 건 아니었다. 혈살귀든 뭐든 놀라울 정도로 인간은 쉽게 죽더라. 몇이나 죽였는지도 모르겠다. 얼핏 보니 열은 넘은 것 같다.
그렇게 죽여댔는데 아무렇지도 않더라.
고블린을 죽이는 것보다 감흥이 없었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머릿속을 맴돌던 많은 말 대신, 한여름의 머리를 나긋하게 쓰다듬기만 반복했다.
띵동-
노곤한 느낌에 졸음이 솔솔 밀려올 때쯤,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오, 왔나 보다.”
벌떡 일어난 한여름이 곧장 음식을 받으러 나갔다.
“...어?”
현관문 쪽에서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 들려왔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뒤따르니, 그곳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청하 교수. 그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대충 무슨 일인지는 짐작 갔다.
“들어오시죠.”
맹한 눈빛을 하고 있는 한여름의 허리를 붙잡고 청하 교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거의 동시에, 우리가 시켰던 식사도 도착했다.
“죄송해요. 식사 전이셨나 봐요?”
주변을 곁눈질로 두리번거리며 청하 교수가 물었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기다릴게요. 두 분 식사부터 하시길.”
청하 교수가 거실 소파 앞에 정좌했다.
다소 뻘쭘한 기분이긴 했으나, 청하 교수의 칼 같은 태도는 마치 반론은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듯했다.
“감사합니다. 아침은 드셨습니까?”
“예.”
청하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시간은 아침보다는 브런치 타임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막상 저렇게만 두긴 좀 그래서, 찬장을 뒤적거렸다.
...없다.
혹시라도 차 같은 게 있나 하고 찾아봤지만, 텅텅 비어있었다.
기숙사 위주로 생활하는지라 뭘 사놓지도 않았으니까.
“죄송합니다, 차가 없네요.”
“괜찮아요. 저 차 안 좋아해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청하 교수가 말했다.
화산 도사가 차를 안 좋아한다?
상당히 의외다.
“물이라도 드릴까요?”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청하 교수의 시선이 어디론가 향했다.
...응?
“물보단 저게 좋겠네요.”
사뭇 우아하기까지 한 몸짓으로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배달과 함께 딸려온 콜라병이 놓여 있었다.
“예?”
잠시 인지부조화가 와서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차를 안 좋아하고 콜라를 선호하는 화산파 도사 출신 교수?
그러지 말란 법은 물론 없었지만, 내 안의 고고한 매화검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
“편견이에요 그거.”
내 눈빛에 담긴 뜻을 바로 알아차렸는지 살짝 뾰로통한 말투로 청하 교수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많이 들어서 이젠 별생각도 없네요. 사부님도 포기하셨거든요.”
한숨을 푹 내쉬며 내가 건넨 콜라를 양손으로 받았다. 그리곤 컵을 양손으로 쥐고 홀짝였다. 뭔가, 처음 봤을 때 도도했던 이미지가 깨져나가고 있다.
한여름도 비슷한 감상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하 교수를 훔쳐봤다.
“세팅 다 했어.”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내 메뉴는 장어 덮밥이었다.
“장어 덮밥 뭐냐?”
“맘대로 시키라며. 장어 덮밥 싫음?”
“아니, 싫진 않은데.”
아침부터 굳이?
게다가 슬쩍 숟가락으로 들춰보니 밥보다 장어가 더 많았다.
“장어 추가했냐?”
“웅냐. 많이 먹어. 남기지 말고.”
한여름이 머리끝을 살짝 꼬면서 배시시 웃었다.
“이건 하나 추가가 아닌데? 대체 장어를 얼마나 추가한 거야.”
“비밀.”
혀까지 살짝 내미는 걸 보니 참.
말없이 장어 덮밥을 씹던 도중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청하 교수가 신기한 듯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딱 봐도 우리 사이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해 보이는 눈빛이다.
“나 다 먹었어.”
그러든가 말든가, 남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여성도 한 명.
한여름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배를 쓰다듬었다.
나도 마침 딱 다 먹었다.
“정리 좀 해줘. 교수님이랑 얘기 좀 해야 할 거 같으니.”
“야쓰. 걱정 마.”
장어 덮밥이 담겨있던 그릇을 한번 흘깃한 한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먹었다 얌마.
굳이 뭘 확인까지 하고 그러냐.
속으로 침음을 흘리며 청하 교수의 반대편에 앉았다.
“어제저녁 사건으로 오신 거 맞습니까?”
먼저 물었다. 어차피 교수가 직접 여기까지 올 이유는 뻔했다.
“예, 학생회 소속 치안유지기관 묵수대의 고문을 제가 맡고 있거든요.”
“무림맹이나 경찰에서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청하 교수의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사건이 일어난 위치가 아카데미 부지 경계였거든요. 아카데미 부지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이쪽에서 관할하게 되어있어요.”
“형사사건인데 말입니까?”
“예, 묵수대가 수사권을 위임받았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어요. 정확히는 묵수대와 무림맹 파견부대의 공동 수사에 가깝지만요.”
묵수대라.
권한이 좀 더 부여된 일종의 캠퍼스 폴리스 느낌인가.
하긴, 학생이라곤 하나 무인들 상대를 일반 경찰이 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무림맹은 언제나 바쁜 집단이니, 결국 효율을 위해 학생자치기구인 묵수대의 권한이 높아졌다는 얘기인듯했다.
“무림맹 파견부대는 철검댑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