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들으셨나요?”
“아뇨. 넘겨짚은 겁니다.”
정확히는 파일을 보고 짐작한 거였지만.
청하 교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일단 그런 거로 하지요. 현장 사정이 조금 복잡해져서요. 아무래도 마교까지 엮여 있다 보니까.”
“천마신교는... 어떻게 됐습니까?”
“수사에 협조하기로 했어요. 용의자를 그쪽에서 확보하고 있더군요.”
다행이다.
혹여 나 때문에 천마신교와 정파가 충돌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하니까.
“나 여기 앉아도 돼?”
어느새 정리를 마친 한여름이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냥 숨길 생각은 없었다.
“괜찮겠죠? 교수님.”
“예, 상관없어요. 몇 가지 질문 좀 드려도 될까요?”
한여름이 다소곳하게 내 옆에 앉았다.
...이렇게 청하 교수와 한여름 둘이 나란히 있는 걸 보니, 진짜 자매 같아서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답할 수 있는 범위 내라면 괜찮습니다.”
“편하게 답해주시면 되어요. 이지아 생도, 신아리 생도를 구한 게 김무공 생도. 맞습니까?”
“부상을 입은 사람이 신아리 생도라면. 제가 그들을 구한 게 맞습니다.”
“어떻게 미리 알고 현장에 도착했는지 물어도 될까요?”
청하 교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근처에서 습격이 있을 거란 정보를 모종의 경로를 통해 확보했습니다. 정확한 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생각보단 순순히 납득했다.
좀 더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무림맹에서는 어디까지 파악했습니까?”
이번엔 내가 먼저 질문을 건넸다.
“천마신교에서 이미 상대의 정체에 대해 알려왔어요. 사교 세력인 ‘혈교’라는 집단이며 용의자의 신상은 혈귀단 살귀대주. 라고 해요.”
“역시 대주급이었군요.”
심문 전문가들답게 무흔마영이 사내의 신상을 파악한 모양이다. 내 예상과 거의 겹쳤다.
혈교의 체계는 상당히 복잡한 편이었다.
교주와 부교주, 십이사도가 가장 위에서 군림했고.
그 아래로 당급, 단급, 대급 순으로 낮아졌다.
게다가 혈뇌‘각’ 같이 단독적인 체계를 따르는 각급도 있었다.
대주급만 되어도 몇 개의 조를 이끄는 자리니 결코 낮지만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는 게 많은 위치도 아니겠지만.
딱 실무자 포지션이었다.
“혈교에 대해 아시나 봐요?”
“...쓰레기 같은 것들입니다. 수도권 연쇄 실종 사건과 무조건 관계가 있을 겁니다.”
“저희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긴 해요. 살귀대주란 자의 입을 좀 더 열어봐야 알겠지만요.”
청하 교수가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를 빤히 응시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죄송해요.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상관없습니다.”
“현장 사진을 봤어요. 아무리 봐도... 김무공 생도가 그런 참상을 벌였다곤 믿기질 않아서요.”
한여름이 갑자기 귀를 쫑긋 세웠다.
아무래도 청하 교수는 내게 무슨 협조자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듯했다.
“제가 한 게 맞습니다. 상대는 일종의 마약 과다복용 상태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익힌 무공으로는 그렇게 죽이지 않고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탓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괜찮으신가 해서요.”
그쪽이었나. 단순 의심보단 내 멘탈이 걱정된 모양이다.
“예, 괜찮습니다. 그런 쪽에 내성은 좀 강한 편이라.”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혹시 조금이라도 문제 생기면 알려주세요. 살인 후유증이라는 게 뒤늦게 밀려들 수도 있는 법이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좀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
청하 교수가 손가락으로 머리끝을 배배 꼬며 말했다.
생긴 것뿐만 아니라 어째 습관도 비슷하냐.
“개인적인 궁금증 말입니까?”
“네. 두 분은 연인이신가요?”
기다렸다는 듯이 청하 교수가 곧장 되물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니 묘한 부담감이 밀려왔다.
...이 처녀 교수님도 참, 사건 조사하러 와서 정작 이상한 곳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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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이라기보단 좀 더 복잡한 관계죠.”
“혼인?”
“아뇨, 그런 쪽은 아닙니다.”
“연인도 아니고 혼인을 한 사이도 아닌데 동거라. 역시 요즘 젊은 남녀는 개방적인가 보군요.”
감탄했다는 듯 청하 교수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할 거 다 한 사이니 개방적이라 해도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막상 저런 말을 한여름 닮은 여성의 입에서 들으니.
굉장히 미묘한 느낌이다.
말로 정확히 무어라 표현하긴 힘들지만.
게다가 ‘요즘 젊은 남녀’ 운운하기엔 청하 교수도 충분히 젊었다.
마치 소녀처럼 볼에 살짝 홍조를 띄우고 있는 걸 보니.
‘...귀엽다?’
내 취향도 참 일관적이구나.
묘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옆에서 한여름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뭘 그렇게 보냐?”
“딱히 안 봤는데?”
“그런 거로 하자.”
“진짜거든...!”
풋. 청하 교수가 우리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크흠, 아무튼 저흰 한두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사이입니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 정도일까요? 알겠어요.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화제를 돌렸다.
이대로라면 내 멘탈에 금이 갈 것 같다.
어쩌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청하 교수의 배려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아무리 봐도 저 표정은 소녀심 가득한 여자애의 그것이었다.
“예, 얼마든지요.”
“생도 신분으로 사람을 죽였는데, 상관없는 겁니까?”
게임이었다면 당연히 상관없겠지만, 룸카페에서도 느꼈듯이 이곳은 새로운 현실이다.
세세한 법령같이 ‘게임의 여백’ 부분은 나도 모르는 영역이다.
아직도 게임 인식이 박혀있는지 ‘당연히 괜찮겠지.’ 하고 미리 알아볼 생각도 못 했다.
“...무림인은 일반적인 법을 적용받지 않아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싶겠어요? 같은 무림인이 아닌 이상 사실상 제재가 불가능하다 보니 폭넓은 자율권을 보장받아요.”
“정당방위로 인정된다는 말입니까?”
“종합해봐야 알겠지만. 예, 아마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가장 크겠네요.”
일단 대충 게임과 비슷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이후에는 그냥 뻔한 질문이 이어졌다.
사정을 좀 더 물어보니, 애초에 수사를 위해 왔다기보단 생도 케어 느낌으로 온 모양이다.
그래서 교수인 자신이 방문한 것이라나.
“차후 몇몇 곳에서 더 방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김무공 생도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문밖을 나서는 청하 교수를 배웅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다 끝났어?”
“오냐.”
“근데 모종의 정보통이라는 게 뭐야?”
“파일 기능.”
“...응?”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제멋대로 업데이트되더라.”
“원래 그랬었나?”
“그럴 리가 있겠냐. 수집해야 하는데 좀 이상하더라. 글고 파일 기능은 과거 사건을 알려주라고 있는 건데.”
내가 봤던 건 분명한 미래였다.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시점 자체가 ‘과거’ 취급인 거 아닐까?”
의외로 예리한 말을 한여름이 건네왔다.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얘기였다.
“뭔 일로 니가 똑똑한 소리를 하고 그러냐.”
“나 원래 똑똑하거든.”
“퍽이나.”
“우씨, 혼나 볼래?”
“어허, 네 실력으로 가당키나 하겠느냐. 어떻게 혼내줄 건데?”
쾅-
한여름이 소파에 앉아있는 내게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격한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내 몸이 뒤로 넘어졌다.
근력에서 밀리다 보니 이렇게 무작정 달려들면 상대가 쉽지 않다.
“이렇게.”
아예 올라탄 수준이기에 마주한 얼굴 위로 기다란 머리칼이 드리워졌다.
“퉤퉷, 머리카락 입에 들어가잖냐.”
“시꺼. 자꾸 반항하면.”
“반항하면 어쩔.”
“잡아먹어 버릴 거야.”
한여름이 몸을 겹쳐오면서 이빨로 내 목덜미를 물었다. 생각보다 강하게 깨문 덕에 이빨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아프다. 피 나는 거 아냐?”
“아프라고 한 거임.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덕분에.”
양손으로 한여름의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겹쳐지며, 묘하게 편안한 느낌이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살을 맞댔다.
“그...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내 귓가에 대고 한여름이 입술을 달싹였다.
“신경 쓰고 있었냐.”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사람을 죽였다는데.”
“진짜 괜찮아. 나 정신계 특성 있어.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하다.”
등줄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쩐지. 묘하게 차분하다 했지.”
“차분한 건 내 원래 성격이고.”
“그것도 그래.”
“의외로 인정이 빠르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네. 우리 김무공 씨도 경박함만 버리면 참 좋을 텐데.”
얘는 잘 나가다가 꼭 이렇게 이니시를 걸어댄다.
“벅유.”
“또 문다?”
“잘못했음.”
여기서 더 자국이 남으면 교복 입어도 다 보일 게 분명했다.
“근데 우리 이제 뭐 해? 주말 아직 좀 남았잖아.”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