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31)

당장 누군가 더 올 것 같진 않았다.

나보다 핵심적인 용의자를 확보하고 있는 무흔마영 쪽이나 피해자인 이지아, 신아리 쪽이 더 중요할 테니까.

“...할래?”

“하긴 뭘 해.”

“시옷시옷.”

“세수?”

“세수는 지랄. 알면서 자꾸 모른 척할래?”

“진짜 모르겠는데.”

“자꾸 모른 척하면 확, 따먹어버릴 거야.”

“여자애가 말버릇이 그게 뭐냐 대체.”

따먹는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몰라, 섹스할 거야? 말 거야?”

“...하고 싶긴 한데.”

“그럼 벗어 빨리. 얘도 힘들다잖아.”

한여름이 치골 부근을 내 사타구니에 은근히 비벼댔다. 사실 내 그곳은 한참 전부터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어째 남녀 역할이 완벽하게 바뀐 느낌이다.

“이성적으로 지금은 하면 안 될 거 같다.”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은데, 여기선 좀 접어줄 필요도 있었다.

“여기서 이성각을 본다고? 뭐 따로 할 거 있어?”

“수련.”

섹스에 정력 다 쏟으면 수련은 언제 하겠냐 이 말이야. 안 그래도 어제 노느라 제대로 수련 안 했는데 말이다.

“나보다 수련이 더 중요해? 나 버리고 혼자 잘 먹고 잘살아라. 나쁜 놈.”

“아니? 버린다니 뭔 소리야. 너도 같이해야지. 얼른 준비나 하세요, 한여름 씨.”

“우씨.”

한여름이 입술을 댓발 내밀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처럼 고작 대주급이 아닌, 단주와 당주를 넘어 십이사도.

소교주와 교주까지 상대하려면 실력을 빠르게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물론 내가 전부 감당할 필요야 없겠지만.

미래란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개입함으로써 기존 역사와도 틀어졌을 게 확실해졌다.

대비란 언제나, 과한 게 모자란 것보단 낫다.

***

“그래서, 그 자가 누구라고?”

고풍스러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여성이 물었다.

옅은 분홍빛 머리칼 사이로 샛노란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카데미 1학년 생도, 김무공입니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조아렸다.

“흐응, 내 후배님이셨구나. 김무공. 알고 있지. 우리 후배님이 혈살귀 열둘에 적혈귀 하나, 살귀대주를 잡았고? 혼자?”

“정보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아하핫! 우리 혁리악 오라버니 화가 많이 나셨겠는데? 몇이나 죽였어?”

유쾌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여성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건....”

“왜? 내 질문이 우스워?”

여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사냥감을 앞에 둔 고양이같이 날카로운 동공을 보며, 사내가 머리를 바닥에 꽝 찍었다.

“아, 아닙니다! 시비 둘 정도로 끝났습니다!”

손을 덜덜 떨며 소리쳤다.

혁리악에 관해 함부로 말한 걸 들켰다간 그의 손에 죽는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당장 죽는다.

‘미친년.’

사내는 속으로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재수도 없지. 하필 저런 년을 만나서.

“내가 미친년 같아?”

여성이 팔짱을 끼고 풍만한 가슴을 끌어모으며 미소지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에이, 속마음이 여기까지 들리는데? 미친년. 돌아도 곱게 돌아야지. 힘만 있었어도 너 같은 년은 내 아래서 울부짖게 만들었을 텐데. 요즘 말로 뭐라더라? 인간 오나홀? 그런 거 생각했지?”

“저, 전혀 아닙니다! 제가 십삼사도님을 보고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품었겠습니까!”

흐응. 십삼사도라 불린 여성이 간드러진 비음을 흘렸다.

“괜찮아. 이해해. 나같이 아름다운 미녀를 보며 남자들이 무슨 상상을 하겠어? 다들 똑같지.”

“추호도 그런 망념을 품은 적 없습니다!”

“그럼 지금 내가 잘못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거야?”

“용서해 주십시오!”

사내가 머리를 땅에 쿵쿵 찍어댔다. 돌바닥에 피가 점점 번졌다.

“얘, 그러지 마. 그렇게 오버하면 내가 뭐가 되겠니. 그리고 나 미친년 맞아.”

“예?”

사내가 움찔하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지 화난다고 시비 쳐 죽이는 미친 새끼들 넘치는 곳에서 안 미치고 배기겠어? 나 이래 봬도 유서 깊은 정파 명문 출신이다? 제갈세가 모르는 사람 없잖아?”

“그, 그건.”

화난다고 날뛰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미친년아.

라는 말이 사내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야, 말은 바로 해야지. 난 죽인 적은 없어.”

“그, 그렇습니다. 관대하신 십삼사도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귀중히....”

“얜 또 뭐라는 거니. 혈리악 오라버니처럼 단숨에 죽이는 건 너무 관대하잖아. 목숨줄만 붙여놓고 두고두고 괴롭혀야지.”

사갈 같은 년이다. 외모가 아무리 예쁘면 뭐하나. 성격이 저 모양인데. 사내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그렇습니다. 혈교의 적에게 관대함을 보일 필요는 없는 법입니다.”

속마음과 별개로 사내의 입에선 청산유수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우리 혈구血狗는 차암 말을 잘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죄, 죄송합니다.”

“표정 풀어. 설마 내가 널 죽이기야 하겠니? 근데 다시 봐도 얘 좀 잘생겼네.”

“네?”

“너 자꾸 네? 하면 입을 찢어버리는 수가 있어. 성혈단聖血團에서 대체 뭘 배운 거니?”

“죄송합니다!”

여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살귀대주가 이끄는 것들을 혼자 잡을만한 애로 보이진 않는데 말야. 김용을 겨우 이긴 수준에선 불가능할 텐데. 뭘까? 뭘 숨기고 있는 걸까?”

“...마교 쪽일 수도 있습니다.”

“응, 내가 찾아가면 좋아해 줄까?”

“....”

“얘, 내가 지금 묻잖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십삼사도님 같은 미녀를 싫어하는 남성은 없는 법입니다.”

“흐응, 역시 그렇지? 정했어. 우리 후배님 얼굴 좀 보러 가야겠다.”

미소를 지으며 꽃단장을 하는 십삼사도를 보며.

비록 적이지만 같은 남성으로서, 김무공의 행운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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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 수습을 위해 소집된 아카데미 평의원회에서는 온갖 격론이 오갔다. 가장 큰 문제는, 하필 이때 총장인 독고패가 자리를 비웠다는 점이었다.

“총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의원 중 하나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적전신이라는 위명에 걸맞게, 노년의 나이임에도 독고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곳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번에도 북한 침식지대 공략을 지원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었다.

“한 시간 전쯤에 연락이 닿았습니다. 피해자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려줬으면 한다고 하십니다.”

독고패 총장 대신 회의를 주관한 장백검군 고승빈이 차분하게 답했다.

“총장님께서는 언제쯤 복귀하신다고 하셨죠?”

“오늘 저녁쯤에 이쪽에 도착하신다고 하십니다. 내일 수업이 있으시다고....”

“총장님께서 이번 1학년 생도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신가 봅니다. 직접 수업까지 맡을 정도면 말입니다.”

“예, 그렇지요. 아무래도 절세의 기재들이 한 번에 모였으니까요.”

천하연, 김무공, 한여름.

독고패와 마찬가지로 고승빈도 눈여겨보는 생도들이었다.

“묵수대 고문. 이지아 생도로부터 증언은 받았습니까?”

“예. 신아리 생도에 대한 선처를 간곡히 부탁하더군요.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청하 교수가 나서서 답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협박의 피해자라 하나, 처벌을 아예 안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소이다. 정파의 무인이 사교 무뢰배들의 협박 따위에 굴복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외다! 신아리 생도에게 본보기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있소!”

노년의 교수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 인과관계가 명확해진 이상 아예 처벌을 안 하는 것까진 무리겠지요. 다만 총장님의 말씀도 있으니, 총장 대리로서 신아리 생도에게 교내 봉사 100시간 명령으로 처벌을 끝내고자 합니다. 다들 동의하십니까?”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고승빈이 말을 꺼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의원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신아리에 관해 생각보다 관대한 처벌이 끝난 후, 평의원회는 그대로 파했다.

학생회장으로서 평의원회 의원으로 참석한 모용성이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회장님,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갸웃하며 뒤따랐다.

“내 실수다.”

묵수대를 내부 치안 유지로 돌려서 빈틈이 생겼다.

하루만 더 있었으면 철검대가 경계를 맡을 예정이었으니 큰 문제로 발전하진 않았겠지만.

혈교라는 정체불명의 적은 그 미세한 틈을 노려왔다.

“어쩔 수 없죠. 회장님이 신은 아니잖아요?”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모용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건 내 방심에서 비롯된 결과다.”

설마 아카데미 인근에서 그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어느 정도는 그리 생각했다.

“그래도 큰 사건으로 이어지진 않아서 다행이네요. 죽은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참사를 막은 게 김무공 생도라 했나?”

“그렇다네요? 1학년 생도가 무슨 재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용을 이긴 게 요행은 아니었나 봐요.”

탁. 잠시 제자리에서 멈춰 상념에 잠겨있던 모용성이 입을 열었다.

“만나봐야겠다.”

“저도 가도 될까요? 마침 저도 궁금했거든요. 우리 후배님이 어떤 사람인지.”

“그래. 같이 가지.”

모용성에게 보이지 않게, 베아트리체가 몸을 살짝 틀고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

“나 죽겠어. 근육통 때문에 팔이 안 올라가.”

한여름이 뾰로통한 말투로 눈을 흘겨댔다.

“수련이란 원래 고단한 것이다.”

“천하연 따라 해봐야 하나도 느낌 없거든.”

“얼른 가기나 합시다. 복귀 시간 늦겠다.”

어제 온종일 수련한 여파로, 결국 둘 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고 기절해버렸다. 숟가락 들 힘도 없었기에 당연히 섹스고 뭐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휴강이잖아.”

아카데미 근처에서 생도가 습격당해 중상을 입었는데 수업이 멀쩡하게 진행될 리는 없었다.

다만 수업은 수업이고, 규정상 기숙사 복귀는 예정대로 해야 했다.

“교내 봉사 하고 싶으면 늦게 오든가.”

“그건 싫음.”

한여름의 손을 붙잡고 빠른 걸음으로 기숙사 지역까지 도착했다.

“이따 점심때 보자.”

“웅냐.”

고층 빌딩에 가까운 기숙사 건물 앞 화단으로 다가가니, 익숙한 외형의 ‘남성’이 보였다.

천하연이 눈을 반개하고 차분하게 벤치에 앉아있었다.

“여기서 뭐 해?”

“그대 왔나?”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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