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31)

복귀 신고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천하연 근처에 왔다.

“고맙다. 네 덕에 살았다.”

“나야말로. 혈교에 대한 단초를 잡았으니 말이다. 혈교의 준동에 대해 의심하던 신교에서도 이번 일로 적극적인 대응을 시작할 것이야.”

“...그러냐.”

천마신교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킨다.

‘고작’ 하나의 사건이라 하기엔, 이번 일은 확실히 파급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신교 내부에서 정파와 어울리는 것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조금 있었구나.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됐지.”

“혈교라는 대적이 생겼으니?”

“그래. 혈교가 암약하는 한, 신교는 더 이상 분열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 덕이구나.”

천하연이 오연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까진 생각 안 했는데 말이지.”

코앞에서 벌어질 살인 사건을 막는다.

그야말로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된 일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말이다만.”

천하연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 머뭇머뭇하던 천하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뭔데?”

“...언제 한번 신교에 방문했으면 좋겠구나.”

“나?”

“당연히. 여기 그대 말고 누가 있긴 하나?”

묘하게 뾰로통한 말투로 천하연이 말했다.

“신교라면 제주도지?”

“그래.”

작금의 신교는 제주의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원래부터 제주에는 뚜렷한 무림 세력이 없었고, 다른 집단들도 굳이 육지에 신교가 상륙하는 것보단 제주 내에서 머무는 쪽을 선호했다.

덕분에 신교는 원만하게 제주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신교 가서 뭐 할 게 있나?”

“...교주님께서 그대에게 관심을 가지시더구나.”

교주.

그 단어를 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신교의 교주.

즉, ‘당대 천마’는 천하연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왜?”

“모르겠구나. 원래 사소한 일을 신경 쓰시는 성격은 아니신데 말이다.”

거의 모두가 무적전신 독고패를 천하제일인이라 말한다.

하지만 신교 사람들만큼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천마란 신교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당연히 신교 사람들에게 천하제일인은 독고패가 아닌 ‘천마’라는 존재였다.

“급한 건 아니지?”

“물론이다. 정 여유가 없으면 방학 때라도 괜찮구나. 시기는 그대가 정하면 된다.”

“알았어. 시간 나면 가지 뭐.”

신교 총단이야 게임에서도 몇 번 찾아가 본 적 있다.

물론 한라산 백록담 근처에 있는 천마궁은 구경도 못 해봤지만.

지킬 것만 지키면 천마신교는 딱히 무서울 게 없는 집단이었다.

***

“그래서, 천하연이 신교로 우리를 초대했엉?”

입안 가득 케이크를 집어넣고 우물거리며 한여름이 말했다.

“얌마, 다 먹고 말해. 다람쥐도 아니고.”

“그거 귀엽다는 뜻이징?”

“놉, 청설모 얘기한 거임. 귀엽긴 무슨.”

“난 청설모도 좋아. 귀엽잖앙.”

꿀꺽. 한여름이 크게 한입 삼키고 빨대로 커피를 쭉쭉 빨아댔다.

점심 이후 우리의 루트는 항상 근처에 있는 카페였다.

디저트는 꼭 먹어야 한다나.

“밥 그렇게 먹고 디저트가 들어가냐?”

“근육 회복하려면 많이 먹어야 해. 글고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 법이야.”

한여름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배 나온 거 좀 봐라.”

“안 나왔는데?”

나한테만 보이도록 한여름이 옷을 살짝 들췄다.

탄탄하면서도 새하얀 복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올, 김무공. 질투해?”

한여름이 입가를 가리고 배시시 웃어댔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하면 질투로 받아들이는 거냐.”

뇌가 청순하다는 게 이런 걸까.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누가 내 몸 봐도 괜찮아?”

“미친 소리는 작작하자.”

“질투하는 거 맞네. 걱정 마. 너 말고는 아무한테도 안 보여줄 거니까.”

왜인지 모르겠으나 자연스럽게 씰룩이는 입가를 억제했다.

“알았으니까 마저 먹기나 해.”

입가에 묻은 케이크 크림을 물티슈로 닦아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럴 때는 또 반항 없이 얌전하다.

한여름이 먹는 걸 구경하며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던 도중, 이질적인 남녀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머리 아래로 전부 새하얀 옷을 입고 허리춤에는 은빛 검을 패용한 남성.

다른 한 명은 눈에 확 띄는 연분홍빛 머리칼의 여성.

그들이 우리 쪽을 향해 곧장 다가왔다.

“김무공 생도, 맞나?”

남성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학생회장, 모용성이다.”

“난 부회장. 바토리 베아트리체.”

옆에서 여성이 슬쩍 끼어들었다.

“두 분이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차후 검성劍聖이라 불리는 모용성慕容星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베아트리체.

다만, 이 여성이 가물가물했다.

머리부터 이름까지 전부 이질적이라 봤으면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다.

모용성이 나와 한여름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연인인가?”

“대충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응?”

내 말에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상관없겠군. 좀 앉아도 되겠지?”

“예.”

내가 수락의 뜻을 표하자 모용성과 베아트리체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이렇게 모여앉으니 4인 테이블이 꽉 들어찬 느낌이다.

“청하 교수님께 들었다. 네가 사건을 해결했다고?”

“대충 그렇습니다만.”

“제안 하나 하지. 묵수대에 들어와라.”

다소 갑작스러운 제안을 모용성이 건넸다.

그리고 동시에, 모용성의 옆에서 요염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베아트리체가 누군지도 깨달았다.

바토리 베아트리체란 이름은 가명이다.

설마 외국인 가명을 쓰고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 못 했다.

이질적인 외모 때문에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그녀의 본래 이름은.

‘제갈혜.’

혈교 대란 시작을 알린 최악의 마녀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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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세가諸葛世家.

과거 중원을 호령했던 오대세가五大世家의 하나.

호북성湖北省 융중隆中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근골은 평범平凡하나 대대로 불범不凡한 두뇌를 타고났다.

제갈무후諸葛武侯의 후손들이라 자칭하나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기문진법奇門陣法과 역리易理, 토목기관지술土木機關之術에 능하다.

오대세가 중 게이트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받고 세가 구성원 전체가 뿔뿔이 흩어졌다.

현대 와서는 과거의 위대했던 흔적 일부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은...(중략)...

강호비록江湖祕錄 오대세가편 제갈세가.』

***

내가 왜 저 인물을 시야에 두고 있지 않았나.

첫 번째론 가명을 쓰고 있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고.

두 번째론 작은 비중 때문이다.

혈교 대란을 알린 최악의 마녀가 비중이 작다는 것도 이상한 얘기지만, 게임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혈마녀血魔女 제갈혜.

그녀는 혈살귀와 적혈귀 수백과 혈교의 정예를 이끌고 당문을 습격해 모조리 살육했다.

노인, 어린아이 가릴 것 없이.

문제는 그 이후였다.

피가 강처럼 흘러내리는 당문 폐허 한복판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제갈혜라고 알린 뒤 자진自盡했다.

그것도 습격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무림맹 사람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게임에서는 당연히 적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자료를 통해 스쳐 지나가듯 본 게 다였으니.

무슨 사정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혈마녀라는 별호도 당문 사건 이후에 붙은 것이었다.

“김무공 후배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도저히 그 혈마녀와 동일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베아트리체가 물어왔다.

어쩌면 그저 닮기만 한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

저런 외형을 가진 사람이 또 존재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아닙니다.”

“얘가 좀 얼빠라 그래요. 예쁜 여자만 보면 맨날 헤벌레하면서 눈 돌아가더라고요.”

한여름이 옆에서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예쁜 여자만 보면 눈 돌아간다고?

하늘에 맹세코 난 그런 적 없다.

“그러네요. 예쁜 여자 좋아하는 건 한여름 후배님 외모만 봐도 알겠어요.”

“감사해요, 선배님도 너무 아름다우셔요.”

아주 쌍으로 지랄을 한다.

입가를 가리고 가식적인 웃음으로 화답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참았다.

“음. 부회장? 잡설은 그만하지.”

참지 못한 모용성이 먼저 제지하고 나섰다.

역시 회장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우리 회장님은 차암 재미가 없으셔.”

“묵수대, 들어오겠나? 대답을 듣고 싶군.”

“글쎄요, 딱히 끌리는 제안은 아닙니다만.”

“역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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