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미친년이다.
방금 행위들로 베아트리체가 제갈혜일 가능성이 확연히 올라갔다.
바로 손을 뿌리쳤다.
“너무 갑작스럽습니다만. 제가 좀 보수적인 남자라.”
“나도 보수적인 여잔데? 내가 막, 개방적인 여자로 보였어?”
베아트리체가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입술을 샐쭉거렸다.
“아니라면 다짜고짜 이러시는 게 설명이 안 됩니다만.”
“김용, 이겼다며.”
“예.”
“소속 없지?”
“예.”
“이제 내 말이 이해가 갔으려나?”
연애를 빌미로 나를 천외천에 영입하겠다?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일까.
“싫습니다.”
“후배님 단호하네.”
“사랑도 없이 어떻게 사귑니까?”
당장 그 문제로 한여름이랑 사귀는 것도 고민하고 있는 판에,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혈마녀 후보와 사귈 리가.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요샌 사귀고 나서 생각해 보는 거야. 그런 말도 있잖아. 선 어쩌고 후 어쩌고.”
대충 선섹후사를 말하는듯했다.
유니콘 신공의 처녀 감별 능력이 고장 난 게 아닐까?
처음으로 유니콘 신공에 대한 강한 의심이 들었다.
선섹후사라니. 도저히 처녀 입에서 내뱉을만한 말은 아니었다.
“됐습니다. 얼굴 보기 민망하게 왜 그러십니까. 앞으로 학생회에서 자주 볼 사이인데.”
“민망? 전혀 아닌 것 같은데?”
확신을 담은 눈빛으로 베아트리체가 날 응시했다.
“됐고. 선배님이 진짜 보수적인 여성이면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십쇼.”
“이런 거 남자한테 처음 말해보는 건데, 너무 하네. 여심을 파멸적으로 흔들어놓고.”
쌍욕 마렵다. 파멸적으로 흔들긴 무슨.
“제게 선배님의 여심을 파멸적으로 흔들만한 포인트 같은 건 없습니다만.”
“있는데?”
“...?”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자 베이트리체가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얼굴. 내 취향이야.”
개소리도 좀 적당히 해야 받아주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쇼. 얼굴은 무슨. 차라리 오크나 고블린이 취향이라고 하지 그럽니까?”
“후배님 너무해. 날 그렇게 매도하다니.”
“안내는 끝났습니까? 더 할 말 없으면 가보겠습니다.”
“안 돼. 나랑 좀 더 놀자.”
침울한 표정으로 베아트리체가 내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싫습니다.”
단호하게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저거 다 연기고 수작질이다.
그걸 증명하듯, 베아트리체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조만간 또 보자. 번호 차단하진 말고.”
“안 합니다.”
부회장에 혈마녀 후보만 아니었어도 당장 차단했다.
***
떠나가는 김무공의 뒷모습을 보며 베아트리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김무공이 저 멀리 사라지자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남성이 베아트리체에게 다가왔다.
“흐응, 어떻게 생각해?”
남성을 인지한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학생회를 상징하는 배지가 남성의 다부진 가슴팍에서 빛났다.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나도 모르겠네.”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성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작해야 1학년 생도 아닙니까?”
“그치? 내가 저렇게 뒤흔들었는데도 별 반응이 없더라.”
“겉보기에는 완전히 말려든 것 같았습니다만.”
“전혀. 눈이 안 웃었잖아.”
만담처럼 가벼운 대화를 나눴지만, 베아트리체는 확신했다.
자신이 김무공을 떠봤듯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유혹했는데도 변화 하나 없는 심장 박동부터 시작해서, 냉철한 눈빛까지.
다소 가벼운 말투는 페이크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베아트리체의 예리한 감각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갖고 싶네.’
아까와 달리, 베아트리체는 김무공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남자들은 보통 뭘 좋아하지?”
“예?”
“너도 한 번만 더 예? 했다간 그냥 안 넘어갈 줄 알아. 총단에서 교육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람.”
“아, 알겠습니다.”
남성을 쳐다보며 베아트리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뭘 좋아할까?”
“미녀 아닐까요?”
“내가 미녀가 아니란 얘기야? 죽고 싶어?”
“아닙니다. 십삼사도님께서 진심을 내면 당연히 넘어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냐, 부족해. 그리고 아카데미에선 부회장님이라 불러. 진짜 수준 저하 심각하다. 기본적인 교육은 하고 보내야 할 거 아냐.”
베아트리체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이곳은 ‘무적전신 독고패’라는 거인의 영지와도 같았다.
행실 하나하나도 조심해야 할 판에, 방금과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꼬리가 잡힐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정자에 걸터앉아 발을 흔들면서 베아트리체는 생각했다.
일반적인 남성이라면 미인계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자신같이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 마다하는 남성은 ‘거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미인계 따위로 꺾을 수 없는 사내도 존재하는 법이었다.
“글고 보니 우리 혁리악 오라버니는 뭐래? 발정 난 개새끼처럼 여자나 덮치고 있을 테니 별생각 없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소교주님께 그런 언사는....”
“왜? 마음에 안 들면 꼰질러 보든가.”
베아트리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성을 쳐다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주인님은 오로지 십삼사도님 뿐입니다. 소교주님께서는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그래?”
사내가 곧바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고작 저런 말로 베아트리체를 처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끽해야 서로 언성 좀 높이는 선에서 끝나겠지.
반면, 일러바치는 순간 자신은 확실히 베아트리체의 손에 죽는다.
그 전에 주인을 배신한 개새끼라며 혁리악이 직접 쳐죽일 수도 있다.
혁리악의 폭압적인 성정은 그 누구도 예측을 불허했으니까.
막 나가는 것 같아도, 그녀는 이 모든 걸 계산한 거겠지.
사내는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숭이나 좀 더 부릴 걸 그랬나? 요새 남자들은 적극적인 거 좋아한대서 시도한 건데. 완전 실패해 버렸네. 역시 연애 소설이나 인터넷 팁 같은 건 참고할 게 못 돼.”
“동자공을 익혔다든지, 아예 고자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태양지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양기를 억제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설마. 강함으로만 따지면 의심 가긴 하는데, 아마 아닐 거야.”
김무공과 한여름.
태양과 월음.
‘그렇네.’
곰곰이 생각하던 베아트리체가 결론을 내렸다.
“대충 뭔지는 알겠다. 예로부터 어긋난 음양 균형을 맞추는 전통적인 방법이 있긴 했지. 후배님 보기보다 엉큼하네. 이미 알 거 다 알았다 이거지?”
베아트리체가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음양합일. 광적으로 정보를 수집해온 제갈세가에는 관련 내용도 존재했다.
요사스러운 기운을 내뿜는 베아트리체를 보며, 사내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넌 평소대로. 앞으로 연락은 자제하고.”
“...알겠습니다.”
베아트리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좋은 첫인상을 주는 덴 실패했지만, 아직 시간은 많았다.
자신의 정체를 김무공이 알 방법은 없었으니, 다시 평소처럼 정파의 규수인 척하면 그만이었다.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혈교血敎 십삼사도十三使徒.
제갈혜는 그리 생각했다.
***
뉘엿뉘엿 해가 지는 풍광을 뒤로하고 천천히 사잇길을 걸었다.
며칠 전부터 워낙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머리가 아팠다.
만일 내 예상대로 베아트리체가 제갈혜라면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게임 내에서 제갈혜에 대한 실상은 기이할 정도로 밝혀지지 않았다.
첫 등장이 마지막이라 그런지 몰라도.
혈교 대란의 시작을 알린 당문 혈사를 일으킨 주범으로서.
스쳐 지나가듯 잠시 비쳤던 게 전부였다.
왜 자진했는지, 굳이 당문을 노린 이유가 뭔지에 관한 내막은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게임이라면 어떻게든 미리 죽여놓았겠지.
하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확신도 없이 다짜고짜 처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혈교인이라 해서 아직 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들까지 미리 죽여야 하나.
혁리악처럼 확실한 놈이라면 모를까.
제갈혜는 게임의 ‘여백’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만약 내가 당문 혈사를 미리 막을 수 있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했다.
한동안 상념에 잠겨 산책하다 보니 어느새 기숙사 방앞이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방 테이블 쪽에 천하연이 다리를 꼰 채 앉아있었다.
언제나처럼 천하연은 이브닝드레스에 가까운 파격적인 잠옷을 입고, 책상의 무언가를 쳐다봤다.
나를 인지한 천하연이 기다란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대, 들어왔나.”
“뭐 마시고 있었어?”
“마시겠나?”
“좋지.”
적당히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천하연이 내 잔을 준비해놨다.
한 모금 마시자 입안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다만,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맛이었다.
“술 아니었어?”
“무인은 알콜을 멀리해야 하는 법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긴 한데.”
“고민이라도 있나?”
차분하게 나와 눈을 마주치며 천하연이 물어왔다.
“산 넘어 산? 그런 기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