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도 있다만.”
“...딱 한 잔만 마실게.”
“종류는?”
“상관없어.”
언제 들여놓은 건지는 몰라도, 부엌에 작은 와인셀러가 생겨나 있었다.
천하연이 와인셀러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비싼 거겠지?”
“모르겠구나. 술을 즐기진 않아서. 직접 산 건 아니야.”
그런 것치곤 매우 능숙하게 잔에 와인을 따라 내게 건넸다.
“나쁘진 않네.”
달달하면서도 씁쓸한 맛 뒤로 강한 오크향이 느껴졌다.
다만, 막대한 양기가 곧바로 해독시켜버리는지 알코올의 효과는 아예 없는듯했다.
“입맛에 맞았다면 다행이구나. 이번엔 또 무슨 고민인지 물어도 되겠나?”
천하연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저 표정만 봐도 묘하게 힐링 되는 느낌이다.
“그냥. 남의 목숨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죄를 저지른 게 확실하지도 않은데 미래의 가능성만 가지고 상대를 죽이는 게 맞나. 혈교라고 해서 전부 몰살시키는 게 맞나.”
“칼끝 위를 노니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구나.”
“너는 어땠는데?”
“신교는 적이 많지.”
천하연이 턱을 괴고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단순히 신교에 해가 될 가능성만으로 상대를 참한다면, 아마 세상 전부를 피로 물들이고도 모자라겠구나.”
나는 고갯짓으로 동의를 표했다.
확실히 천하연의 말대로 잠재적인 부분까지 감안하면 정파 또한 신교의 적이었으니까.
“그리하여 기준을 세웠다. 타락하여 되돌릴 수 없는 마인은 참斬한다. 죄를 지은 게 확실한 자들 역시 참한다. 이빨을 드러내고 짖는 것까진 괜찮다. 하지만 주제를 모르고 물어뜯으려 하는 순간, 참한다.”
오연한 태도로 천하연이 선언했다.
“단순 가능성에 대해선 조금 관대하게 생각한다?”
“인간의 목숨은 귀중한 것이니까. 가능성만으로 모두를 죽일 수야 없는 노릇이지.”
“힘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네.”
천하연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무인은 결국 무로 답할 수밖에 없는 종자들이지. 압도적인 무력이 있다면 고민은 확연히 줄어드는 법이구나. 그러니 그대가 가장 우선하여 신경 써야 할 일은.”
“수련이다?”
“정답이다.”
압도적인 무력이 있다면 애초에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천하연의 말대로 지금 시점에서는 부차적인 고민에 가까웠다.
베아트리체가 제갈혜인 게 확실하다 해도, 어차피 제대로 된 무력을 갖추기 전까진 건드리지 못하는 건 맞았으니까.
“근데 아까 보던 거 뭐야?”
“이번 주부터 ‘생존술’ 수업이라는 걸 한다더군. 그것에 관한 안내서구나.”
“굳이 1학년부터 생존술이 필요하나 싶은데 말이지.”
전공 필수에 떡하니 생존술이 박혀있을 때부터 신기하긴 했다.
“그대, 모르고 있었나?”
“뭔데?”
“아카데미 1학년 평가는 태평양의 무인도에서 이뤄진다더구나. 생존술 수업은 그를 위한 것이지.”
생각지도 못한 얘기가 천하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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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천하연의 일상은 언제나 이때부터 시작이다.
그녀라 해서 포근한 이불에서 벗어나는 게 좋을 리는 없었다.
그저, 신교의 소천마에 어울리는 자가 되어야 했으니까.
어린 시절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소천마로 발탁된 이후.
천하연을 지탱했던 건 오로지 의무감이었다.
지독한 수련도, 개인 시간 하나 없는 빡빡한 일상도, 그녀는 군소리 하나 없이 묵묵히 받아들였다.
천마가 될 자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삶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겠으나.
천하연은 자신의 삶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이런 세파에 초연한 듯한, 기계적인 삶에도 즐거움이란 있는 법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코앞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사내가 보인다.
괜한 심술이 들어 볼을 콕 찔러볼까 하다가, 이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거의 무릎까지 흘러내린 기다란 금발이 커튼 사이로 내리쬐는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레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어내렸다.
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베란다로 나와 창문을 열었다.
도심의 불야성이 밤하늘을 가렸음에도.
천하연의 눈동자에는 아름다운 별들이 비쳤다.
그 아래로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은 아카데미의 전경을 보고 있노라면.
이것도 나쁘진 않구나.
자연스레 그리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근처 의자에 앉아 반짝이는 별하늘을 보며, 비단 같은 머릿결을 빗어 내렸다.
고급스러운 향유까지 바르면서.
천변만화술을 사용한 남장은 과도할 정도로 탁월한 효과를 자랑했기에.
남들에게 보여줄 일은 거의 없었지만.
천하연은 자신의 고운 장발에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천천히.
서늘한 새벽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걸 즐기다 보면 어느새 달이 서쪽에 근접해있다.
“그대, 일어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어. 냄새 좋네. 머리 정돈해?”
조금은 피로한 목소리로 김무공이 물어왔다.
“긴 머리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서 말이다. 꾸준히 관리해야지.”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단발보단 훨씬 노력이 필요한 건 맞았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부스스한 모습의 김무공이 반대편에 앉았다.
“아으... 죽겄다.”
김무공이 녹아내리듯 탁자에 상반신을 엎드렸다.
“좀 더 자지 그러나. 수련도 쉬는 날인데.”
며칠 사이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은 김무공에게, 만 번 반복 같은 새벽 수련을 강요할 정도로 그녀는 모질지 못했다.
게다가 휴식도 엄연히 수련의 일부였으니까.
무흔마영에게 사건 현장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때, 천하연은 당장 달려가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그건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다.
사람을 고깃덩이처럼 분해하는 건 깔끔하게 죽이는 것보다 정신적 타격이 훨씬 크게 오는 법이다.
어쩌면 순수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인과 거리가 먼 김무공이 살인의 무거운 짐을 떠안을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기우였구나.’
다행히, 정신적 타격은 생각보다 적어 보였다.
물론 확신할 순 없다.
좋지 않은 기억은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와도 같았다.
평소에는 내면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가, 인간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그 틈을 노려온다.
“루틴은 지켜야지.”
김무공이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지키는 김에 수련도 하면 어떻겠나?”
“그건 좀. 가혹한데?”
“농담이다.”
“네가 말하면 전혀 농담 같지 않다니까.”
“들켰나. 반은 진심이었다.”
천하연의 입가에 걸린 웃음기를 보며, 김무공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 맞아?”
“글쎄다. 진실은 그대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지.”
“새벽 수련은 내일부터 할게.”
“좋은 각오구나.”
“오냐.”
무공을 익히는 것도.
별을 보며 머릿결을 정돈하는 것도.
김무공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역시, 인생이란 그리 무료한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새삼스럽다고 말하겠지만, 이 순간만큼 천하연은 그리 느꼈다.
***
“얌마, 내 발 밟았잖아.”
“쏘리, 근데 좀 밟을 수도 있지! 오늘 처음 하는데.”
“난 밟은 적 없음.”
“니 잘났네요. 확 그냥.”
“확 그냥 뭐?”
“으으...! 너 존나 얄밉다 진짜. 밟기만 해봐라.”
“헛된 희망은 버리거라. 아우여.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따스한 봄볕 아래서 김무공과 한여름이 투덕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오늘은 독고패 총장이 주관하는 수법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흡혈귀 사건’이라 명명된 이번 일은 생각보다 조용히 넘어갔다.
혈교가 관여된 게 확실해진 이상, 지나치게 일을 키우면 암중으로 숨어들 수도 있었으니까.
“저 둘은 언제나 힘이 넘치는군.”
“동의합니다.”
천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열심히 수련하는 걸 보며 천하연과 독고패 총장이 고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었다.
얼핏 보기엔 마치 의좋은 조손처럼 보였다.
독고패 총장이 고심 끝에 정한 수업 방향은.
김무공과 한여름의 합격진이었다.
건곤음양진乾坤陰陽陣.
막대한 음양의 기운을 체내에 품고 있는 둘에게 최적화된 진법을 독고패 총장은 가르쳤다.
합격진 특성상 서로의 신뢰와 합이 중요했는데, 이건 말로 얘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으니.
결국 호흡을 맞추다 보니 저렇게 투닥투닥 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미안하네. 고심해 봐도 내 자네에게는 딱히 가르칠 게 없더군. 이미 자신의 길을 걷는 자에게 어설픈 조언이란 독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니.”
독고패 총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천하제일인의 위명을 등에 업고 있다 하나, 결국 독고패는 평생 정파 무공만을 좇아온 인물이다.
당연히 마교의 무공을 익힌 천하연에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김무공과 한여름이 죽어라 수련하는 동안, 천하연은 독고패 총장과 편안하게 정자에 앉아 찻잔을 기울였다.
“괜찮습니다. 총장님과 대화 몇 마디 나눌 수 있을 정도면 족합니다.”
김무공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천하연이 빙긋 웃었다. 한동안 말없이 차만 홀짝이던 중.
퍼어어어엉-!
일순, 엄청난 기파와 함께 땅거죽이 뒤집혔다.
“미친, 너 내공 썼냐?”
비산하는 돌 부스러기와 흙먼지 사이로 김무공이 손을 휘휘 저었다.
“쪼, 쪼끔?”
당황한 얼굴의 한여름이 쭈뼛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나도 ‘쪼끔’ 씀.”
“근데 왜 나한테만 뭐라 해. 지도 썼으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한여름이 항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