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31)

“미안하다. 다친 덴 없냐?”

“야쓰. 옷 난리 난 거 빼면 괜찮아. 넌?”

“나도 괜찮아. 근데 이거 어쩌냐.”

단단한 연무장 바닥에 태극 모양의 균열이 질주하면서 사방이 박살 나버렸다.

한동안 보수가 필요할 정도로 처참한 꼴이었다.

“걱정하지 마시게. 무인이 무공을 익히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법이지.”

어느새 둘 근처로 다가온 독고패 총장이 껄껄 웃어댔다.

“죄송합니다. 호기심에 조금 쓴다는 게.”

“위력은 확실히 봤으니,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겠군. 그렇지 않나?”

허허로운 얼굴로 독고패 총장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닷.”

둘이 머리를 꾸뻑 숙였다.

‘내 생각보다 강한가.’

대지를 할퀸 깊은 상흔을 주시하며 독고패 총장은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둘의 대화를 들어보니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게 아닌데도 이 정도면.

제대로 합을 맞췄을 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독고패 총장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

‘기대되는구나.’

올해 생도들을 보고 있으면, 항상 품고 있던 미래에 대한 걱정이 한시름 가시는 느낌이었다.

독고패 총장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슬슬 때가 되었는가.’

속으로 작게 읊조리면서.

***

오늘부터는 몇몇 수업이 평가 대비를 위한 생존술로 대체되었다.

처음에는 굳이 이렇게 많은 시간을 생존술에 할애할 필요가 있나 하고 의심했지만.

수업 전에 태블릿으로 전송된 교범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 옆에 딱 붙어서 앉아있는 한여름은 더 심각했다.

태블릿을 보더니 눈동자가 핑그르르 돌아갔다.

“야, 살아있냐?”

“...내가 이거 다 할 수 있을까?”

“난 불가능에 한 표.”

“너무해.”

한여름이 입술을 샐쭉거렸다.

“걱정 마라. 내가 있잖냐.”

“따로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네? 옆 친구를 잘 만나길 빌어야 할 듯.”

“아, 몰라. 걍 무조건 너 따라갈래.”

“가능하면 좋겠다만.”

한숨을 푹 내쉬며 태블릿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책 한 권 분량은 가볍게 넘어 보이는 교범에는 게이트 내부를 포함한 온갖 장소에서의 생존 방법은 물론이고, 심리학 같은 부분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적갈색 베레모를 쓴 군복 남성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군인이야?”

한여름이 내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SART(항공구조사).”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한여름이 뭔가 생각난 듯 흠칫했다가 입술만 우물거렸다.

여기도 있을 줄은 몰랐다.

한때 나도 저들을 지망했었다.

훈련 중 동기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의한 부상 때문에 탈락하지만 않았어도 무난하게 됐겠지.

물론 그랬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겠지만.

종종 한여름에게 투덜거리며 하소연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라.”

“...웅냐.”

한여름이 내 손에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포갰다.

“필승. 안녕하십니까. 생도 여러분. 생존술 수업을 맡은 특수탐색구조대대 중사 전일환입니다.”

전일환 중사가 프레젠테이션하면서 자기소개를 계속했다.

“근데 군인분이 직접 수업이라니. 신기하다.”

한여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면을 쳐다봤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생존술 수업하는 데 저만한 전문가도 없긴 하지.”

일반 무인들이 생존술 같은 거에 관심 가지진 않으니까 보통.

“여러분은 차후 무인도에 들어가서 평가를 보게 될 겁니다. 제 역할은 생도 여러분들이 그곳에 가서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의외로 다들 진지하게 전일환 중사의 말을 들었다. 전통적인 클리셰에는 관군을 무시하는 무림인들, 이런 게 있는데.

‘하긴, 그럴 리 없지.’

여긴 현대다.

현대는 생각보다 엄청난 집단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이었고, 다짜고짜 그런 식으로....

“우린 일반인들하곤 다른데.”

무식하게 생각하는 놈이 하나 있었다.

김용이 교실 안에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있던 현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선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내공을 느끼고 다룰 수 있는 무인은 그냥 초인이랑 다를 게 없었으니까.

생각보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중사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미약하나마 무공을 익히고 있는 몸이니, 생도분들의 능력이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내공을 다루는 능력이 미약하여 군에 투신했습니다만, 게이트 내부나 지구의 오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입니다. 무인이라고 해서 물도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경지에 따라 일반인보다야 훨씬 길게 버티겠지만, 무인도 엄연한 인간이었다.

영원히 버티는 건 우화등선이라도 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여러분들 같은 귀중한 초인들이 사소한 생존술이 부족하여 어처구니없게 전투력을 상실하거나 사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생존술 수업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있을 무인도 평가를 하게 된 취지입니다.”

하긴.

아무것도 안 가르치고 다짜고짜 무인도에 데려다 놓은 뒤, 아무튼 살아남으세요! 하는 컨텐츠들이 꽤 많긴 했다.

여기도 그런 거 아닌가 했는데.

역시 쓸데없이 현실적인 세계다.

“딱딱한 이론 수업에 앞서, 여러분의 흥미를 끌만 한 것을 가져와 봤습니다.”

중사가 뒤에 있던 묵직한 배낭에서 하나하나 물품을 꺼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무인도 평가에서 기본적으로 지급될 생존키트 내용물들입니다.”

구급 약품이나 나이프, 개인 위생용품 등 일반적으로 흔히 보던 물건들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몬스터를 잡고 나온 ‘마석’이라는 막대한 에너지원을 이용한 독특한 물품들이 시선을 끌었다.

작은 크기임에도 마석 기반이라 엄청난 용량을 지닌 배터리라든지.

나와 달리 한여름은 다른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뭐 보냐?”

“으, 응?”

한여름이 보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거, 콘돔 맞아?”

내 귀에 대고 한여름이 작게 속삭였다.

“어, 맞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물품 사이에 당당히 껴있는 저건, 콘돔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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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진짜?”

한여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뭘 생각하는지 훤히 보인다야.

실상은 한여름의 핑크빛 망상과 전혀 다르다.

콘돔은 피임 외에도 여기저기 쓸 일이 많거든.

부피와 무게를 거의 차지하지 않으면서 임시 수통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전자기기 방수용이나 잘라서 고무 대용으로 쓰거나.

돋보기, 화장실 등등.

활용하려면 얼마든지 방법은 더 있으니까.

보통 생존 가방에 콘돔이 들어가 있는 케이스는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혈기왕성한 생도들이 사고 치는 걸 막기 위해서란 이유도 없진 않겠지만.

감시장치가 사방에 깔려있을 텐데 대놓고 관계를 할 만큼 간 큰 생도가 많을 것 같진 않았다.

“오냐. 확실해.”

무인들은 귀가 좋다.

특히 여기 입학할 수준의 생도들이면, 아무리 소곤소곤 말했어도 우리 대화를 전부 듣는 게 가능했다.

전음으로 말했으면 모를까, 한여름은 아직 전음을 익히지 못했다.

덕분에 힐긋거리는 시선이 콘돔으로 향했다.

“이게 궁금하십니까?”

전일환 중사가 대놓고 콘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풍선처럼 공기를 집어넣었다.

콘돔이 수십 배는 넘게 팽창하면서 빵빵해졌다.

다들 숨죽이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세계 무인들의 삶이 어떤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다 큰 성인들이 콘돔 하나에 초집중하고 있는 걸 보니 묘하게 실소가 나왔다.

“생존술에서 콘돔은 꽤 유용합니다. 피임 같은 당연한 용도는 물론이고, 임시 수통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생존에 있어서 물은 핵심입니다. 무인 분들은 훨씬 잘 버티겠지만, 공기 없이 3분, 온도 없이 3시간, 물 없이 3일, 식량 없이 3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물은 중요합니다. 이 정도면 몇 리터의 물도 거뜬히 담을 수 있습니다.”

내 예상대로 전일환 중사가 콘돔의 용도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뭐야, 그런 이유였구나.”

묘하게 실망한 목소리로 한여름이 속삭였다.

“그럼 뭘 생각했냐?”

“시꺼. 수업 중이잖아.”

한여름이 눈을 흘기며 나를 째려봤다.

콘돔을 시작으로 생존키트의 구성품을 얘기하고, 다음으로는 커리큘럼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응?”

프레젠테이션을 보며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전혀 예상 못 한 게 껴있었거든.

“여러분들은 생존술 수업과 함께 ‘고공강하’ 훈련을 받게 될 겁니다. 무인도 평가 시 여러분은 공중에서 투입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모 서바이벌 게임도 아니고.

유람선 타고 내려서 사이좋게 하하호호 살아남는 무인도 체험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군인이 수업을 담당한 이유가 이거였나.

“중사님. 질문 좀 해도 될까요?”

이지아가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럼 훈련 때 헬기나 수송기도 직접 타나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드높은 경지의 무인 분들은 아예 어검비행을 하거나 능공허도凌空虛道 등으로 공중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기도 합니다만. 문명의 이기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편리함이죠. 독고패 총장님도 어디 가실 땐 그냥 비행기 타십니다. 전용기지만요.”

전일환 중사가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답했다.

현대의 무림인들은 사실 전일환 중사의 말대로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원래 편함을 추구하는 건 인간 본능이거든.

효율 면에서도 힘을 아껴서 나쁠 건 없었다.

“실제로 침식 현장에서 무인 분들은 지상에서 이동하기보다 그냥 공중에서 뛰어내리는 걸 많이 선호하십니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굳이 낙하산조차 필요 없어지니까요. 물론 여러분들은 안전을 위해 낙하산을 이용해 투입될 겁니다. 나는 굳이 필요 없다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안전이 최우선이니만큼 따라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낙하산이 필요 없을 정도의 인물이라 해봐야 여기서도 한 명밖에 없다.

천하연.

내공을 이용해 낙하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어기충소御氣衝溯나, 진기를 발판 삼아 공중을 계단처럼 오르내릴 수 있는 천상제天上梯를 시전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거든.

아무리 슈퍼 루키들이라곤 하나 그래 봐야 갓 성인 된 애들이니까.

김용은 정파 무공 특성상 대기만성형이라 아직은 잠재력이 폭발하지 않았다.

“자, 그럼 지루한 이론 수업부터 시작해 봅시다.”

전일환 중사가 두꺼운 책을 펼쳤다.

“진짜 싫다....”

한여름이 책상에 엎드려 나를 쳐다봤다.

“일어나라. 공부해야지.”

머리를 쓰다듬다가 목덜미를 잡아 그대로 일으켜 세웠다.

벌써부터 잘 생각하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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