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냐.”
눈에 졸음이 가득한 게 보였다.
한동안 계속된 따분한 이론 수업이 끝난 후.
쿡쿡.
나는 한여름의 볼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결국, 한여름은 이론 수업의 지루함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얌마, 일어나. 수업 끝났다.”
“으에...?”
“으에는 무슨. 수업 끝났다고. 시험 때 어쩌려고 그러냐.”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랑말랑한 목덜미를 다시 한번 잡아 일으켰다.
꼭 무슨 고양이를 들어 올리는 느낌이다.
“망했다.”
“이제 알았냐?”
“담부터 깨워줘.”
“옆구리 찌른 것만 열 번은 넘는다.”
“...난 왜 이리 빡대가리일까.”
한여름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내뱉었다.
“빡통인 대신 강력한 힘을 얻었잖냐.”
퍽-
내 옆구리에 정확히 주먹이 박혀 들었다.
“아프다.”
“여자애한테 빡통이라 했으니 맞아도 싸. 강력한 힘 맛 좀 봐라.”
“니가 먼저 스스로 빡대가리라며.”
“보통 위로해줘야 하는 거 아냐? 빡대가리는 아냐라든지. 넌 여자에 대해 좀 더 알 필요가 있어.”
“내가 거짓말을 좀 못해서. 예전에 솔직한 게 내 장점이라며.”
“이씨....”
한여름이 씩씩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배고파. 밥이나 먹을래.”
“오냐. 뭐 먹고 싶냐?”
나도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고기. 스트레스받아서 피 맛 좀 봐야겠어.”
“무슨 혈교도 아니고 피 맛이 뭐냐 피 맛이.”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끔찍하니까.”
“미안하다. 실언이었네.”
하긴, 혈교는 농담거리로 삼기엔 너무 역겨운 존재들이긴 했다.
“후다닥 나갔다 오자. 아카데미 내부 식당 좀 질려.”
“외출 시간 되나?”
“충분해.”
안 그래도 맛있는 게 당기긴 했다.
얘랑은 이런 면에선 참 잘 맞는단 말이지.
***
아카데미 인근에는 의외로 고급 식당이 몰려 있었다.
일반적인 대학가와 차별화된 점이 그거였다.
무인들이란 사실상 귀족이랑 별다를 바 없거든.
당연히 돈을 쓰는 액수 자체가 일반인과 차원이 달랐다.
천하연이 내게 100억을 그냥 투척해버린 것처럼.
“여기 와서 가장 맘에 드는 건 먹는 거야.”
한여름이 행복한 표정으로 고기를 집어 들었다.
“생명의 위협 대가치곤 소소한 행복이네.”
“먹는 걸 소소하다 보긴 힘들지 않아?”
“그것도 그런가.”
질 좋은 숯불에 구운 소고기 한 점.
입안에서 느껴지는 눅진한 기름 맛과 육향의 고소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근데 나 자고 있을 때 무슨 얘기 했어?”
“어차피 이론은 그냥 알아서 책 보고 외우면 되니까. 좀 특별한 거라면 평가 과정?”
“과정? 수송기 타고 뛰어내린다며.”
“어. 오키나와까지 민항기 타고 갔다가 거기 미군기지에서 다시 군용 수송기 타고 태평양 쪽 무인도로 간다나?”
“여기서 한 번에 가는 건 아니구나.”
“그랬으면 지옥이었을 텐데 말이지.”
군용 수송기 탑승감은 빈말로라도 좋다곤 못 한다.
이 세계는 마석을 이용해서 수송기를 좀 더 대형화한 것 같지만, 그래 봐야 군용은 군용이지.
군용이 ‘좀 더’ 편해졌으면 민항기는 그냥 호텔이다.
“쫌 기대된다. 무인도 체험이라니.”
“기대하지 마라. 현실은 지옥이니까.”
“그래도, 뭔가 낭만적이잖아.”
“낭만은 무슨. 숨도 쉬기 힘든 뙤약볕 아래 손가락만 한 벌레들이 날아다닐 텐데.”
“넌 그렇게 꼭 남의 환상을 깨야 성이 풀려?”
한여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곧장 고기 한 점을 집어 한여름의 입가에 내밀었다.
우물우물.
새끼 새처럼 조용히 받아먹는다.
일련의 과정을 몇 번 반복해 주니 다시 표정이 풀렸다.
“잘만 준비하면 생각보단 괜찮을지도?”
“웅냐. 난 너만 믿어.”
“역시 안 되겠다.”
“뭔 소리야?”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로 떨어질 수도 있잖냐.”
“빨리 찾으면 되잖아.”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모르니까. 내가 핵심 부분만 따서 알려줄 테니까 외워라.”
“응.”
“글고 이거.”
품 안에서 목함 하나를 꺼내 한여름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혼원단. 네가 갖고 있어라.”
“영약이야?”
“오냐. 대충 효과는... 내공 한 갑자 증진에 최상급 요상단?”
“이걸 왜 나한테 줘? 니가 먹지.”
한여름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무인도 갈 때 혹시 모르니까. 위험한 일 있으면 먹으라고. 소지품 제한당하긴 할 텐데 아마 이 정도 휴대는 가능할 거다.”
당장 내가 먹을까 고민도 많이 해봤는데, 역시 최상급 요상단을 내공 늘려준다고 막무가내로 먹긴 너무 아까웠다.
사실상 목숨 하나 추가된 거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넌 어쩌게?”
“난 너처럼 바보가 아니라 생존술 교범 다 외울 수 있거든.”
“이거 절반 나누면 안 되나?”
“되긴 할 건데. 그럼 효과 많이 떨어질걸.”
“절반 나눠서 갖고 있자. 어차피 둘이 만났을 때 급하면 합치면 되잖아.”
“지아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는데 그건.”
종류에 따라 영약은 하나를 온전히 복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혼원단이 그런 종류면 괜히 나눴다가 약만 버릴 수도 있다.
“웅냐. 그럼 물어보고 괜찮으면 나누자.”
한여름이 다시 내 쪽으로 목함을 밀면서 말했다.
***
“괜찮아요. 대신 효과도 딱 절반.”
내 물음에 이지아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 고맙다.”
“뭘요. 한여름 씨와 나누시게요?”
“어. 쟤 공부는 완전 노답이라 불안해서. 무인도 가서 죽을 거 같으면 그거라도 먹어야겠지 않겠냐.”
“그런가요? 차분하게 잘 할 거 같은데 말이죠.”
“머리가 나쁜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냥 공부를 죽어도 안 하려 해. 책만 보면 눈이 감긴다나.”
“그런 분들 있죠.”
붉은 머리칼을 귀 뒤로 살짝 넘기며 이지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으아아아아아악!
- 아아아아악!
순간, 근처에서 비명과도 같은 괴성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우와아. 생각보다는 빡센가 본데요.”
“곧 우리 차롄데 넌 태평하다?”
“절벽에서 자주 뛰어내렸거든요. 높은 곳은 익숙해요.”
대체 혼원문이란 어떤 문파일까....
태연자약한 이지아를 보며 문득 의문이 일었다.
고공강하 훈련은 몇 가지 단계로 이뤄진다.
먼저 강하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동작 숙지와 장비를 다루는 훈련.
이건 재능이 탁월한 무인들이라 그런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다음으로는 모형탑 강하 훈련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거대한 탑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이었다.
“이, 이거 맞아?”
앞쪽에서 대기 중이던 한여름이 내 쪽으로 슬쩍 다가와 소매를 붙잡았다.
“원래 이런 훈련이 아닌데 말이지.”
내가 아는 ‘모형탑’은 이렇게 높지 않다.
끽해야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낀다는 높이인 11m 정도의 타워에서 줄을 타고 강하하는 게 모형탑 훈련인데.
대충 봐도 100m가 넘는다.
건물로 따지면 30층은 넘는 높이.
게다가 강하 속도 역시 미친 수준이다.
롤러코스터도 아니고 처음에 정신 나간 속도로 급가속하다 중간부터 다시 급감속.
무인이 아니었으면 내장이 전부 진탕될만한 짓거리였다.
분명 모종의 수를 쓴 게 분명하다.
어쩐지 아카데미 내부가 아니라 근처에 있는 제25특수임무비행단으로 우리를 데려올 때부터 이상하다 했다.
하긴, 무인에게 10m는 너무 낮긴 했지.
그래도 100m는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한여름 생도, 올라오세요.”
갑자기 한여름을 부르는 방송이 들려왔다.
“살려줘.”
한여름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미안하다. 잘 가라.”
단호하게 소매를 뿌리쳤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한여름이 터벅터벅 승강기에 탑승했다.
- 꺄아아악!
잠시 후.
마치 놀이기구 타는 것처럼 한여름의 새된 비명이 하늘 위쪽에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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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
신호에 맞춰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맹렬한 기류가 몸을 휘감는다.
강하 속도는 이내 시속 200km를 훌쩍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