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31)

아래로는 비행단 건물들이 점처럼 보였다.

귀를 때리는 굉음을 무시하고 고도계만 주시했다.

약 35000ft(10000m)부터 시작해서 30000ft, 25000ft....

빠르게 숫자가 줄어들었다.

‘지금.’

자유낙하를 시행하다 지정된 고도에 도달한 즉시 낙하산을 펼쳤다.

몸이 들썩이며 순간적인 압박감이 느껴졌다.

느긋하게 낙하산 기공을 조절해가며 목표 지점에 착지했다.

쿵-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막강한 충격이 일었지만, 내공을 미리 두르고 있었기에 별 느낌은 없었다.

일주일.

기구 강하부터 헬기, 이어서 수송기 강하.

마지막으로 지금 시행한 고고도 강하 저고도 산개까지.

생도들이 강하에 익숙해지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모형탑 훈련에서 비명을 질렀던 생도들조차 이젠 능숙하게 강하에 성공했다.

확실히 탁월한 재능을 지닌 무인들이라 그런지, 애초에 숙달되는 속도부터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무명無名’ 교수 덕에 안전 문제에서도 걱정이 없었다.

탁-

나 다음으로 착지한 천하연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넌 굳이 낙하산도 필요 없어 보인다?”

아무리 봐도 천하연에게 있어 낙하산은 그저 장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굳이 없어도 되긴 하겠구나.”

“역시 그랬냐.”

“그래도 편안한 게 나쁘진 않아. 자연지기를 이용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진 내공은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하는 법이니.”

“의외로 사고가 개방적이네.”

“무인이라고 산속에서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신교는 특히 현대 문물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편이지.”

천하연의 말대로였다.

제주에 자리 잡은 신교는 이미 그곳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묵인하에 제주의 지배자가 된 신교는 온라인으로 굿즈까지 팔아 재낄 정도로 현대 사회에 적응을 잘한 모양이다.

그런 면에선 아직 조금은 고루한 면이 있는 정파와도 차이가 있었다.

“재밌당.”

천하연과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공중에서 내려온 한여름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살짝 상기된 표정이 마치 롤러코스터라도 타고 온 듯했다.

“모형탑에서 비명 지를 땐 언제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랬던 거야. 알려주지도 않았잖아.”

“방심하진 마라.”

“웅냐. 당연히 조심은 하고 있지. 근데 어차피 저 교수님 있잖아.”

한여름이 뒷짐을 지고, 공중에 고고하게 떠 있는 무명 교수를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긴 하다만.”

“저분은 정체가 뭐야? 이름이 무명은 아닐 거 아냐. 소개도 제대로 안 해주고.”

“...글쎄.”

다 헤진 도포를 입은 노년의 교수. 움직임을 보니 대충 짐작 가는 부분이 있어 천하연에게 물었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맞지?”

“그래. 아마... 멸문한 곤륜의 몇 안 되는 생존자겠구나.”

신강의 천산에 위치했던 천마신교를 막는 수문장.

그것이 곤륜파였으나,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고 한국으로 후퇴했던 천마신교와 다르게 곤륜은 대부분 인원이 본산을 지키다 옥쇄했다.

위대했던 과거의 경쟁자가 처참히 몰락한 꼴은 천하연 입장에서도 그리 달갑진 않은지, 미소에서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죄인처럼 묵묵히 저러고 있는 걸 보면 그리 좋은 사정 같지는 않았다.

***

“여기 맞아?”

한여름이 내 팔목을 붙잡고 고개를 갸웃했다.

“맞어.”

“보통 학생회 대면식을 이런 곳에서 해?”

“그럴 리가 있겠냐.”

제25특수임무비행단에서의 강하 훈련이 끝난 직후, 곧바로 아카데미에 돌아가는 게 아니라 다른 장소를 찾았다.

오늘은 학생회 임원들이 모이는 대면식이 있는 날이었다.

적당히 술집에 모여서 인사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바 하나를 임대했다.

덕분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딱 봐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바였다.

“스케일이 남다르네. 이거 생도들 돈으로 하는 거 아냐?”

“아마 따로 지원이 들어왔을 거다. 학생회비 마음대로 유용하면 난리 나거든.”

“지원? 어디서?”

“동문이나 무림맹. 아니면 학생회장 사비일 수도 있고. 들어가자.”

“웅냐.”

한여름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내 뒤를 졸졸 따랐다.

“김무공님, 한여름님. 확인됐습니다.”

입구에서 말끔한 정장의 남자 바텐더가 우리 신분을 확인한 뒤 내부로 안내했다.

“오...!”

옆에서 한여름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어둑어둑한 조명이 감도는 내부에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무거운 분위기의 전형적인 클래식 바였다.

“이런 곳 처음 와봐.”

“술을 안 좋아하니 그렇지.”

“쓴맛만 나는 걸 다들 왜 환장하면서 먹는지 모르게써.”

“칵테일 종류는 달달한 것도 많아.”

“나 좀 데려가지. 혼자 갔어?”

“전에 나가기 귀찮다며.”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성인 된 기념으로 내가 가자 해도 귀찮다며 거절해놓고, 이제 와서 뾰로통한 표정으로 저러는 걸 보니 상당히 꿀밤 마려웠다.

“이런 곳인 줄은 몰랐지. 난 막 시끄러운 클럽 같은 곳인 줄.”

“바가 한두 군데도 아니고. 인터넷 찾으면 다 나온다.”

“귀찮잖아.”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더니 어느새 바텐더가 우리를 좌석까지 안내했다.

“어서 와라.”

가장 먼저 테이블에 근엄한 자세로 앉아있는 모용성이 인사했다.

상석에 앉은 모용성을 중심으로 기다란 테이블에는 좌우로 처음 보는 인물들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수업이 늦게 끝나 좀 늦었습니다.”

한여름과 같이 인사를 하고, 비어있는 곳에 가서 앉았다.

각자의 앞에는 위스키가 담긴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우리 둘만 1학년이라 그런지, 힐긋힐긋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후배님, 안녕.”

귀신같이 내 근처에 앉은 베아트리체가 손을 흔들었다.

작게 고개만 끄덕이면서 응대했다.

처음 만남 이후, 베아트리체는 착실한 선배처럼 행동했기에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참석해 줘서 고맙다. 새 학기를 맞아 처음 맞이하는 모임이니만큼, 편하게 즐겨줬으면 좋겠군. 베아트리체.”

모용성이 베아트리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아트리체가 좌중을 한번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군지 모르는 분들은 없겠지만. 부학생회장 베아트리체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학생회 멤버가 있으니 한 분씩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학생회장 오른쪽부터 시작해서 한 명씩 일어나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3학년 대표 진산호.

2학년 대표 패소군.

묵수대주 철무진.

총무를 맡은 개방 후개後丐 최나은 등.

굵직한 거물들이 꽤 많았다.

한여름과 나까지 가볍게 소개를 마친 후, 가만히 듣고 있던 모용성이 위스키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기義氣!”

그리곤 건배하듯 잔을 들고 외쳤다.

“천추千秋!”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모용성의 건배사에 다들 자연스럽게 큰 소리로 화답했다.

“백도白道!”

“천하天下!”

“무림맹을 위하여!”

“위하여!”

한여름을 제외하곤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켰다.

얘는 맹한 표정으로 위스키 잔만 들고 어버버하고 있었다.

한 덩치 하는 무인들이 잔을 들고 저러고 있으니, 무슨 폭력 조직 모임을 방불케 했다.

...아니, 폭력 조직은 맞나?

따지고 보면 게이트 사태 이전까지 무림인은 어둠 속에서 활동하던 강력한 조직폭력배랑 하등 다를 게 없었으니까.

“얌마, 정신 차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한여름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내가 상상하던 학생회 이미지는 좀 더....”

“좀 더?”

“귀염뽀짝했는데.”

한여름이 조심히 위스키 잔을 들고 홀짝였다.

그런 우리 옆으로 모용성이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마음껏 시켜도 된다. 오늘은 너희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시키겠습니다.”

“내 사비로 사는 거니 얼마든지. 우리 모용세가는 돈이 많다. 그리고 내기로 주독 몰아내는 건 금지다.”

모용성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농담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전혀 농담 같지가 않았다.

“후배님들. 한잔할래?”

모용성이 떠난 이후 은근슬쩍 베아트리체가 술을 들고 내 옆에 딱 붙었다.

“선배님. 너무 가깝습니다.”

바로 엉덩이를 움직여 거리를 벌렸다.

“술 따르려면 어쩔 수 없잖아. 자, 한여름 후배님부터. 내기로 몰아내는 건 금지야. 알겠지?”

콸콸콸- 베아트리체가 한여름의 잔에 위스키를 무슨 맥주처럼 가득 담았다.

“서, 선배님?”

한여름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자, 쭈욱- 설마 내 호의를 거절하진 않겠지?”

“먹기 싫음 먹지 마.”

어디서 술 강요를 하려고.

곧바로 차단하고 한여름의 잔을 뺏어 내가 들이켜버렸다.

매콤하면서도 강렬한 피트향이 코를 찔렀다.

추정 도수 60도 이상.

아무리 무인이라지만 이런 걸 단번에 마시라고 준 것부터 정상이 아니다.

“후배님. 자기 여자라고 그러는 거야? 멋있는데?”

“잠깐, 김무공. 나랑 자리 바꿔. 너무 붙었잖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한여름이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래. 주는 대로 받아먹진 말고. 적당히 마셔.”

“웅냐.”

***

“으하하하! 자네가 빌어먹을 범죄자 놈들을 막아줘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우리 묵수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뻔했다네!”

한여름을 베아트리체 상대로 맡겨 놓고, 나는 여기저기 인사를 하러 다녔다.

지금 내 등을 솥뚜껑 같은 주먹으로 퍽퍽 두들기면서 호탕하게 웃는 사람이 묵수대주 철무진이었다.

“아닙니다.”

“묵수대 들어올 생각 없나? 자랑은 아니지만, 묵수대 출신이라면 졸업 후 무림맹 타격단에 들어가기도 쉽다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쉽군. 묵수대 규율 때문에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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