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31)

철무린이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말했다.

“예. 아직은 어디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묵수대는 철저한 상명하복이 기반인 군대와도 같은 조직이었다.

다소 프리한 학생회와 비교하면 묵수대에 들어가는 순간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진다.

아직 거기까지 바라진 않았다.

“흠, 비교적 자유로운 특임조도 있으니 한 번 생각해 보게나.”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철무진과 잔을 나눴다.

“김무공, 이 나쁜 새끼...!”

갑자기 베아트리체 쪽에서 다 들리도록 한여름이 소리쳤다.

“우리 아리따운 후배가 많이 취한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철무인이 껄껄 웃으면서 손짓했다.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뿐 놈...!”

다시 한번, 한여름의 혀 꼬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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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님, 잔 비었는데. 더 먹을 거야?”

“네.”

베아트리체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면서 한여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리가 자리라 그런지, 오늘따라 독한 술이 물처럼 느껴지는 한여름이었다.

덕분에 베아트리체가 주는 술을 족족 마셔댔다.

“김무공 후배님이랑 무슨 사이야?”

“그게 왜 궁금한데여?”

“둘이 딱 붙어 다니길래 그렇지. 말은 안 해도 다들 궁금해할걸?”

“모르게써요.”

“연인 아냐? 난 당연히 연인인 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몰랐다는 듯이, 베아트리체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나쁜 새끼.”

살짝 상기된 얼굴로 한여름이 새초롬하게 눈을 흘겨댔다.

“김무공 후배님을 좋아하나 보네?”

“몰라요.”

벌컥.

한여름이 독한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푸우- 짙은 숨결이 한여름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네? 지, 진도요...?”

“애매하면 요샌 그냥 덮쳐보라던데? 인터넷에서 봤어.”

“인터넷 말 믿을 게 못 되네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여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맞는 말이야.”

베아트리체도 그 점은 동의했다.

“쟤가 진짜 나쁜 게 뭔지 알아여?”

한여름이 얼굴을 붉히며 김무공 쪽을 쳐다봤다.

“뭔데뭔데?”

베아트리체가 눈을 빛내며 양손을 턱에 받쳤다.

“쓸데없이 착해. 내가 온갖 지랄 해도 받아주니까.”

“그런 거였구나?”

“자꾸 기대하게 만들잖아여. 나쁜 새끼. 바보. 멍청이.”

“김무공 후배님도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거 같던데?”

“그른가? 개새끼. 확실하게 좀 말해주지. 아직도 날 애로 보는 거 같아여.”

한여름이 머리를 갸웃하며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이렇게 성숙한 후배님을 보고?”

“푸하... 이번에도 그래요. 나보고 마아냥 기다리라 하면서. 나도 도와줄 수 있는데.”

“한여름 후배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나 보네. 후배님이 사람 죽이는 건 싫은 거겠지.”

‘이번’이라면 혈교가 관련된 사건이다.

입가에 걸린 미소와 반대로, 베아트리체의 노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헤헤... 그른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여름이 헤실헤실 웃어댔다.

‘약점이네.’

얼핏 짐작하긴 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김무공의 확실한 약점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단순한 음양합일 파트너를 넘어, 깊은 유대관계가 둘에게는 존재했다.

오히려 평범한 연인보다 더 끈끈해 보일 정도로.

베아트리체가 느끼기엔 그랬다.

김무공을 힐긋 보며 생각했다.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면서도 그의 시선 한구석에는 한여름이 존재했다.

‘쉽지 않겠는걸.’

다만 약점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혈교의 적’ 김무공을 가정했을 때 얘기고.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베아트리체로선, 한여름은 견고한 강철 벽이나 다름없었다.

“자자, 한잔 시원하게 들이켜고 털어버려.”

베아트리체가 빈 잔에 술을 다시 따르며 말했다.

“김무공, 이 나쁜 새끼...!”

쾅. 유리잔을 거세게 내려놓으며 한여름이 소리쳤다.

일순 사위가 고요해지며 이쪽으로 시선이 몰렸다.

“후배님, 진정해.”

“나뿐 놈...!”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작게.

한여름이 혀 꼬인 소리로 내뱉었다.

물론 여기 모인 학생회 임원 중에 그걸 못 들을 정도로 경지가 낮은 사람은 없었다.

“얌마,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곧바로 김무공이 다가와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니가 잘못했잖아.”

한여름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홱 돌렸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얘 좀 데려갈게요.”

“예, 말릴 새도 없이 연거푸 들이키더라고요.”

베아트리체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술도 잘 안 먹는 애가... 얌마, 얼른 일어나.”

한여름의 팔짱을 끼고 김무공이 밖으로 나갔다.

“흠, 적당히 좀 먹이지 그랬나.”

베아트리체의 옆으로 다가온 모용성이 힐난하듯 말했다.

“그치만 후배님 반응이 너무 귀여운걸요.”

“...다음부턴 취하기 전에 내기로 주독 몰아내라 해야겠군. 괜히 금지라 했어.”

“에이, 돈 아깝게 왜 그러세요. 회장님도 한잔하실래요?”

“됐다. 모임을 주관하는 자가 취해서는 안 될 일이지.”

모용성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로 거절을 표했다.

“칫, 역시 회장님은 재미가 없으셔.”

“재미 같은 게 무슨 필요가 있겠나. 부회장은 부회장답게 일이나 잘 하도록.”

“예, 분부 받들지요.”

베아트리체가 미간을 찡그리며 대충 대답했다.

***

비틀거리는 한여름을 데리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왔다.

옥상에 마련된 쉼터에 앉아 한여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 아래로, 가로등보다 연한 불빛이 사방에 가득했다.

어쩐지 직원이 우리 모습을 보며 굳이 옥상으로 가보라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위험하게 취한 애 데리고 무슨 옥상이야 했더니, 루프탑 카페 느낌으로 꾸며진 장소였다.

한여름이 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술을 우물거렸다.

“할 말 있냐?”

“나뿐 놈...!”

“아까부터 왜 그러냐 대체.”

“이쁜 여자만 보면 헤벌레 해서.”

“그런 적 없다.”

“내 아다 가져갔으면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한여름이 머리로 내 가슴을 툭툭 쳐댔다.

“얌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몰라. 들으라지.”

“너 술 깨면 백퍼 후회한다.”

“...안 깰 건데.”

“내공으로 몰아내라 얼른. 모임인데 민폐잖냐.”

“싫어. 이렇게 둘만 있을 수 있잖아.”

맹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술기운 때문에 혈색이 좋아서인지.

오늘따라 묘하게 예뻐 보였다.

나까지 취했나 해서 내면을 관조해봤지만, 역시 태양지체와 천마신공은 고작 알코올이 몸을 잠식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들어오는 족족 자동으로 분해하고 태워버렸다.

“저기로 가자.”

한여름이 내 손을 붙잡고 기다란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버렸다.

한동안 편안하게 누워있던 한여름이 입을 열었다.

“너 알고 있지.”

“뭘?”

기다란 머리카락에 가려 한여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많이 취했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 대신 한여름의 머리카락만 찬찬히 쓰다듬었다.

바보도 아니고, 행동 하나하나에서 티가 나는데 모를 수가 없다.

다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내가 이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대답은 그때까지 미뤄놓도록 하자.

“나중에.”

“너 진짜... 나쁜 놈이야....”

만취한 상태로 누워있으니 졸음이 밀려오는지, 한여름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미안하다.”

“맨날 미안하다고만 하고... 이... 나쁜....”

작게 중얼거리던 한여름의 말이 툭 끊기고, 이내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무릎 위에서 들려왔다.

***

다음 날.

“나, 어제 뭔 짓 했어? 실수했나?”

한여름이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한여름은 결국 모임이 파할 때까지 내 무릎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당연히 오늘 새벽 수련도 불참.

이렇게 수업 시작 전에 미리 만났지만, 어제 기억이 깡그리 날아가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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