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31)

어쩌면 나로선 다행이라 볼 수 있었다.

“아니. 부회장이랑 열심히 술 마시더니 그냥 잠들었어.”

“진짜지?”

한여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그러게 누가 술 그렇게 마시래.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시면 어쩌냐.”

“아니, 내가 왜 그랬지? 나 진짜 안 마시려 했단 말야.”

“다음부턴 그냥 이상하다 싶으면 진기 돌려버려.”

“그래야겠다. 아, 머리 존나 아파....”

“아직 수업 시작 전이니 운기조식이라도 좀 해라. 호법 서줄게.”

“웅냐.”

한여름과 같이 근처 정자로 가 앉았다.

이윽고 잠깐의 운기조식으로 주독을 몰아낸 한여름이 쌩쌩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괜찮냐?”

“야쓰. 운기브런치 효과 확실하네.”

“그럼 수업 가자. 이거 마셔라.”

“역시 김무공, 센스 있어.”

미리 준비한 수분 보충용 음료를 건네면서 교실로 향했다.

오늘 수업은 ‘침식지대 실습 사전 설명’ 수업이었다.

무인도 평가 전, 생도들은 한 단계의 실습을 더 거치게 되어있었다.

침식지대 실습.

정확히 최전선의 침식지대를 가는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막아놓은 훈련용 지역이었지만.

그래도 침식지대는 침식지대.

절대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수업 주관 교수는 둘.

청하 교수와 무명 교수였다.

무명 교수는 여느 때처럼 말없이 뒤쪽에서 우리를 지그시 응시했다.

당연히 설명은 청하 교수의 몫으로 넘어갔다.

“이번에 실습 갈 곳은 개성 인근의 봉쇄지역입니다. 원래라면 완전히 수복해야겠지만, 생도들의 훈련을 위해 일부 봉쇄하여 남겨놓은 지역이지요.”

청하 교수가 스크린에 개성 봉쇄지역을 띄우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뒤를 봐주던 중국도 붕괴한 마당에, 이 세계의 북한이라고 멀쩡할 리는 없었다.

중국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붕괴하여 마굴이 된 북한 지역은 무인들의 지원을 받아 차근차근 수복 중이었다.

덕분에 지금 와선 평양 인근까지 전선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개성이면 당연히 최전선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 지역은 주기적으로 군대가 소탕을 벌이는 곳입니다. 여러분들은 군대와 함께 지역별 소탕 작전에 참여하게 될 거예요.”

무인에게 무인의 역할이 있듯이, 군에겐 군의 역할이 있는 법이다.

탁월한 재능을 지닌 무인의 수는 언제나 부족했으니까.

낮은 등급의 괴물들은 일일이 무인이 처리하기엔 수가 너무 많았다.

나름 흥미롭게 수업을 듣던 도중.

익숙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또냐.’

이젠 반가울 지경이다.

상태창을 열자 역시나 파일 하나가 새로 떠올랐다.

『순찰일지

X월 XX일 PM 22:00

보고자 : ■■■■

개성 봉쇄지역 하수도에서 R구역 담당 병사가 실종됐다는 제보를 받고 내부를 수색.

하수도 내부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함.

구조 요청 또한 받지 못함.

특이사항 – 제보자가 자살한 채로 발견됨.』

...하여간.

곱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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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서문 근처 종각 위.

천하제일인이란 위대한 이름을 등에 이고 있는 독고패가 허허롭게 뒷짐을 진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곳에선 강남 일대를 비롯한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게이트 사태가 터진 이후 대한민국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100층 이상 고층 건물이 흔하게 보일 정도로.

과거 대한민국의 랜드마크였던 잠실 타워가 이제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오셨는가.”

나직한 목소리로 독고패가 말했다.

무늬조차 없는 칠흑의 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독고패 옆에 나란히 섰다.

신선과도 같은 독고패와 정반대로, 사내는 마치 서울 전체를 찍어누르는 듯한 패도적인 기파를 은연중에 내뿜었다.

“오랜만이오.”

사내가 무덤덤하게 입술을 뗐다.

독고패 옆으로 거침없이 다가와 이렇게 설 수 있는 인물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중년인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천마天魔 천위강.

사내에게는 굳이 여러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

천마라는 단어 하나면 족했으니.

마도의 지배자이자 천마신교의 주인이 홀로 정파 진영의 한복판에 왔음에도, 독고패의 대응은 차분했다.

마치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

묵묵히 서울의 전경을 응시하던 독고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올해를 끝으로, 은퇴할까 하네.”

“무슨. 아직 안 되오. 삼 년은 더 있다 가시오.”

천위강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 딸 때문에 그러는가?”

“내가 그런 사사로운 정에 얽매일 사람으로 보이시오?”

“하긴, 자네가 그럴 리는 없겠지. 이유는?”

“갈 땐 가더라도, 내부 정리는 확실히 끝내놓고 가시오.”

무슨 말인지는 독고패도 알고 있었다.

“혈교 때문인가?”

“위험한 것들이외다. 솎아내고 솎아내도 끝이 없소. 총단은 그나마 낫지만, 해외지부는 아예 잠식당한 곳도 많더군. 무림맹이 그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다고 보오?”

“후대의 일은 후대들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는 직접 나서는 걸 선호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백도白道의 원로로서 쉬이 움직일 수 없다네.”

“그놈의 명분, 체면.”

눈썹을 치켜세우며 천위강이 말했다.

혈교는 마치 암 덩어리와도 같았다.

온갖 사이한 대법을 통해 인간의 이지를 어그러트리고, 틈을 노려 자신의 세력을 집어넣는다.

정신 차려보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잠식당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파처럼 하나하나 명분 찾다간 늦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쯤 되면 이미 파악했겠지만. 내가 전성기를 유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5년 전에 입은 부상이 날 좀먹고 있어.”

독고패가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십 년은 거뜬해 보이는데 뭘 그러시오.”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은퇴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놈의 중원에 대한 집착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셨소? 시대가 변했소이다. 글로벌하게 좀 사시오. 다 망가진 땅에 왜 그리 집착하는 것이오.”

독고패가 침중한 눈빛으로 지평선 너머를 쳐다봤다.

“망념이지. 망념이야. 허나,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는 법이라네. 자네 같은 마도魔道의 실용주의자들은 혐오하면서 이해 못 하겠지만. 그것이 우리인 걸 어쩌겠는가.”

“쯧, 고루하긴.”

천위강이 혀를 차며 말했다.

다만, 독고패의 말에서 한 가지 틀린 점이 있었다.

백도의 저런 우직함을 천위강은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가는 길이 다르다 하나, 무를 걷는 자로서 충분히 존중했다.

물론 전혀 내색하진 않았지만.

“삼 년이라. 확실히 자네의 말도 일리는 있군. 내가 한국을 장기간 떠나면 그간 숨죽이던 악귀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삼 년 후에 같이 가드리겠소.”

시선을 피하며 천위강이 툭 내뱉었다.

“자네가 말인가?”

독고패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이건 그로서도 전혀 예상 못 했던 말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천위강이 돕는다면, 그 누구의 지원보다도 든든했다.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하연이는 객관적으로 봐도 절세의 기재요. 게다가 이번 세대는 하연이보다 못하다고 하나, 다른 세대였다면 충분히 천하제일을 노릴만한 기린아들이 한둘이 아니더군.”

“삼 년이면 무슨 일이 생겨도 그들이 충분히 대처할 만큼 성장할 거다?”

“그렇소. 그러니까 올해 은퇴 같은 헛소리. 다시는 꺼내지도 마시오.”

“...자네 말이 옳은 것 같네.”

이 나이 먹고도 성급한 기질이 사라지질 않는다.

쓴웃음을 지으며 독고패는 고개를 끄덕였다.

***

침식지대 실습을 위해 제25특수임무비행단에 도착했다.

이곳도 이젠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생도임이 확인되니 라인(활주로 지역)까지 프리패스로 통과가 가능했다.

집합 장소는 라인 안에 있는 거대한 격납고 중 하나였다.

내부는 이미 도착한 다른 생도들로 바글바글했다.

“우리 다른 조네.”

격납고에 임시로 설치된 스크린을 보며 한여름이 중얼거렸다.

이번 투입은 2인 1조였다.

물론 생도들만 가는 건 아니고, 견학 역할도 겸했기에 군인들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냥 룸메이트랑 묶어버렸나 본데?”

“맞아. 내 짝은 예린이야.”

당연히 내 짝은 천하연.

“인원 점검 후 군인분들의 안내에 따라 정해진 기체에 탑승할게요.”

다들 모이자 청하 교수가 차례차례 이름을 불렀다.

“절대 무리하지 마라.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피해서 지원 요청. 알았지?”

점검이 끝나기 전, 한여름을 똑바로 바라보며 신신당부했다.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알았어.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걱정되니까 그렇지.”

“우리 김무공 씨나 좀 조심하세요. 대뜸 위험한 곳에 달려들지 말고.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람.”

“그래. 조심하고, 나중에 보자.”

“웅냐.”

한여름이 먼저 군인들의 안내에 따라 활주로로 이동해 수직이착륙기에 탑승했다.

일반 틸트로터기보다 커다란 것들이 수십 대 늘어서 있는 광경은 꽤 장관이긴 했다.

ZV-22.

외형은 틸트로터기와 비슷했지만, 제트엔진을 사용하여 좀 더 대형화했다는 점이 달랐다.

확실히 마석 때문인지 이쪽 기술력이 좋긴 좋다.

“김무공 생도님, 천하연 생도님! 이쪽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대기하자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천하연과 함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천하연은 묵묵히 내 근처에 따라붙었다.

“생도 김무공입니다.”

“충성! 로미오팀 팀 리더 안태준 원사입니다. 편하게 로미오 원이라 불러주십쇼.”

다부진 몸매의 중년 남성이 우리를 보고 경례하며 말했다.

그를 따라 미리 주기 되어있는 기체에 탑승했다.

군용임에도 비교적 대형이라 그런지 탑승감이 나쁘진 않았다.

“이쪽부터 차례대로 로미오 투, 로미오 쓰리, 로미오 포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관광하듯 편안하게 모시겠슴다.”

폐쇄지대 인근에 마련된 임시 캠프로 이동하며 팀원에 대한 설명과 작전에 브리핑을 들었다.

이들은 팀 리더인 안태준 원사를 중심으로 중사 한 명, 하사 둘로 이루어진 침식지대 전문 특수부대였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우리와 함께하면서도 능숙하게 장비를 점검하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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