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31)

“개성은 처음이십니까?”

내 옆에 앉은, 로미오 투라 불린 정훈재 중사가 슬쩍 물어왔다.

“예, 처음입니다.”

“게이트 사태만 아니면 만월대 구경하면서 놀았을 텐데 말입니다. 참 아쉽습니다.”

“저희가 가려는 곳이 만월대 인근 아닙니까?”

“예, 맞긴 합니다만. 그 근처는 잦은 폭격으로 아예 쑥대밭이 돼버렸슴다.”

만월대면 고려 궁궐터를 뜻했다.

평시라면 모를까, 게이트 사태 앞에서는 역시 유적이고 뭐고 없었다.

“곧 도착합니다!”

안태준 원사가 크게 소리쳤다.

작은 창으로 바깥을 보니 원형으로 빙 둘린 높은 콘크리트 장벽을 지나고 있었다.

“여기가 개성 봉쇄지역인가 보군요.”

“예, 반경 5km 정도 되는 지역을 통째로 막아버렸습니다. 중심지는 의도적으로 방치해 놓은 덕에, 외곽을 주기적으로 청소해줘야 합니다. 저희가 할 일이 그것이고요.”

로미오 투가 고개를 끄덕였다.

“6명으론 좀 부족해 보입니다만.”

물론 이쪽이야 천하연 같은 이레귤러가 있으니 상관없지만, 담당 구역을 가늠해 보니 일반적인 수준으로 청소하려면 한나절일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그래서 있는 겁니다. 생도 여러분들은 안심하고 제 옆에 계시면 됩니다.”

로미오 투가 가슴을 탕탕 치면서 호언장담했다.

“실습이라기보단 견학처럼 들리는군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종종 날뛰는 것들과 싸울 일도 있긴 하더군요. 도착했습니다.”

콘크리트 장벽과 인접한 임시 베이스캠프 헬리포트에 우리는 내렸다.

말이 ‘임시’지, 로미오 투가 안내한 숙소에는 욕실을 포함하여 나름 있을 건 다 있었다.

“작전은 내일 오전 6시부터입니다. 오늘은 편히 쉬십쇼. 충성!”

이윽고, 투박하면서도 큼지막한 방 안에 천하연과 둘만 남았다.

천하연이 창밖의 베이스캠프 전경을 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조용하던데. 무슨 일 있어?”

“별 건 아니다. 저들을 보니 신교 무인들이 생각나더구나.”

“확실히 좀 터프해 보이긴 하던데, 신교 사람들이 저래?”

“전부는 아니지만.”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천하연이 천변만화술을 풀었다.

“누가 보는 거 아냐?”

“기척을 숨기고 내 근처로 다가올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으니 괜찮다.”

“그것도 그렇네.”

몸을 정돈하는 천하연 옆에서 작전 지도를 보는 척하며, 파일을 살펴봤다.

순찰 일지에 이은 ‘하수도’ 관련 파일 두 개가 새로 추가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누르자 익숙한 이름이 등장했다.

『안태준의 수기

월 일

환청.

씨발놈의 환청이 끊이질 않는다.

이게 다 빌어먹을 하수도 때문이다.

검진 결과는 정상이다.

정상?

이게 정상이라고?

좆같은 돌팔이 새끼들.

월 일

같이 갔던 팀원들은 이미 목구멍에 권총을 쑤셔 박고 자살했다.

남은 건 나뿐이다.

월 일

씨 ㅂ

(마지막 페이지에 피가 말라붙어 있다)』

새로 업데이트된 파일은, 안태준 원사의 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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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일지와 대조해 보면 순찰을 담당했던 사람이 안태준 원사임은 거의 확실해 보였다.

제보를 받고 하수도 순찰을 나갔다 무언가에 당한듯했다.

다음 파일도 연달아 열었다.

『어느 연구원의 일기

오늘 또 하나의 실험체를 폐기했다. 연구소장에게 이 미친 짓을 그만두자고 말했으나, 돌아오는 건 폭력과 고함이었다. 내가 폐기한 실험체만 백 구가 넘는다. 소각로에 실험체를 태우고 잔해를 하수도에 흘려보내고. 실험체의 작은 몸을 불태우면서 이젠 아무런 감정조차 들지 않는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가.

성공의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과거에 탈취당한 실험체는 그 개체가 특별했음이 거의 확실해졌다. 재현 불가능한 것에 집착하는 이 미친 짓을 당장 멈춰야 한다.

내일도 만일 내 얘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연구원.

하수도.

실험체.

키워드만 봐도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은 갔다.

‘혈교인가?’

게임 내에서도 대놓고 악의 조직을 표방했던 혈교답게, 그들은 온갖 사이한 대법을 기반으로 한 ‘실험’에 집착하긴 했다.

다만 혈교인 중에서도 양심적인 사람은 있는지 그걸 막고자 모종의 일을 벌인 모양이다.

상념을 계속해나가던 도중 향기로운 샴푸 냄새가 진동했다.

천하연이 샤워를 끝마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따로 떨어져서 자는 게 낫겠지?”

파일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하연에게 물었다.

아카데미 기숙사의 넓은 침대와 달리, 이곳의 침대는 두 명이 눕기엔 좀 좁아 보였다.

“싫다.”

천하연이 물끄러미 침대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좋... 응?”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던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좀 비좁긴 해도, 둘이 눕는 건 가능하겠구나.”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아?”

“이건 내게 있어서 수련이니. 수련은 되도록 쉬어선 안 되는 법이지.”

“깨우러 와서 누가 볼 수도 있잖아.”

“자면서도 기척은 느낄 수 있으니 상관없구나.”

저놈의 쇠심줄 같은 고집.

표정에서부터 난 마음 먹은 건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을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그대는 나와 자는 게 싫은 건가?”

“아니 싫다기보단....”

“싫다기보단?”

“나도 남자잖냐.”

“흐음.”

천하연이 팔짱을 끼고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거절할 필요가 없느니라.”

이젠 아예 내 침대에 길게 드러누워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왜 묘하게 얄밉지?

“너 알고 이러는 거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만.”

확신했다.

저 무감해 보이는 표정은 위장이다.

평온하게 들리는 말투 역시.

전부 완벽한 페이크다.

지금 천하연은 날 놀리는 걸 즐기고 있다.

팡팡.

천하연이 손으로 침대를 두드렸다.

“어서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라.”

“얌마. 내가 못 참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못 참는다니? 마치 그대가 날 덮치기라도 하겠다는 얘기처럼 들리는구나.”

“그럴 수도 있잖아.”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만. 나를 상대로 이길 자신은 있느냐?”

“...없어.”

협인지로에 유니콘 신공 버프까지 다 받아도 천하연을 상대로는 필패할 게 분명했다.

처녀인 천하연에게 유니콘 신공이 발동할 리도 없고.

하물며 덮치는 와중에 협인지로는 무슨.

불의지로랍시고 강제로 디버프나 받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종합해 보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이거구나. 안심하거라. 그대가 욕망에 지배당해도 깔끔하게 제압해줄 테니.”

“모르겠다. 난 씻고 올게.”

“구석구석 잘 씻고 오너라.”

“...오냐.”

분명 처음에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어째 가면 갈수록 천하연도 짓궂어지는 느낌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머리에 찬물을 끼얹다 보니 아까 안태준 원사의 수기가 떠올랐다.

‘같이 갔던 팀원들은 이미 목구멍에 권총을 쑤셔 박고 자살했다.’라는 대목.

그러니까.

너털웃음을 짓던 로미오 투 같은 사람들이 전부 자살했다는 얘기였다.

아마 마지막 대목으로 보아 안태준 원사 역시 최후를 맞이했겠지.

시기는 이번 역시 알 수 없다.

천하연의 말대로 ‘구석구석’ 잘 씻고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왔다.

“근데 진짜 좁긴 좁다. 나 누울 수 있나?”

“충분할 것 같구나.”

천하연이 좀 더 뒤로 몸을 빼서 자리를 넓혔다.

마주 보는 건 역시 좀 그래서 등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뭉클.

묵직하면서도 포실포실한 무언가가 내 등판에 닿았다.

동시에 천하연의 발이 내 발과 얽히고, 내 허리를 자신의 팔로 둘러 안아버렸다.

“얌마, 이게 뭔....”

“오늘만.”

내 뒤에서 천하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뜨거운 숨결이 귓불에 닿았다.

묘하게 한여름한테 죄짓는 기분이다.

아무리 ‘수련’ 때문이라지만, 이렇게 안는 건 좀 과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천하연에게서 진하게 풍기는, 한여름과 다른 체향이 사뭇 자극적이다.

좋긴 한데 좋지 않은.

이 미묘한 기분은 대체 뭐라 해야 할지.

반응하려던 아랫도리를 억제하는 것도 슬슬 한계다.

“너무 꽉 안지는 마.”

“그래. 따뜻해서 좋구나.”

천하연이 팔에 힘을 ‘아주 약간’ 풀었다.

여전히 날 꼭 안고 있는 모양새임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미안하다 한여름.

아무래도 이건 양심출타 특성 때문인 것 같다.

“혹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할 부탁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등 뒤에서 천하연이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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