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31)

역시, 얘는 눈치가 좋다.

“내일 좀 위험한 곳 좀 같이 가줄 수 있겠냐?”

“얼마든지. 그대가 위험한 곳이라 하니 자못 흥미롭구나.”

“확신하는 건 아냐. 일종의 감? 그런 거니까.”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무슨 이유가 있겠지.”

“...고맙다.”

“새삼스럽게 뭘.”

“...그래.”

부드러운 살을 맞대고 있어서 그런지, 나른한 기분에 잠이 솔솔 쏟아졌다.

천하연의 협조도 얻었겠다.

내일 할 일은 정해졌다.

***

“하하, 어제는 잘 주무셨습니까? 군용이라 생도 여러분들께서 만족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철저하게 무장을 갖춘 로미오 투가 상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잤습니다.”

천하연 쪽을 힐긋 쳐다봤다. 당연히 남장을 한 채, 고고하게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자자, 출발합시다. 여기서 그리 멀진 않습니다.”

안태준 원사가 앞장섰다. 은닉을 위하여 우리는 차량이 아닌 도보로 이동했다.

목표 지점은 임시 기지에서 전방 1km 지점의 언덕.

야트막한 언덕을 계속 오르다 보니, 이내 정상에 도착했다.

수목이 사라진 잿빛의 황폐한 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언덕을 오르기 전까지는 잘 몰랐지만, 이젠 확실히 침식지대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 생도 여러분들은 여기 앉아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좋은 구경이 될 겁니다.”

“좋은 구경이라니요?”

“저기 군락 보이십니까?”

로미오 투가 가리킨 곳에는 투박한 움집들과 함께, 초록색 피부의 인간형 괴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오크 무리군요.”

“예, 저것들은 마치 곰팡이와 같습니다. 가만두면 저렇게 끊임없이 밖으로 세력을 넓히죠. 저희가 주기적으로 하는 일이 저렇게 외곽으로 뛰쳐나오는 것들을 처리하는 겁니다.”

다만 군인 넷이서 처리하기엔, 오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얼핏 봐도 최소 수백이 넘었으니, 우리까지 포함해야 싸움이 될법했다.

괴물이 있다는 건 들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지는 기밀이라 그런지 우리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

“저격이라도 합니까?”

“저격이라면 저격이지요. 나머지는 로미오 투가 알아서 할 겁니다.”

안태준 원사가 망원경을 들고 군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우리와 거리를 벌린 로미오 투가 무전기를 들고 무전을 시작했다.

“해머1-1, 여기는 로미오1-2, 타입1 요청, 9-라인 준비되었는가?”

“로미오1-2, 여기는 해머1-1, 준비 완료.”

로미오 투의 호출에 맞춰, 무전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군요. CAS(근접항공지원)으로 처리하나 봅니다?”

“어, 아십니까?”

느긋하게 과정을 지켜보던 안태준 원사가 반색하며 물었다.

“대충은요. 로미오 투가 JTAC(합동최종공격통제관) 패치를 달고 있기에 혹시나 했습니다.”

영화와 달리 CAS는 아군 오폭을 막기 위해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연히 전문적인 인력이 필요했고, 그걸 현장에서 담당하는 인력이 JTAC이었다.

“보통 무인들은 군대에 별 관심이 없던데 말입니다. 오히려....”

안태준 원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겠지.

“목숨 걸고 사람들 지키는데 무인이고 아니고가 중요하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천하연이 뜬금없이 불쑥 끼어들어 내뱉었다.

“...여러분들은 일반적인 생도분들이랑은 다르시군요.”

“사정이 좀 있긴 합니다.”

애초에 난 이 세계 출신이라 보기도 힘드니 말이다. 무인의 표본인 천하연까지 동의할 줄은 몰랐지만.

쿠구구구궁-

한참 동안 통신을 주고받은 끝에, 저 멀리서 우렁찬 제트엔진 굉음이 울려 퍼졌다.

초대형 수송기에 가까운 무언가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군용’ 카테고리의 그 어떤 수송기보다도 거대한 크기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무인 분들이니 크게 상관은 없겠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귀 조심하십시오. 신의 망치와도 같을 겁니다.”

“저건 미 공군 소속 수송기로 보입니다만.”

“수송기는 수송기지요. 대한민국이야 미국이랑 혈맹이니까요. 서로 공군 지원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윽고 수송기의 끝부분이 열리면서 무언가를 투하하기 시작했다.

미사일이 적재된 대형 팔레트 여러 개가 수송기로부터 떨어지며, 낙하산이 펼쳐졌다.

그리곤 팔레트에서 순차적으로 발사된 미사일이 천벌처럼 오크 군락에 내리꽂혔다.

꽈과과과광-

귀청을 때리는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불꽃이 튀며 오크 군락이 실시간으로 소멸되어갔다.

“래피드 드래곤(Rapid Dragon)?”

“이것도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게이트 사태 이후 개발에 성공한 화력지원 프로그램이죠. 원래는 이 정도 대규모는 아니었습니다만. 괴물 처리에는 화력이 더 필요했거든요. 시원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보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긴 했다.

거대한 미사일 수십 발이 그대로 내리꽂히는 광경은 꽤 장관이었다.

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산산조각난 오크 군락의 잔해물만 사방에 널브러졌다.

고등급 괴물들이야 무인의 힘이 필요했지만, 고블린이나 오크는 군대 선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만일 그것조차 불가능했으면 이 세계는 진작 망하고도 남았겠지.

“자, 이제 저희가 할 일은 뒤처리입니다. 혹시 살아남은 오크가 있을 수 있으니 마무리하면 끝. 대개는 총 쏠 일도 없긴 합니다만. 갑시다.”

안태준 원사가 총을 들고 앞장섰다.

“원사님, 뭐 좀 물어도 됩니까?”

“예,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혹시 이 구역 하수도 관련해서 제보 들어온 거 있습니까?”

“어? 생도님이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임시 기지 병사 하나가 하수도 인근에서 실종됐다 하더군요.”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거기 가볼 생각입니까?”

“예, 정리 끝나고 생도님들 돌아가시면 한번 들를 예정이긴 했습니다만.”

정답이다.

생각보다 빨리 사건에 근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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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다당!

아직 이글거리는 열기가 남아있는 군락에 총성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군데군데 탄화된 오크 사체들이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매캐한 바람 사이로는 강렬한 누린내가 풍겨왔다.

강렬한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은 오크들이 몇 있었다.

물론 숨만 붙어있는 수준이기에, 로미오 팀이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확인사살 했다.

“징그러운 것들입니다. 조금만 내버려 두면 이렇게까지 늘어납니다.”

안태준 원사가 능숙하게 재장전을 하며 내뱉었다.

“튼튼하긴 하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흔적도 없이 타버렸을 텐데, 오크들은 비교적 형체를 유지한 것들이 많았다.

“예, 게이트 사태 초창기에는 이런 것들조차 큰 문제였죠. 소수만 뛰쳐나가도 일반인 학살하는 건 일도 아니니 말입니다. 지금이야 침식 대응 프로토콜이 정립되어 대처가 가능해졌지만.”

퍼석. 미간을 찌푸리며 안태준 원사가 타버린 잔해를 밟았다.

“크르르르...!”

한참을 걷던 도중,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무언가가 기습적으로 휘둘러졌다.

사선으로 짓쳐들어오는 묵직한 도끼를 반격하며 혈수마공의 경력이 실린 장을 내질렀다.

3m에 근접한 거대한 덩치, 반쯤 타버린 오크의 얼굴에서는 붉은 안광이 번들거렸다.

쿵-

내 손바닥이 오크의 도끼를 박살 냄과 동시에, 천하연이 날린 지풍이 그대로 오크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머리가 사라진 오크의 몸체가 땅에 풀썩 쓰러졌다.

“감사합니다. 이놈이 대장이었군요.”

안태준 원사가 등 뒤에서 단봉 같은 걸 꺼내 오크의 심장에 푹 박았다.

가슴팍을 뚫고 들어갔던 봉을 꺼내자, 보랏빛 보석 같은 게 끝에서 반짝였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작은 크기였다.

“마석?”

“예. 이 정도 되는 녀석은 마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져가시겠습니까?”

피와 살점이 달라붙어 있는 마석을 천으로 슥슥 닦은 뒤 이쪽으로 내밀었다.

“포상금으로 지급해주시면 됩니다.”

옆을 슬쩍 바라보자, 천하연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좋은 값에 처리하도록 하지요.”

이놈이 마지막이었는지 여러 번 반복해서 오크 군락을 수색했지만, 더 살아남은 놈들은 없었다.

“정식 임무는 여기서 끝입니까?”

내가 묻자 안태준 원사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그렇지요. 생도분들을 다시 임시 기지까지 모신 뒤, 저희끼리 하수도를 수색할 예정이었습니다만.”

“동행하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이 친구가 좀 많이 강하거든요. 방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엄지를 수평으로 세워 천하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해라니요.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미간을 찌푸리며 안태준 원사가 한참 고민했다.

힘의 강약을 떠나 생도를 위험한 곳에 데려간다는 데 부담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절하시면 저희끼리라도 갑니다?”

내가 농담처럼 다시 내뱉자 안태준 원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저희 말을 따라주셔야 합니다.”

“하수도 위치는 어디쯤이죠?”

“여기서 멀지는 않습니다. 말이 하수도지, 위급한 상황 시 방공호로 쓰기 위해 북한이 엄청나게 깊게 파놓았거든요. 덕분에 사람 하나 실종되는 건 일도 아닙니다.”

안태준 원사가 태블릿 하나를 내게 건넸다.

하수도 근처로 가는 길과 내부 지도가 디스플레이에 떠 있었다.

하수도라곤 하나, 안태준 원사의 말대로 단순 그것만 있는 건 아닌듯했다.

그러니까 내게 무언가를 알리기 위해 파일이 업데이트됐겠지.

***

마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처럼 반파된 잿빛의 빌딩 사이를 지나 도심지 외곽에 도착했다.

“여기가 입구입니다.”

끼이익- 녹이 잔뜩 슨 철문이 열리고, 은은한 백색 조명이 조도를 흩뿌리는 계단이 나타났다.

안쪽에서 불어오는 시린 바람에서는 쿰쿰한 냄새와 미약한 악취가 흘러나왔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복도를 따라 쭉 내려가니, 거대한 수로가 나타났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물이 흐르는 수로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가스 같은 게 나오면 방독면이라도 써야 하나 고민했는데 말이다.

“일단 이 구역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안태준 원사가 긴장한 목소리로 앞장섰다.

대개 이런 환경에서는 ‘괴물’이 나타나기 쉽다.

괜히 상당수의 게임에서 지하수로를 단골 사냥터로 삼는 게 아니었다.

내부 조명은 켜져 있었지만, 괴물이 수면 아래 숨어있을 수 있기에 꼼꼼히 빛을 비추면서 전진했다.

또각또각.

폐쇄된 지하수로를 긴장과 함께 걷던 도중.

“뒤로.”

갑자기 천하연이 단호하게 내뱉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손을 한번 내저으며 무언가를 잡았다.

항거할 수 없는 박력에 다들 멈춰 서서 천하연만 주시했다.

“뭐야?”

내가 먼저 묻자, 천하연이 손바닥을 펼쳤다.

천하연의 손바닥 위에는 가루처럼 산산이 조각난 벌레 잔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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