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31)

“저거 물린다고 뭐 같은 시귀 되고 그런 거 아니지?”

김무공이 허리춤에 걸어놨던 권갑을 착용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시귀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대신 저 이빨에 물리면 다른 의미로 감염은 되겠구나.”

“그러겠네. 병원균종합선물세트 같으니.”

“되도록 공격하지 말고. 내 주변에만 있거라.”

“오냐. 지원할게. 저건 뭔가 주먹으로 때리는 것도 찝찝하단 말이지.”

차분하게 김무공이 천하연의 옆에 섰다.

역시, 이 사내는 기본적으로 정신력이 좋다.

시귀의 끔찍한 모습은 평범한 생도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닐 터인데.

산책이라도 나온 듯 김무공은 평온했다.

차라리 아까 시신들이 고깃덩이처럼 걸려있는 걸 봤을 때 감정의 동요가 더 심했다.

스르릉- 천하연이 허리춤에 걸려있던 검을 뽑았다.

시귀들은 이쪽을 인지했으나, 경계하느라 그런지 움직임이 상당히 굼떴다.

“그거 쓰는 거였어?”

“쓰지도 않는 검을 패용하고 다닐 리가 있겠느냐.”

“맨날 손으로 다 해결하길래 의식용이나 그런 건 줄.”

대답 대신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천하연은 검을 들었다.

저런 끔찍한 괴물과 손발 뒤엉켜 싸우는 것은 천하연으로서도 내키지 않았다.

호신지기로 몸을 두르고 있으니 무엇이든 천하연의 몸에 닿지는 못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기분 문제였다.

천하연이 깊은숨을 내쉬자 묵빛의 기운이 검날에 아른거렸다.

본디 천하연이 익힌 무공 중 상당수는 강기 사용을 전제로 했다.

특히 검법인 천마검결의 경우 그런 부분이 더 도드라졌다.

기본적으로 화경 이상만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극악의 난이도를 지닌 무공들.

역대 천마들이 남기고 보완한 것들은 하나같이 끔찍할 정도의 난해함을 자랑했다.

원래라면 천하연은 천마검결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가능하다.’

근거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천하연은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의 기회는, 쉬이 오는 게 아니었다.

지하이니만큼 조금 위력은 조절해서.

고작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천하연은 판단을 내리고 진기를 검에 쏟아부었다.

검에 실린 파멸적인 기운에 장내의 공기가 출렁거렸다.

- 그워워워어어!!!

천하연의 패도적인 기운을 인지하고 시귀들이 그제야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으나.

저벅.

단 한 걸음.

김무공의 발걸음에 모든 시귀들이 움찔하며 멈춰섰다.

쿵.

그 사이, 천하연이 강철 바닥을 딛고 부드럽게 검을 휘둘렀다. 패도적인 기운과 반대로, 천하연의 검로는 마치 아름다운 춤사위와 같았다.

천마검결 天魔劍訣

월광검형 月光劍形

신월파천 新月破天

천하연의 검에서 쏘아진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강기가 시귀들을 향해 나아갔다.

쿠구구궁- 강기에서 발생한 막대한 충격파가 강철 바닥과 벽에 깊은 상흔을 남기며 시귀들을 덮쳤다.

해일과도 같은 강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이윽고 산산이 부서진 시귀들의 잔해만이 남았다.

아니, 잔해조차 거의 남기지 못하고 강기에 의해 소멸해버렸다.

단 한 수.

백이 넘는 시귀들이 천하연의 일수에 형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우글거렸던 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월파천의 경력이 내뿜는 압박에 공간 내 모든 고가 터져나갔다.

“...실화냐 이거.”

김무공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앞의 참상을 쳐다봤다.

검기도 아닌 강기.

현재 천하연의 경지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이건 김무공의 ‘상식’을 명백히 어긋난 공격이었다.

“...미안하구나.”

천하연이 검을 바닥에 꽂으며 말했다.

아주 약간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기에 시도해보았으나.

어렴풋이 잡힐 것 같았던 벽은 이내 다시 천하연의 손끝을 벗어나 버렸다.

물론 성과가 없진 않았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었으니.

“괜찮아?”

비틀거리는 천하연을 보며 김무공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힘의 배분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어.”

단순한 내공의 문제라기보단, 의념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여파였다.

단순 위력만 강한 공격을 가하는 건 이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로도 가능했다.

하지만 지하가 붕괴하지 않으면서 시귀들만 쓸어버릴 수 있는 공격을 강기로 가하는 건.

결국 의념의 힘을 빌리는 게 필수였다.

“덕분에 싹 쓸어버렸지만 말이지.”

“...이게 끝이 아니야.”

천하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응? 난 안 느껴지는데.”

“저쪽 너머에 무언가 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천하연이 턱짓으로 건너편 철문 하나를 가리켰다.

“좀 쉬었다 갈까?”

“이젠 괜찮다. 어차피 그대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김무공을 지그시 쳐다보며, 천하연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마치 자신의 할 일은 끝났다는 듯.

***

천하연이 강하다는 것 정도야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명백히 내 예상을 벗어났다.

단순히 검에 강기를 실어 공격한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화경의 무인이나 쓸법한 공격을 천하연은 능숙하게 해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나이로.

운동장 하나 크기의 면적이 강기 파동에 휩쓸려 정교하게 초토화된 모습은 탄성마저 절로 나왔다.

절묘한 진기 운용으로 인해 강철 벽 일부에 흉터는 남겼을지언정, 붕괴의 위험은 없었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보면 볼수록 세밀한 조절 능력이 돋보였다.

시귀 잔해 사이를 가르고 천하연이 말한 문 앞에 도달했다.

이번에는 자동으로 열리지 않았다.

혈수마공의 기운을 장심에 모아 그대로 내질렀다.

꽝- 찌그러진 철문을 발로 차 강제로 열었다.

내부는 무언가의 통제실인 듯, 복잡한 기계들로 가득했다.

“조심하거라.”

천하연이 내 뒤에서 나직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아까와 달리 피부에 선연히 느껴지는 이 살기는, 단순한 시귀들과는 달랐다.

불현듯, 놈의 공격이 시작됐다.

‘검?’

놈이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빛내며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창백한 피부를 제외하면 생전과 거의 비슷한 느낌의 시귀였다.

나름 엘리트 좀비인지, 천하연의 공격에 잡몹처럼 쓸려나가던 시귀들보다는 움직임이 정교했다.

본능만 남았다기보단, 나름 숙련된 검사의 검로 같았다.

그래 봐야 좀비였지만.

쩌어엉- 내 목을 대놓고 노리는 일격에 손날을 세워 쳐내고, 한 발짝 발걸음을 내디뎠다.

진각에 따라 강철 바닥이 움푹 파였다. 혈수마공의 기운이 일렁이는 장을 놈의 복부에 때려 박았다.

내가중수법이 실린 일초.

혈수마공의 기운이 시귀의 온몸으로 침습하면서 놈의 몸이 울긋불긋 부풀어 올랐다.

휘두르던 검이 그 자리에서 멈추고, 천마군림보가 놈의 움직임을 억제한 사이.

나는 그동안 수없이 반복해왔던 가장 기본적인 초식.

폭렬장爆裂掌을 놈의 머리통을 향해 뻗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협인지로의 버프까지 받아 압도적인 내력이 실린 장력 경파 앞에서는 시귀의 단단한 몸이고 뭐고 그대로 터져나갔다.

물론 이것조차 지하였기에 힘 조절을 한 결과였다.

난 천하연처럼 의념을 이용한 정교한 내공 운용은 불가능했다.

그냥 양으로 조절하는 수밖에.

“확실히, 내공은 감탄스러울 정도구나.”

아예 뒷짐 지고 서서 내가 싸우는 걸 쳐다보던 천하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뱉었다.

“그래 봐야 엘리트 좀비지 뭐. 근데 여기가 제어실 맞겠지?”

“그런 것 같구나. 더 숨겨진 곳은 느껴지지 않아.”

대부분 전자기기는 이미 먹통이었다.

내부 기판이 다 타버린 것으로 보아 복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천하연과 열심히 뒤적거리던 도중.

기계 틈 사이에서 꾸깃꾸깃 접힌 서류를 발견했다. 기감을 넓게 퍼트려서 찾아보지 않았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구석에 깊게 박혀 있었다.

아무래도 급하게 폐기하다 놓친 것으로 보였다.

겨우겨우 꺼내서 아무렇게나 구겨진 서류를 펼쳤다.

하수 관리인에게 보내는 문서.

내용은 단순한 지시 사항들이었다.

‘DP?’

다만, 마지막에 적혀 있는 이 DP라는 단어가 해석되지 않았다. 조직 이름 같기도 하고 사람 이름 같기도 했다.

“너 혹시 이거 뭔지 아냐?”

천하연에게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

“모르겠구나. 이런 약어는 너무 많아서 말이다.”

한동안 곰곰이 팔짱을 끼고 어딘가를 쳐다보던 천하연이 문득 말을 꺼냈다.

“시귀와 고蠱 제조 능력이 있으면서도 이런 대규모의 실험 시설을 비밀리에 운용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아. 우리나 혈교, 아니면....”

“아니면?”

“...당문제약(Dangmoon Pharmaceuticals).”

이윽고 천하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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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문제약(Dangmoon Pharmaceuticals).

글로벌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해 이제 와선 다른 모든 제약회사를 합한 것보다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기업 중 하나였다.

압도적인 기술력과 적대적 M&A를 통한, 과격한 인수합병이 특징인 당문제약은 본래라면 대부분 국가에서 독과점으로 제재받았어야 정상이었으나.

게이트 특별법이라는 국제법에 따라 당문제약은 모든 국가의 법망을 회피해버렸다.

미증유의 사태에 대항하기 위해선 독과점 같은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고, 필요한 게 있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써야 했다.

그리고 당문이 만든 약품은,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공급을 초월하는 것 중 하나였다.

세계 최대 기업 중 하나를 산하로 거느리고 있는 덕에, 경상남도 사천에 재건된 새로운 당가타唐家陀는 그들의 왕국과도 같았다.

혈교에 의한 당문 혈사가 뭇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요새화된, 폐쇄적인 당문 본가가 그리 처참한 꼴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으니까.

“...차라리 혈교였으면 좋겠는데.”

당문제약이 개입했다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대놓고 악의 세력인 혈교와 달리, 당문은 엄연한 ‘정파’였다.

“일단 서류는 내가 가져가도 되겠나?”

천하연도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조사는 힘들겠지?”

“...우리가 당문을 조사하는 순간, 그건 백도와 마도 전체의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크니. 아무래도 쉽진 않겠구나.”

당문을 천하연이 건드린 순간, 개인적인 문제로 끝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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