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비밀리에 뭔가를 하기도 쉽지 않았다.
정파는 여전히 천마신교를 극도로 경계했다.
게이트 사태로 당문제약이 이득을 얻었듯이.
천마신교는 압도적인 무력을 기반으로 세계 곳곳의 게이트를 막아내며,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어렵네.”
이 시궁창 같은 세계가 정파라 해서 정의롭다든지,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그래도 이건 ‘지금 시점에서’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대한 규모의 사건이었다.
“당문 짓이라는 게 확정은 아니니, 이건 시일을 두고 보는 게 낫겠다.”
천하연의 말에 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공표될 가능성은 낮겠지?”
“...정파의 짓이 확실하다면 아마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천하연이 말했다.
어느 정도 내부 정리를 다시 한번 마치고, 안태준 원사를 호출했다.
꽤 급하게 준비를 했는지, 우리가 하수도 내부 좌표를 찍어주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어, 어찌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우리의 연락을 받고 온 안태준 원사가 실험실 내부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그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두꺼운 방호복을 착용한 채였다.
“제보자는 괜찮았습니까?”
“예, 반쯤 미쳐서 자살하기 직전인 것을 약물로 기절시켜서 후방으로 호송했습니다.”
“죽진 않았다면 다행이군요. 이미 대부분 증거는 파기한 모양입니다.”
안태준 원사가 이끌고 온 지원병력이 내부를 소독하면서 차례차례 진입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생도 여러분들께 못 볼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원래 이런 건 저희가 처리했어야 할 일인데.”
나를 쳐다보며 안태준 원사가 머리를 푹 숙였다.
“괜찮습니다.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이라뇨?”
“이 일에 저희가 관여됐다는 사실은 최대한 함구했으면 합니다. 알음알음 퍼져나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나는 상관없지만 천하연이 관여되었다는 건 숨기는 편이 나았다.
만일 이 짓을 벌인 게 당문이라면.
당문 정도면 천하연의 정체를 알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철저하게 입을 막아놓겠습니다.”
안태준 원사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뒷수습을 맡기고 나오며, 청량함보다 끈적끈적한 텁텁함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로미오 팀’을 살린다는 목적은 확실히 달성했으나, 뭔가 김빠진 사이다를 마신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
본래라면 좀 더 일정이 있었지만, 임시 기지는 이미 하수도 때문에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실습을 계속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붕 떠버렸다.
천하연은 씻으러 들어가 버렸고, 멍하니 아까 본 참상을 되뇌던 도중.
익숙한 상태창 음성이 들려왔다.
[새로운 기능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채팅 기능’을 사용 가능합니다.]
현실이 게임이 아니라고 느낄 때마다, 마치 ‘네가 있는 이곳은 게임 내의 세상이다.’라는 걸 주지시켜주듯.
게임 내에서나 쓸 법한 채팅 기능이 업데이트되었다.
슬쩍 열어보니 역시, 대화 대상은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응? 이거 뭐임?]
얘도 참, 양반은 못 된다. 나와 똑같은 상태창 음성을 들었는지 한여름이 곧장 채팅을 보내왔다.
[뜬금없이 업데이트됐더라.]
[오, 야쓰. 존나 좋다. 폰 두드리는 것보다 훨씬 편하네. 옛날 생각도 좀 나고.]
확실히, 한여름의 말대로 생각만으로 대화가 입력되는 게 꽤 편했다.
물론 그만큼 실수하기도 쉽겠지만.
[넌 채팅할 때마다 저렴해지는 그 습관 좀 고쳐라. 오죽하면 다들 널 남자로 알겠냐.]
[섹스.]
[섹스.]
[얌마.]
[대머리나 되라 ㅗㅗㅗ]
[응, 풍성 유전자임.]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를 뭐라고 하더라? 암튼 많이 윗대에 있을 수도 있잖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모르냐. 이 빡통을 어쩌면 좋을꼬.]
[너도 모를 것 같은데 뭘.]
[고조할아버지.]
잠시 채팅이 멈췄다. 고작 이런 것에 충격이라도 먹었나?
하여간.
한여름과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복잡한 생각이 어느 정도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럼!]
[뭐 얌마.]
[고조할아버지 위는 뭐야?]
[바로 위 얘기하는 거면 현조.]
[너 생각보다 똑똑한 아이구나?]
[네가 상식이 부족한 게 아닐까?]
[아니 현조 같은 걸 요즘 젊은이들이 어떻게 알겠냐 이 마리야. 애늙은이 ㅗ]
[삼국지 보면 비슷한 말 나오잖아.]
[여기서 삼국지 각을 본다고?]
[유비 모름? 효경황제 현손 유웅의 손자. 물론 현손은 현조가 아니라 고조에 대응되는 개념이지만.]
[...보통 삼국지 보면서 그런 걸 찾아보진 않거든. 너 진짜 변태 같다. 뒷말은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됐다. 실습은 어땠냐?]
마침 연락 한번 해보려던 참이었다.
이렇게 바로 채팅을 보내온 걸 보면 그쪽도 거의 끝나간듯했다.
[어우, 말도 마. 군인들이 좌표 따서 엄청 포격했는데 고블린들이 언덕에 굴을 파버려서 많이 살아남았드라.]
[굴에 직접 들어갔어?]
[아니. 그냥 전투기 우르르 오더니 벙커버스터라는 거 사정없이 박아버리던데. 무슨 영화 보는 줄.]
생각보다 대한민국은 터프한 국가였다.
고작 고블린 굴 없애자고 벙커버스터를 때려 박을 줄이야.
[직접 전투는 했고?]
[응. 그냥 몇 마리 살아남아서 뛰쳐나오는 거 군인들이랑 같이 처리했어.]
[고생했다.]
[넌 어땠는데?]
[이쪽도 그냥 미사일 때려 박아서 처리했어.]
[웅냐. 군인들이 부른당. 내일 봐.]
[그래. 조심해라.]
[너도.]
채팅창을 닫으니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천하연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한여름과 채팅하면서 혼자 실실 쪼개고 있던 걸 본 모양이다.
...미친놈 취급 안 당해서 다행이지.
“그냥. 여름이한테 연락이 좀 와서.”
폰을 흔들면서 이거라는 걸 강하게 어필했다.
“그런 거였나.”
“혹시 당문 관련해서 뭐 좀 알아내면 공유해줄 수 있냐?”
천하연은 ‘조사가 어렵다’라고 했지 ‘불가능하다’곤 말하진 않았다.
만일 당문이 저런 짓을 벌였다는 확실한 증거만 파악할 수 있다면.
신교 입장에서도 정파의 치부를 움켜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조심스레 조사 시도는 해볼 것이다.
“어차피 그대가 알아낸 사실이니. 물론이다.”
“고마워. 그리고 매번 부탁만 해서 좀 그렇긴 한데 하나만 더 부탁하자.”
아까까지의 사건을 겪으면서 한 가지 확실히 깨달은 게 있었다.
무력.
대한민국의 영토 내에서, 어린아이 수백을 실험체로 쓰고 죽이는.
이딴 거지 같은 세상을 몸 성히 헤쳐나가려면, 세계구급 적들과 상대해도 깨부술 수 있는 압도적인 무력이 필요했다.
“얼마든지.”
“내 수련 강도 좀 올렸으면 좋겠다.”
“...괜찮겠나?”
“어. 한여름 쟤는 힘들겠지만, 난 가능해.”
태양지체의 막대한 회복력이면, 극한의 수련도 충분히 버틸 거란 계산이 섰다.
지금까지 과정을 토대로 분석해 보면 거의 확실했다.
***
흐린 빛물결이 내 목덜미로 짓쳐들어왔다.
그것도 다수.
천하연의 그것보다는 훨씬 연했지만, 천마신교 특유의 묵빛 기운이 실린 검들이 내 급소를 노리고 쏘아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면서 정확히 검날마다 주먹을 때려 박았다.
쿵-
묵직한 경력 파동이 공중에 퍼지며 쏘아지던 검들이 전부 튕겨 나갔다.
쿵.
다시 한번, 의념을 실어 발걸음을 옮겼다.
천마군림보의 폭압적인 기운이 주변에 있는 흑의인들의 움직임을 일순 전부 억제했다.
마지막으로, 진각을 강하게 밟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혈수마공의 기운이 아른거리는 주먹은 정확히 흑의인 앞에 멈췄다.
꽈과과광-
공간을 격하고 무지막지한 경파가 흑의인 뒤쪽을 휩쓸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먼저 주먹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소교주님께 듣긴 했지만, 엄청난 재능이시군요.”
내 수련을 돕던 무흔마영이 감탄하며, 등 뒤쪽으로 뒤엎어진 땅거죽을 쳐다봤다. 내가 발출한 막대한 화염 폭풍은 연무장 바닥에 깔린 돌까지 녹여버렸다.
하수도 사건 이후로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건 만 번 수련을 통해 내가 의념을 깨닫고, 어느 정도 능숙해지기까지 걸린 기간이기도 했다.
이젠 무흔마영 셋을 상대해도 충분히 할만했다.
근력을 포함한 단순 스탯도 비약적인 상승을 보았으니.
처음 이 세계에 빙의했을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저희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무흔마영들이 나를 보며 묵례했다.
“다음에 또 뵙시다.”
가볍게 포권하고 뒤돌아섰다.
[야야야ㅑ, 나 내일 뭐 입을까?]
그들의 안가를 나와 아카데미로 복귀하려고 하니, 한여름이 다소 들뜬 말투의 채팅을 보내왔다.
[암거나 입어. 어차피 바로 무인도행인데.]
[칫, 넌 낭만이 없어.]
[시끄럽고, 독도법이나 한 번 더 봐.]
[100번은 본 거 같아.]
[오냐. 잘했다.]
내일은 드디어, 무인도 평가를 보러 떠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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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괜찮아?”
한여름이 내 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매번 입던 아카데미 교복 대신 순백의 얇은 원피스에 밀짚모자 비슷한 걸 머리에 썼다.
딱 봐도 나 여름휴가 갑니다-하는 모양새였다.
휴가라면 휴가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