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31)

지옥행 휴가라 그렇지.

“괜찮으니까 그만 물어봐라. 다섯 번은 들은 거 같다.”

“그치만, 기대되잖아. 나 이쁨?”

“그놈의 이쁘단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냐. 이쁘다. 존나 이뻐.”

“뭘 모르시네. 예쁘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늘 새롭고 짜릿하거든.”

“그러시겠죠.”

“헤헤헤....”

한여름이 입가를 가리고 배시시 웃었다.

새하얀 원피스에 밀짚모자라는 치트키 아이템을 착용한 걸 보니, 실제로 이쁘긴 하니까.

딱히 거짓말한 건 아니다.

왜 이리 들떠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얘는 해외를 나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군용 수송기야 이제 익숙하겠지만.

정작 멀쩡한 민항기를 타본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

무인도 평가 과정상 오키나와까지는 일단 민항기를 타고 이동하기로 되어있었다.

“그거 아냐?”

“뭔데?”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비행기 타면 신발 벗어야 함.”

휙- 곧바로 주먹이 휘둘러졌다.

청순한 복장에 그렇지 않은 행동.

가볍게 몸을 틀어 회피했다.

“이씨, 너 요즘 왜 이리 잘 피해. 날 무슨 바보로 알아.”

“수련의 결과란다.”

“나도 할래.”

“넌 의념이나 먼저 익히세요, 좀.”

“아무리 해도 모르겠는걸. 그냥 내공 왕창 박아서 다 때려 부수면 안 됨? 아니면 근력으로. 그런 말도 있잖아. 압도적인 힘으로...!”

...할 말이 없다.

“상승 경지로 가려면 의념은 필수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실전이 필요해, 목숨이 오가는 실전이.”

“실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행여나 이상한 짓 할 생각하지 마라.”

“어, 왔다.”

한여름이 어딘가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네모난 짐가방을 다소곳하게 든 은발적안의 미소녀가 여성 기숙사 지역에서 나왔다.

꾸벅.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나도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서문예린.

침식지대 실습을 같이 다녀온 이후에도 한여름은 적극적으로 서문예린에게 공세를 취했고.

마침내 어느 정도 친해지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탑승해야 하는 민항기는 인천공항에 있었다.

아카데미 전용기라던가.

역시 클래스가 다르긴 다르다.

인천공항까지 가는 건 서문세가의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이윽고 서문예린의 뒤로 고급스러운 리무진 한 대가 멈춰섰다.

“오...!”

[섹스.]

익히라는 의념은 제대로 못 익히고, 한여름은 이상한 것만 능숙해졌다.

저런 식으로 심심하면 말과 채팅을 동시에 보내는 기예를 펼쳐댔다.

[너 그러다 언제 한 번 크게 실수할 거다. 남들 다 있는 데서 ‘섹스’해보지그래?]

[그럴 리 없음.]

한숨을 작게 내쉬며 리무진에 탑승했다.

탑승하고 보니, 서문예린과 정면에서 마주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눈 돌아간다, 눈 돌아가. 얘가 이쁘긴 하지?]

[시끄럽다.]

미동도 없이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서문예린을 보고 있으니, 한여름의 말대로 사람 같지가 않았다.

마치 잘 만들어진 예쁜 인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은발적안이라는 특이한 외형도 이질감을 더했다.

“태워줘서 고맙다. 얘한테 얘기 많이 듣긴 했는데, 이렇게 함께하는 건 처음이네.”

어색한 침묵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끄덕.

서문예린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

그리고 대화 끝.

...이제야 한여름이 왜 기숙사 초기에 그렇게 징징거렸는지 깨달았다.

대화를 이어나가기 극도로 힘든 타입이다.

“예린아, 이거 먹을래?”

내 옆에서 이미 뭔가를 꺼내 먹고 있던 한여름이 봉지를 내밀었다.

“응.”

서문예린이 우아한 손짓으로 과자 봉지에 손을 집어넣어 초콜릿 쿠키를 하나 꺼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아이스티 먹을래?”

“응.”

둘이서 열심히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먹다 보니 어느새 인천대교의 거대한 형상이 보였다.

“듣던 거랑 조금 달라.”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서문예린이 입을 열었다.

“야, 너 얘한테 대체 뭐라 말한 거냐?”

곧장 한여름에게 추궁했다.

“있는 그대로 말했지.”

한여름이 내 눈을 슬쩍 피하며 답했다.

저 확신 없는 말투와 표정을 보니, 분명 이상한 소리를 잔뜩 한 게 확실하다.

“뭔 말을 했든 오해다. 얘가 원래 과장을 좀 좋아해.”

“과장 안 했눈뎁.”

“안 했긴. 뻔할 뻔 자지.”

[그냥 여자랑 야한 거 좋아한다? 이런 평범한 얘기 했어. 남자라면 다들 그렇잖아?]

...이걸 확.

어쩐지 서문예린이 거리 조절을 꽤 신경 쓰더니.

무슨 나를 색마처럼 묘사한듯했다.

“에휴....”

결국,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창밖을 쳐다봤다.

인천공항의 전경이 슬슬 시야에 들어왔다.

가긴 가는구나.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전용기’라길래 나는 셀럽들이 타고 다니는 작은 사이즈를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엄청난 거니까.

내 상식적인 예상과 정반대로.

우리 눈앞에 있는 비행기는 말 그대로 무지막지한 크기를 자랑했다.

어째 이 세계는 뭐든 큼직큼직하게 만드는 걸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석 같은 치트키 아이템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거함거포든 거대 함선이든 거대 비행기든.

인간의 로망은 자고로 거대한 것에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고작 아카데미 전용기가 이 수준인 건 좀 선을 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아는 가장 큰 비행기가 이제는 천국으로 가버린 므리야(An-225)인데, 이건 그보다 더 커 보였다.

“야야, 그....”

비행기에 탑승하기 직전, 한여름이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뭔데 그리 망설이냐?”

“우리가 타는 게 저거야?”

“어. 아까 말했잖아.”

“보통 비행기가 저렇게 다 커?”

“아니, 쟤가 이상한 거야. 옆에 비행기들이랑 비교해도 차이 나잖아.”

물론 비슷한 사이즈의 민항기들도 몇 있었지만.

“글킨 한데.”

[...신발 얘기 거짓말 맞지? 전용기는 막 다르다든지, 그런 거 아냐?]

크흡.

순간 나오는 웃음을 애써 진정하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뇌가 청순한 한여름 씨를 어찌할꼬.”

한여름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가볍게 흔들었다.

“너 자꾸 놀리면 죽는다.”

그렇게 주먹 쥐어봐야 안 무섭다.

[거짓말 맞으니까 안심해라. 전용기라도 신발 벗고 탈 리가 있겠냐.]

“웅냐.”

옆에서 보면 대체 이놈들이 무슨 얘기를 하나 싶겠다.

이제는 채팅과 대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도 익숙해지는 느낌이었다.

귀찮은 탑승 절차를 거친 후, 우리는 차례차례 비행기에 탑승했다.

총 2층으로 구성된 비행기에서 생도 구역은 2층.

“쓸데없이 화려한데.”

한여름의 말대로, 내부는 일반 비행기와 아예 달랐다.

호텔 시설을 가져와서 내부에 박아놓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전용기라 해도 이륙 때는 예외 없이 좌석행이었다.

지정된 좌석에 앉아있으니 민항기와 비슷한 안내 방송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을 마쳤다.

시끄러운 소음이 잠잠해지고, 좌석 벨트 표시등이 꺼진 후, 정면의 커다란 디스플레이가 켜졌다.

“미리 말했듯이 이 비행기는 오키나와 가데나 미 공군기지에 바로 착륙합니다. 거기서 이제 인원을 나눠 생존키트를 지급받은 후, 즉시 무인도로 출발할 겁니다.”

청하 교수가 뒤쪽에서 나와 브리핑을 시작했다.

“개인 물품은 옷가지 등을 제외하면 제한됩니다. 수송기에 탑승 전 짐 검사가 있을 예정이니 주의해주세요.”

당연하지만, 대부분 전자기기는 가져갈 수 없었다. 첨단적인 물품은 상당수가 제약당했고, 그나마 램프용 배터리 등만 허용됐다.

“총 기간은 21일. 어떤 방식이든 좋습니다. 그때까지 생존하면 됩니다. 만일 중도 포기하고 싶으면 지급된 신호탄을 터트리시면 됩니다. 그 외에도, 교수들의 판단에 따라 위험한 상황이라 여겨지면 즉시 탈락시킬 수도 있습니다.”

“질문 있소이다!”

거대한 덩치의 황보 형제 중 하나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예, 말하세요.”

“고작 생존만 하면 되는 거요? 너무 쉬워 보이오만!”

청하 교수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쉬운지 어려운지는 해봐야 알지 않을까요? 일단 생도들 간의 싸움은 금지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혈기왕성한 1학년 생도들에게 싸움이라도 시켰다간,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힘의 조절부터 아직은 미숙한 시기였으니까.

“그래도 좀 부족하다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시겠죠.”

디스플레이에 코코넛크랩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 나타났다.

“이건 타마토마(Tamatoma)라는 변종 몬스터입니다. 온순한 성격으로 최소한의 반격만 가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한 축에 속합니다. 초식성이라 인간을 먹이로 보지도 않습니다. 당연히 선공하진 않습니다.”

살벌한 집게를 가진 초식성 몬스터라니.

외형과 너무 안 어울려서 이질감이 들었다.

“다만 쉬운 상대는 아닙니다. 겁이 많아 접근하기 전 엄청난 속도로 도망치는 데다가, 단단한 갑피는 대부분의 공격을 무효로 만들지요. 이 타마토마에게도 마석이 존재합니다. 타마토마 마석을 모은 개수대로, 가점이 있으니 도전하실 분들은 해보시면 됩니다.”

잠시 우리를 훑어보던 청하 교수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술을 뗐다.

“물론 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리하지 마세요. 생존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거랍니다. 어차피 무리하면 교수들이 알아서 탈락시키겠지만 말이죠.”

마치 도발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비상시를 대비하여 모종의 대비책이 있는듯했다.

“천하연, 부탁한다.”

청하 교수의 브리핑이 끝난 후, 옆에 앉은 천하연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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