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마침내.
기나긴 정글을 뚫고 나오자, 낙하산 잔해가 보였다.
그 옆에는 상의를 탈의한 김무공이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플라스틱 수통을 들고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 뭐해?”
허탈한 기분에 한여름은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무슨 되지도 않게 멋있는 척인가.
“왔냐.”
여전히 바다를 바라본 채, 김무공이 입을 열었다.
탄탄한 근육에 말간 해질녘 노을이 내리쬐는 모습이....
‘조금 괜찮을지도?’
불현듯 드는 생각을, 한여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무시했다.
김무공과 반대로 한여름의 전신은 만신창이였다.
정체 모를 온갖 풀들이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찢겨나간 데다가 뒤로 묶은 머리는 이미 땀에 절어있었다.
터벅터벅 걸어간 한여름이 김무공의 옆에 앉았다.
“마실래?”
딱 한 모금 남은 귀중한 코코넛 수액을 김무공이 양보했다.
“이, 이건...!”
고작 한 모금이었지만 한여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로를 한 방에 날려주는 맛이었다.
“더 없어?”
“오냐. 이게 끝이다.”
“왜?”
“왜긴, 없으니까 없지.”
한여름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내일 또 먹을 수 있으니 기다려라. 이건 시간이 좀 필요해.”
아쉽게도 코코넛 수액은 줄기에서 흘러나오는 걸 채취하는 거라 시간도 좀 걸리고, 무엇보다 금방 발효되는 특성상 오래 보관할 수도 없었다.
“오느라 고생했다.”
만신창이가 된 한여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김무공이 말했다.
“응.”
한여름이 김무공의 등판에 머리를 톡 박았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다소 먼 거리에서 녹색의 눈동자가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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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실 내부에서 교수들은 곳곳의 디스플레이를 주시했다.
특히 청하 교수의 시선은 아까부터 한 곳에 꽂혀있었다.
“확실히, 김무공 생도는 유능하오.”
서늘한 인상의 낭아권狼牙拳 풍지해 교수가 청하 교수와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풍지해 교수는 헌터 출신으로 아카데미 교수직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그간 몇몇 수업에서 본 김무공의 인상은 풍지해 교수 뇌리에도 깊게 각인됐다.
대부분 생도들은 생존술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써먹질 못했다.
막상 무인도 해변에 뚝 떨어트려 놓으니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허둥지둥하기 바빴다.
아무래도 귀족처럼 편안하게 자란 생도들이다 보니, 기초적인 생활력 부분에서 문제가 큰듯했다.
반면 김무공은 달랐다.
그는 해변에 내리자마자 곧장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물가를 찾은 뒤, 임시 거처가 될 장소까지 순식간에 확보했다.
게다가 주변의 대나무를 이용하여 집을 짓는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반면 김무공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두 생도도 있었다.
먼저 한여름.
그녀는 나무 아래 주저앉아 지도와 나침반, 자를 들고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갑자기 광전사라도 빙의한 것처럼 미친 듯이 돌진했다.
혹시 심리적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닌가 교수들끼리도 갑론을박이 심했지만, 청하 교수가 나서서 좀 더 지켜보자는 의견을 개진한 덕에.
어느 순간부터는 한여름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김무공이 있는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간 거였다.
분명 통신 수단은 없었고 한여름 역시 그런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한여름은 결국 김무공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천하연.
“천하연 생도는... 다시 봐도 믿기지 않소이다.”
“그는 저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죠.”
청하 교수가 굳은 얼굴로 입술을 뗐다.
처음 낙하할 때, 천하연은 아예 낙하산을 벗어 던져버렸다.
교수들이 경악할 새도 없이, 천하연은 천천히 낙하 속도를 조절해가며 천상제로 어딘가를 향해 내려갔다.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허공을 걷는 천하연의 모습에선 벌써부터 절대자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런 천하연의 발길이 닿은 곳은, 한여름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의 나무 위였다.
우거진 밀림의 나무들은 수십 미터가 넘어가는 경우가 흔했고, 기척을 숨겼는지 한여름은 천하연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천하연은 고절한 신법으로 나무 위를 밟아가며 한여름의 경로를 따라갔다.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인 한여름과 반대로, 천하연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마침내 한여름과 김무공이 만난 걸 확인한 천하연은 갑자기 먼 거리의 아카데미 소유 드론들을 보더니.
입가에 검지 하나를 대고 ‘쉿.’ 하는 입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곤 한여름과 김무공 근처의 감시 드론들에 지풍을 날려 모조리 파괴해버렸다.
마치 방해하지 말라는 듯.
“어떻게 합니까? 예비 드론을 더 보냅니까?”
드론을 조작하던 직원이 당황하면서 교수들에게 물었다.
“...원래 생도들이 피난처를 만들면 그 지역은 최소한의 감시만 하게 되어있어요.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요. 천하연 생도의 말도 그거겠죠. 가까이서 지켜보는 건 불쾌하다. 사적인 것까지 너무 관찰하려 들지 마라.”
청하 교수가 치지직거리는 화면을 보며 말했다.
“흠... 예비 드론은 괜찮습니다. 어차피 목숨이 위험할 경우 감지 가능하니. 아마 천하연 생도의 행동을 고려했을 때, 더 보낸다 해도 의미는 없을 겁니다. 저건 우리에게 선언한 겁니다. 이 범위 안으로 들어오면 모조리 파괴할 것이다. 확실히 올해 생도들은 재밌습니다.”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하던 총책임자 고승빈이 결론을 내렸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지만, 벌써 몇 번이나 이 평가를 주관해왔던 고승빈조차 지금의 광경은 자못 흥미로웠다.
***
터벅터벅.
내 뒤를 한여름이 졸졸 따라왔다.
얼마나 험하게 이쪽까지 달려왔는지, 한여름의 외형에는 멀쩡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시간을 보니 가혹한 열대 우림을 무작정 뚫고 온 듯했다.
“...이거 원래 있던 거 아니지?”
내가 만든 임시 거처의 모습을 보며, 한여름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럴 리가 있겠냐. 내가 한 땀 한 땀 만들었다. 진흙은 아직 덜 굳었지만.”
물론 마냥 굳기만을 기다린 것은 아니고.
틀을 잡고 열양지기를 이용하여 빠르게 수분을 날려버린 덕에, 이젠 확실히 ‘집’ 같은 모양새로 변했다.
이것도 일종의 초가집이라면 초가집이었다.
지붕이랑 벽이 일부 진흙을 제외하면 대부분 야자수잎이라 그렇지.
“너 대단하구나?”
“니가 더 대단하다. 대체 얼마나 다급히 왔길래 그 거리를 하루 만에 도착하냐.”
“정글 싫어서 그렇지. 노숙하면 안 되니까.”
꼬르르륵-
갑자기 한여름의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펴졌다.
“이, 이거 생리현상이다?”
“오냐. 밥 먹기 전에 일단 좀 씻어야겠는데.”
위아래를 슬쩍 훑어보자 한여름이 손으로 가슴 언저리를 가렸다.
“보지 마.”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에 뭘.”
“아니 지저분하잖아.”
“그건 그렇다만.”
“...너 진짜 빈말로라도 아니라곤 안 하는구나.”
한여름이 어깨를 추욱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신 말에 진정성이 실리잖냐. 그러니까 내가 이쁘다고 하는 건 빈말이 아니겠지?”
“헤헤, 그건 좋아.”
한여름이 다시 만면에 미소를 띠고 헤실헤실 웃어댔다.
하여간.
단순한 성격이다.
“따라와, 근처에 개울가 있어.”
한여름이 배낭에서 주섬주섬 위생용품을 꺼냈다.
화장품까지 하나하나 챙기는 건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위생용품은 주어졌다.
“생각보다 깊네. 맑고.”
한여름이 개울가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운이 좋았지.”
이건 나로서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무인도에 밀림의 더러운 흙탕물이 아닌, 맑은 개울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내가 오면서 봤던 개울은 끔찍했거든. 들어가기도 싫어서 존나 뛰어넘고 다녔다니까. 어우....”
한여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어딜 지나온 건지 원.
궁금할 정도였다.
“고생했다.”
“응. 나 이제 씻을래.”
“어 씻어.”
“...응?”
한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문제 있냐?”
“아니, 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데?”
“밤인데 혹시 모르잖냐. 글고 네 배낭은 지켜야지.”
한여름의 생존 키트 배낭은 내가 들고 있었다.
“그냥 내 몸이 보고 싶다 말해. 솔직하지 못하네.”
“이미 볼 거 다 봤는데 뭔. 빨리 씻기나 해. 지금 네 꼴 보면 시궁쥐가 친구 하자고 하겠다.”
“넌 안 씻어?”
“나도 씻긴 해야지. 너부터 씻어.”
옆을 두리번거리던 한여름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할 말 있냐?”
“같이 씻자.”
“오면서 코코넛에 머리 맞은 거 아니지?”
“너무해.”
한여름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실수했다.
입술을 댓발 내밀고 샐쭉거리는 게, 저건 진짜다.
진심으로 삐진 것이다.
“농담임. 잠시 주변에 감시 드론 있나 살펴보고 있었지.”
“아, 그렇네.”
고개를 끄덕이며 한여름이 얼굴을 풀었다.
기감을 넓혀 살펴보고, 눈에 내공을 집중해 안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도.
의아할 정도로 감시 드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귓가에도 풀벌레 우는 소리만 요란했다.
드론이 내는 비행음 같은 건 감지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무가 우거진 장소를 찾아, 근처 바위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실은 나도 땀에 절어있는 건 똑같았던지라 아까부터 씻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옷을 한여름이 조심스럽게 벗고 물가에 들어갔다.
슬슬 해가 떨어져 미세한 달빛만이 우리를 비췄다.
“잠시.”
나는 한여름의 배낭에서 램프를 꺼내 불을 켰다.
“오, 그런 것도 있었어?”
한여름이 신기한 듯 내 근처로 다가왔다.
“가슴 보인다.”
“더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