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31)

어깨를 활짝 펴면서 한여름이 가슴을 내밀었다.

램프의 노란 조명이 비치면서, 새하얀 피부와 출렁거리는 가슴이 물 밖으로 드러났다.

“넌 부끄러움도 없냐.”

“있는데?”

“퍽이나.”

나도 훌렁 옷을 벗어 던지고 천천히 발을 담갔다.

세수하고 이빨을 닦고.

사이좋게 기본적인 세안을 마쳤다.

“이렇게 칫솔 들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한여름이 어딘가 아련한 표정으로 칫솔을 응시했다.

“그러게. 예전엔 겜하다 밤 엄청 샜는데.”

지금처럼 다 벗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때도 밤샌 뒤 사이좋게 칫솔 들고 씻긴 했었다.

“근데 어떻게 한 번을 안 덮쳤냐.”

“뭘 덮쳐. 내가 미쳤냐.”

“아니, 보통 그 있잖아.”

“응?”

“한 집에서 같이 놀다 보면 사고 칠 만도 했는데 말야.”

“맨날 교복 입고 있던 애를 미쳤다고 덮치겠냐.”

우리나라에는 아청법이라는 지엄한 법이 있다.

혹시나 미성년자 건드려서 강간이라고 신고라도 당했다간 인생이 ‘꼬인다’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 생은 포기하는 게 나을 정도로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되거든.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보통 남자들은 여고생이라면 환장한댔어. 특히 교복 입은.”

“누가 그래? 그 말 한 사람 경찰에는 안 잡혀갔냐? 비슷한 범죄자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거 같은데. 성이 고씨였던가.”

“몰루?”

“암튼, 난 상식인이거든.”

“그때 덮쳤으면 교복 섹스 가능했는데.”

푸흡. 입안을 헹구다 그대로 뿜었다.

“무친련.”

“에잇, 더럽게.”

촤악- 한여름이 개울물을 잔뜩 내게 날려댔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이 거리에서 누가 들어. 어차피 이렇게 섹스했을 거면 내가 먼저 덮칠 걸 그랬어.”

“응, 안 당함. 그때는 내가 힘 더 강했거든.”

“에이씨. 1년만 빨리 빙의하지.”

“아니, 왜 그리 교복 섹스에 집착하는데.”

“해보고 싶잖아. 원래 금기를 저지르고 싶은 건 사람 본능이거든. 좀 더 파릇파릇할 때. 얼마나 좋아?”

“암튼 안 된다.”

나쁘진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절대 안 된다.

우리나라에선 여러모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위험한 일은 최대한 자제하는 게 낫지.

“정 하고 싶으면 아카데미 교복 입든가.”

“그건 느낌이 다르지. 나 머리 감을래.”

“어, 여기 비누.”

“땡큐.”

샴푸 같은 사치는 당연히 기대할 수도 없었다.

물론 비누도 충분히 사치품이었지만.

생존키트에 식수나 먹을 건 단 하나도 없었는데, 이런 위생이나 의약품 부분은 의외로 꼼꼼하게 제공됐다.

“환경 오염 오지겠네.”

맑은 개울물에 비누 거품이 둥둥 떠다녔다.

“친환경이겠지. 나 등.”

한여름이 등을 내밀며 뒤돌아섰다.

“에휴....”

자연스럽게 거품을 내 등을 닦아줬다.

잡티 하나 없는 부드러운 살결을 손바닥으로 열심히 문질렀다.

“얍.”

어느 정도 비누칠이 끝나자, 갑자기 한여름이 내 가슴팍 쪽으로 몸을 기울여버렸다.

자연스럽게 한여름의 허리를 양팔로 감싸 지탱했다.

덕분에 마치 뒤에서 내가 한여름을 껴안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뭐 하냐?”

물에 젖은 촉촉한 머리카락에서 나는 부드러운 향기가 코를 찌르고, 매끈매끈한 피부의 감촉이 그대로 내 몸을 짓눌렀다.

“좋으면서.”

“....”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근데 만약 이거, 아카데미에서 감시하고 있었으면 대참사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막상 거부하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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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좋다.’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했다.

그것은 기억력일 수도 있고, 사고 능력 부분일 수도 있고, 인지 능력, 언어, 추론.

심지어는 ‘사회성’ 조차 지능의 한 갈래에 들어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천하연의 ‘지능’은 어떤 기준을 들이밀어도 탁월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

먼 거리에서 김무공과 한여름을 물끄러미 관찰하던 천하연은 평정심이 흐트러질 뻔한 걸 애써 진정시켰다.

씻는답시고 사이좋게 옷을 벗고 냇가에 들어간 것까진 괜찮았다.

어쩌면 격의 없는 사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둘이서 자연스럽게 나눈 대화는.

결국, 천하연의 머리를 새하얗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초인이나 다름없는 천하연의 감각은 안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당연히 청력도 그만큼 좋았고, 둘의 말소리는 먼 거리에서 지켜보던 천하연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천하연의 뇌리를 순식간에 잠식한 단어.

섹스.

영특한 그녀답게, 이론으로는 알고 있었다.

남녀 간의 교합. 음양합일.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질에 삽입되어....

그런 학술적인 내용은 서적을 통해 충분히 익혔다.

둘의 대화를 보면 이미 갈 데까지 간 모양이었다.

‘연인은 아니라 하지 않았나?’

분명, 최근까지도 김무공은 부정했다.

귀족처럼 떠받들어지며 자라온 천하연으로서는, 연인도 아니면서 저러고 있는 둘의 모습이 그야말로 컬처 쇼크였다.

당장 아비인 천마만 해도 혼인 전까지 연애 금지령을 내린 것도 모자라, 남장까지 시켜버리지 않았는가.

천하연의 기준에서 섹스=혼인할 자이거나 혼인한 사이에서나 하는 것.

이라는 완벽한 구시대적 관념이 머리에 박혀 있었다.

아니면 최대한 양보하더라도 연인 사이에서만.

게다가 한여름이 교복 섹스 운운한 순간, 발을 헛디딜 뻔했다.

학생이 섹스라니...!

보수적인 천하연의 관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무림세가 대부분 여식들은 어마어마한 엄격함을 자랑했다.

부모가 자식을 통제할 ‘무력’과 ‘수단’이 철저하게 갖춰진 곳이 무림세가였으니까.

게다가 무공 유출 같은 문제도 있기에, 연애 관계에서는 엄청난 보수성을 자랑했다.

한 마디로, 지금껏 천하연은 실전적인 성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저렇게 알몸의 남녀가 껴안고 있는 걸 다짜고짜 보는 건, 그녀 입장에선 자극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심지어 둘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다.

한 명은 밤마다 살을 맞대고 자는 사내였으며, 한 명은 이제 나름 ‘친우’의 범위에 넣을 수 있는 여성이었다.

이론으로만 알고 있다 하나, 결국 이건 본능적인 부분이었으니.

천하연의 뇌리를 점점 음란마귀가 잠식하기 시작했다.

분명 서로의 사생활은 존중해줄 필요가 있고, 지켜보면 안 된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냉철한 그녀였으나, 어째서인지 이번만큼은 둘의 모습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미쳤구나.’

미쳤다.

이래선 안 된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으나, 이미 본능에 잠식당한 몸은 움직임을 거부했다.

그 순간.

천하연의 뛰어난 지능은 다른 가능성을 도출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고야 말았다.

자신의 성벽性癖이 무엇인지.

***

- 꼬르르르륵.

눈치 없는 한여름의 배에서 소리가 울려 펴졌다.

내가 위장을 살짝 압박해서 그런 것도 있는듯했지만.

덕분에 반쯤 나가버렸던 내 이성도 집을 찾아 돌아왔다.

“...에이씨.”

비슷한 감상을 느꼈는지 한여름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른 씻고 뭐나 좀 먹자.”

촉촉하면서도 말랑말랑한 살덩이를 안고 있는 느낌이 사뭇 좋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이곳은 야외 한복판이었다.

까딱했다간 남들이 보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빠르게 씻는 걸 마치고 내기를 돌려 몸의 수분을 털어냈다.

“머리 말려줄까?”

한여름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지만, 아무래도 기다란 머리는 쉽게 마르지 않는듯했다.

“괜찮아. 알아서 마르겠지.”

슬쩍 자신의 머리칼을 배배 꼬던 한여름이 고개를 저었다.

“근데 뭐 먹을 건 있어?”

“잠시.”

한여름의 배낭에서 은박담요를 꺼내 자리에 깔았다.

그리고 한구석에 박아놨던 코코넛을 꺼내 물은 따로 담고, 반으로 쪼갰다.

“이건 왜?”

“안에 파먹고 있어. 과육은 100g당 300칼로리 정도. 생존술 수업 때 배웠잖냐.”

“아, 그렇지. 기억났음.”

자리에 털썩 앉은 한여름이 야무지게 코코넛을 파먹기 시작했다.

‘잘 먹는고만.’

하여간, 언제 봐도 먹성은 좋다.

나무 조각들과 잎을 모아 열양지기를 때려 박았다. 곧바로 화르륵 불이 피어오르며 장작이 타올랐다.

“혈수마공 편하넹. 파이어 스틱 같은 것도 필요 없구나.”

코코넛 과육을 우물거리면서 한여름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쳐다봤다.

확실히 불 피우는데 도구를 쓸 필요도 없다는 건 편리하긴 했다.

“근데 이걸로 뭐 하게?”

“기다려봐.”

나는 아까 잡아놨던 ‘그것’을 근처에서 가져왔다.

“...뭐야 이거?”

한여름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내 손을 쳐다봤다.

이해한다.

처음 보면 비주얼이 좀 그렇긴 하지.

색깔도 좀 이상하고.

바둥바둥하는 게 꼭 거대 거미 같기도 했다.

“코코넛크랩. 야자수 나무 근처에는 얘들 사는 경우가 좀 있거든. 운이 좋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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