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31)

“오냐. 이 정도는 괜찮아.”

열대 소낙비가 거세긴 해도, 그것까지 고려해서 단단하게 기초를 다지고 지지대를 세워놨다.

“습기 쩌네.”

“좀 날려 봐.”

“왜? 뽀송뽀송해지면 하고 싶은 거 있어?”

“응 있음.”

“뭔데?”

입가를 가리고 한여름이 배시시 웃었다.

딱 봐도 뭔가를 기대하는 말투였지만 어림도 없다.

“잠.”

“솔직하지 못하네. 진짜 잘 거야?”

“피곤해.”

“거짓말.”

“사실 거짓말 맞긴 한데. 너 괜찮냐?”

“움....”

이전과 달리 음양합일 필요 주기도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체 내부의 기운이 점점 안정을 되찾아서 그런지.

“어제 아래 좀 부은 거 같던데.”

“알면 좀 소중히 다뤄주지. 짐승 같았어, 진짜.”

한여름이 입술을 샐쭉거리면서 눈을 흘겨댔다.

“다음부턴 오기 부리지 말고 빨리 항복해라.”

“...그럴 거야.”

승패 따지는 습관은 섹스에도 적용되는지 원.

하나를 지기 싫어한다.

그래 봐야 패배하는 건 똑같은데.

근성 하나는 인정해줄 만했다.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한여름이 째릿 하고 나를 노려봤다.

“뭐냐 그 눈빛은.”

“두고 보자.”

“그 말 안 지겹냐?”

“단련해서 10초 만에 싸게 만들어버릴 거야.”

“지금도 힘 강하게 주면 좀 아픈데 굳이 그러지 마라.”

과거의 평범한 나였다면 싸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반으로 뚝 부러지거나 미세 골절로 심대한 타격을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한여름의 ‘조임’은 강력했다.

무인들이 왜 무인이랑 결혼하는지, 굳이 몰라도 될 비밀을 깨달은 느낌이었다.

“쪼인다는 건 맞네?”

“맞으니까 좀. 안 부끄럽냐?”

“너도 안 부끄러운 거 같은데?”

헤실헤실 웃으면서.

은근슬쩍 내 근처로 다가와서 손가락으로 아랫도리를 툭툭 건드렸다.

“...이런 대화하면 참기 힘들거든. 꼴리잖냐.”

“나도 꼴리니까 참지 마. 누가 참으래?”

“후회할 거다.”

“흥.”

고개를 홱 돌린 한여름의 어깨를 부여잡고 바로 눕혔다.

아무래도 누가 우위인지 이번 기회에 확실히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

그렇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나 죽어....”

후들거리는 다리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한여름이 몸을 일으켰다.

한여름의 전적은 0승.

다만, 서로를 너무 짐승같이 탐했기에 좀 민망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 주제에 뒷치기는 끝까지 ‘절대’ 못 하게 하는 심보는 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한여름은 여성 상위를 연습한답시고 밤마다 신나게 허리를 움직인 덕에 매번 아침마다 저 꼴이었다.

밤에 비가 자주 내려 소리가 묻히고, 누가 근처에 안 와서 다행이었지.

혹시라도 열심히 하던 중에 들켰다면....

매우 자퇴가 마려웠을 거다.

그러던 와중에도 착실히 계획은 진행됐다.

이제 섬 중심부로 가는 길목이 어느 정도 파악됐고, 무엇보다 ‘빵나무’를 발견했다.

물고기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빵나무 열매. 불에 구우면 실제로 빵 비슷한 향이 나는 신기한 열매였다.

맛은 고구마와 감자의 중간 정도.

엄청 맛있다 정도는 아니었지만, 탄수화물에 대한 갈망을 대체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슬슬 섬 중심부로 가서 타마토마를 노려볼 때가 됐다.

이미 도달한 생도도 있을 수 있기에 세심한 준비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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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들 간의 싸움은 금지였다.

하지만 이런 밀림에서는 언제나 우발적인 사고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나나 한여름이나 서로 협력을 통해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지만(한여름은 논란의 여지가 좀 있을지도) 다른 생도들은 아마 꼴이 말이 아닐 거다.

따지고 보면 귀족가 도련님, 아가씨들에게 다짜고짜 험난한 무인도 생활을 강요한 것이었으니까.

그나마 모든 불편함을 높은 경지의 힘으로 극복해버릴 수 있는 천하연 정도나 예외일까.

피로에 찌들어 일상적인 판단력도 흐려진 상태에선 실수하기가 쉽다.

당연히 기감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위험 요소가 있으면 최대한 조심하는 게 맞았다.

“서방님 다녀온다. 집 잘 지키고.”

미리 준비해놓은 배낭을 들쳐메고 한여름을 향해 말했다.

“그놈의 서방님. 조심해. 다칠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오냐. 어차피 위험한 종은 아니라니까.”

“집 관리하고 있을게.”

“그래. 간다.”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한여름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손을 휘휘 저으며 거주 지역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심혈을 기울인 무인도 도로정비사업 덕에, 이젠 탁 트인 길이 자못 봐줄 만했다.

물론 이것도 일부에 불과한 데다가 금방 나무로 뒤덮이겠지만.

어차피 평가 끝날 때까지만 버텨주면 그만이니까.

느긋하게 경공을 써서 이동했다.

목표는 섬 중앙산의 중턱 인근.

어제, 타마토마가 서식하는 걸 멀리서 확인했었다.

한두 마리가 아닌 거로 보아 아마 그 근처가 집단 서식지인 듯했다.

익숙하게 정글을 가르며 나아간 끝에,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반적인 동물과 명백히 다른 기를 가진 생물.

변종 몬스터 타마토마의 기척이 기감에 느껴졌다.

과거였다면 아마 영물로 착각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크기만 봐도 코코넛 크랩을 한 100배쯤 확대해 놓은 형태긴 했다.

저런 게 ‘초식성’이라는 게 신기했지만.

어찌 됐든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는 중이라 아직까진 나를 인지하지 못했다.

한 달 동안 나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혈수마공은 SSS의 초월적인 등급답게, 손으로 하는 모든 게 망라된 종합적인 무공에 가까웠다.

때문에 권, 장, 지, 조의 용법을 포함하여 온갖 초식이 있었다.

세밀한 진기수발능력이 필요하여 그간 사용하지 못했던 지법 역시 어느 정도 익히는 데는 성공했으나.

혈수마공의 지법은 기본적으로 탄지공처럼 원거리에서 기를 쏘아내는 수법이기에, 저것을 상대로 통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은 확실하게.’

천마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의념을 정제했다.

인지해도 상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타마토마와 나의 위치를 가늠하고, 용천혈에서 추진 경파를 뿜어내며 의념의 힘으로 상대를 찍어누른다.

정종 무공을 익힌 대상에게 효과는 반감되었으나, 마기를 지닌 것들에게는 인간이든 몬스터든 가리지 않고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군림보라는 이름처럼 애초에 이 보법은 조화를 중시하지 않았다.

오로지 상대를 억압하고 찍어누르기 위한 파천의 무공.

그것이 천마군림보의 묘리였으니.

경지가 오르면서 과거에 무혼을 통해 본능적으로 사용했던 것들을 이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문득, 처음 제대로 천마군림보를 시전했을 때 천하연의 경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걔가 그 정도로 평정심이 흐트러진 건 처음 봤다.

천마신공의 기운이 기분 좋게 혈도를 순환하는 걸 느끼고, 일 보를 내디뎠다.

쿵-

견고하게 지면을 박차는 움직임에 맞춰 동심원으로 공력 파동이 뻗어 나갔다.

마치 광역 제압기처럼,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주변의 모든 생물들이 기파에 억눌렸다.

그건 타마토마도 마찬가지였다.

몬스터란 기본적으로 마기를 지닌 존재였고, 변종이라 하나 예외는 없었다.

몸이 굳은 놈을 향해 나선의 경력이 실린 장을 뻗어냈다. 혈수마공의 구결에 따라 장심에 이글거리는 열기가 뭉쳤다.

일반적인 혈수마공의 초식들보다 훨씬 응축된 기운이었다.

퉁-

철판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

농밀한 기운이 어린 손바닥이 타마토마의 단단한 갑피에 닿자 반투명한 충격파가 원형으로 뻗어 나갔다.

혈수마공 血手魔功

암연육양장 黯然六陽掌

막대한 열기가 주변을 감싸며, 어지러운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느긋하게 손을 내렸다.

검붉은 불길이 타마토마 내부로부터 타오르며 갑피를 뒤덮었다. 마치 연꽃 모양의 불이 피어오르는듯했다.

매캐한 탄내와 갑각류 익는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혈수마공 초식 대부분이 그렇지만, 암연육양장 역시 내부에 직접 강한 열기를 때려 박는 탓에 위험도가 남달랐다.

천마신공과 태양지체, 그리고 혈수마공은 기이할 정도로 조합이 좋았다.

방금 공격을 하며 느꼈다.

연습하면서도 생각했지만, 이건 평범한 인간 상대론 봉인해야 할 초식이다.

아무런 버프를 받지 못해도 이 정도면....

대련 시엔 아무리 힘 조절해도 상대 내장에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줄 가능성이 컸다. 괜히 혈수마공 경지가 3성에 오르고 나서부터나 쓸 수 있었던 게 아니다.

대신 혈살귀나 적혈귀처럼 외부 표면이 단단한 놈들 상대로는 역시 특효약이었다.

맹렬한 화마에 내부부터 깡그리 불타 녹아버린 이 타마토마 같은 신세가 되겠지.

조각난 갑피 사이로 반짝이는 보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타마토마 마석인가.’

전에 잡았던 오크 마석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뜨거운 열기에도 마석 자체는 손상이 없었다.

대충 타마토마 내구 파악은 끝났다.

이 정도면 굳이 의념을 쓰지 않고 혈라지血羅指로 원거리에서 가격해도 충분히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찬찬히 기감을 퍼트리면서 다음 대상을 물색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

달려가면서 혈라지를 연달아 날려 타마토마의 신경 중추 마디마디를 끊어냈다.

쿵-

통제를 잃은 타마토마가 쓰러지는 것에 맞춰 손날을 세워 진기를 모아 내질렀다.

나선의 경력이 단단한 갑피를 단숨에 뚫고 들어갔다.

탄력 있는 살 사이로 손끝에 느껴진 이질감.

타마토마 마석의 느낌을 확인하고 곧바로 뽑아버렸다.

이런 식으로, 굳이 무리해서 의념을 쓰지 않아도 이젠 능숙하게 사냥하는 게 가능했다.

20마리. 내가 지금껏 사냥한 타마토마의 숫자였고, 덕분에 이젠 주변에서 놈들을 찾아보기 슬슬 힘들어졌다.

열양지기를 일으켜 마석의 겉을 깔끔하게 태우던 도중, 천마신공의 기운이 무언가에 반응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걸 느낀 적이 있었다.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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