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안 놓친다.’
혈라지를 가볍게 날리면서 곧바로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그동안 가물가물했지만, 이젠 확실했다.
수십 미터나 되는 나무를 평지처럼 달려 끝에 도달하기 직전.
꽈아아아아앙-!
마치 소닉붐이 터지는 것처럼, 굉음이 울려 퍼졌다. 놀란 새들이 파드득 날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뭐야 이거.’
태양이 내리쬐는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난 보고야 말았다.
저 멀리, 한 번도 본 적 없던 금발 사내가 부리나케 숲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 처음 보는 생김새였으나, 나는 보자마자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얌마.’
이왕 바꿀 거면 머리 색도 바꿨어야지.
지금 무인도에 들어온 인원 중에서 ‘금발’은 오직 한 명뿐이다.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나무 꼭대기를 다 박살 내면서 천하연이 도망쳤다.
빠르게 나무 위를 옮겨 다니며 천하연의 궤적을 좇았다.
어쩐지, 내 천마신공天馬神功과 공명할만한 무공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껏 같은(?) 천마신공만이 서로를 인지하고 반응했었으니까.
의심은 계속했었으나, 이젠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천하연-!”
내공을 실어 사자후처럼 소리치며 달렸다.
마침내, 나는 우두커니 멈춰선 사내가 있는 위까지 도달했다.
타닥-
나무를 내려와서 사내의 앞에 섰다.
“여기서 뭐 하냐?”
슬쩍 시선을 피한 천하연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부분은 언제나처럼 고아한 품위를 유지했으나, 두 눈두덩이가....
무슨 판다를 연상케 할 정도로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았다.
“난 천하연이 아니다.”
...뭔 소리야 또.
저런 아름다운 금발은 아카데미에서 오직 한 명뿐인 데다가, 언제나처럼 몸에서 풍기는 목단향은 감춰지질 않았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저런 향기가 나는 걸 보면 애초에 체취 자체가 저런 건지.
사뭇 신기할 따름이다.
어찌 됐든, 주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저런 향기를 내뿜고 다니는 것 역시 천하연뿐이다.
“그럼 누군데?”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면서 물었다. 이러니까 장난치고 싶어지잖냐.
“...모른다.”
“기억을 잃으셨어?”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구나.”
천하연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결국 나와 눈을 마주쳤다.
“천하연 맞으면서 뭘. 왜 이번엔 다른 모습이냐?”
주변을 두리번거린 천하연이 지풍을 날려 드론들을 싹 떨궈버렸다.
이윽고 천변만화술을 풀고, 여성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드론도 아카데미 자산인데 괜찮아?”
“이미 백 대는 넘게 부쉈으니 상관없구나.”
“굳이 백 대를....”
이어서 말하려던 나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본능적으로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수송기에 타기 전, 천하연에게 부탁을 하나 했었다.
‘혹시 한여름의 근처에 착지하면 멀리서라도 좋으니까 좀 봐달라.’
내 부탁에 천하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천하연이, 내 부탁을 ‘과도할 정도로 충실하게’ 들어준 탓에.
기척을 숨기고 한여름의 경로를 추적해왔다면?
뇌리를 잠식하는 한 가지 끔찍한 가능성.
만일 그랬다면 천하연의 종착지는 내 피난처였을 게 분명했다.
드론을 백 대 넘게 떨궜다.
혼자 편안히 운기조식만 했을 거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갑자기 지금까지 일주일간 한여름과 저질렀던 모든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상할 정도로 감시가 없었던 주변 상황.
그리고 ‘원래라면’ 다크서클 따위는 있을 리 없어야 정상인 천하연의 눈가.
다시금 내 시선을 은근히 피하면서 고운 아미를 찡그리는 걸 보면,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입가를 부들부들 떨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봤냐...?”
움찔.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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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졌다.
왜 천하연의 가능성을 배제했을까.
본능에 이성이 잠식당하니 이런 실수도 하는구나 싶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천하연의 머리가 뚜두둑 옆으로 돌아갔다.
내 시선을 피하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면서,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발.
그럼 그렇지.
하루 이틀 가지고 천하연 정도 경지의 무인이 다크서클 생길 리가 없었다.
최소한 며칠은 지켜봤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라니.
일주일 내내 잠도 안 잔 모양이었다.
그간 느껴진 기척을 토대로 판단해 보면 낮에는 내 주변을 맴돌았던 거 같고.
애초에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고작 내게 기척을 감지당할 일도 없었다.
이렇게 들켰다는 것부터, 지금 천하연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증명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양손으로 이마를 쓸어올렸다.
어차피 지난 일이다.
내 부탁 때문에 발생한 사고고 누굴 탓할 것도 없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털썩 앉았다.
천하연도 내 옆에 딱 붙어서 앉았다.
맞닿은 살에선 조금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꿉꿉한 날씨에도 온몸이 뽀송뽀송한 게, 역시 경지가 깡패긴 깡패다.
“뭐라도 먹을래?”
괜히 뻘쭘한 기분에 배낭을 뒤적였다.
“나는 괜찮다.”
“그, 미안하다. 괜히 내 부탁 때문에. 못 볼 꼴을 봤네.”
“아니다. 내가 멀리 물러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구나. 못 볼 꼴... 까진 아니었다만.”
천하연이 침울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딱 봐도 자괴감에 휩싸인 얼굴이었다.
나와 한여름의 짐승 같은 섹스가 천하연 같이 순수한 처녀에게 얼마나 큰 자극이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한여름 따라왔으면 인사는 하지.
라고 말하려 했지만, 벌렸던 입을 즉시 다물었다.
천하연이 왜 몸을 숨겼는지는 짐작 갔다.
우리 둘을 배려해준답시고 조용히 지켜만 봤을 테고, 그러다가 갑자기 섹스하는 광경을 보게 된 거겠지.
내가 만든 피난처는 당연히 천하연 정도 되는 무인의 눈까지 막진 못한다.
“여름이한텐 비밀로 하자.”
이미 본 건 어쩔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실을 한여름에게 알리는 건 껄끄러웠다.
“...그러는 게 낫겠구나.”
천하연도 고갯짓으로 동의를 표했다.
“이제 어쩌게?”
“뭘 말이지...?”
“계속 근처에서 이렇게 지낼 거야?”
“그대가 신경 쓰인다면, 멀리 물러나 있겠다.”
“딱히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닌데.”
나보다 압도적인 강자이자 차기 천마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천하연의 모습은 소박맞은 여인처럼 처량했다.
괜히 신경 쓰인다.
애초에 내가 한여름을 봐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으면 21일간 편안하게 지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상황이 된 건 내 지분도 컸다.
“괜찮다.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뿐이니.”
“좀 잘래? 봐줄게.”
천하연이 물끄러미 내 옆모습을 응시했다.
잠을 ‘덜’ 자도 되는 거지, 무인이라 해서 잠을 아예 안 자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운기조식으로 대체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하물며 천하연은 그간 운기조식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듯했다.
“잠시만 부탁하마.”
“그래. 무릎 빌려줄게.”
타마토마를 워낙 순식간에 처리한 덕에, 아직 시간은 많았다.
“고맙다.”
조심스럽게 내 무릎을 베고 천하연이 누웠다.
피로가 꽤 쌓였는지, 이내 내 무릎 위에선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하연의 긴 머리카락이 흙에 더러워지지 않도록 품 안에 모았다.
체취뿐만 아니라 머리칼에서도 진한 목단향이 풍겨왔다.
남의 머리카락을 잡고 하는 생각이라 변태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단 신기함이 앞섰다.
청하 교수의 몸에서 매화향이 나는 것과 비슷한 원리일지.
어찌 됐든, 이렇게 있으니 심신이 차분해지는 느낌이다.
천하연이 택한 장소는 비교적 습기가 적은 곳이라 찝찝함은 덜했다.
벌레야 간간이 있었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잠든 천하연의 아름다운 얼굴을 감상했다.
미인은 역시 보고만 있어도 좋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다란 속눈썹이 들썩이고, 이내 녹색의 고운 눈동자가 나를 쳐다봤다.
“잘 잤냐?”
“덕분에. 고맙구나.”
천하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작 한두 시간의 수면에 불과했는데도, 아까와 달리 천하연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진했던 다크서클도 희미해져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체 얼마나 안 잔 거냐?”
“글쎄다. 잔 기억이 없구나. 시간으로 따지면 1분도 안 잤다고 봐야겠지.”
“운기조식만 하면서?”
끄덕.
진짜 괴물은 괴물이다.
인간의 수면 한계가 짧으면 3에서 4일, 길면 10일 정도 된다지만.
천하연은 단순히 ‘버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공과 몸을 써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다녔다.
밥은커녕 물도 제대로 먹지 않으면서.
아까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썼던 경공만 해도 소닉붐을 연상케 하는 폭음을 발생시켰다.
당연히 이 모든 걸 진기로 해결하려면, 내공 소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잠 잘 시간도 아껴서 운기조식을 했다는 얘기인듯했다.
“이제 어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