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있는 천하연을 보며 먼저 물었다.
“그대가 불편하다면 눈에 띄지 않는 거리까지 물러나 있도록 하겠다.”
“불편한 건 아닌데.”
“아니면....”
천하연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잠시 말을 망설였다.
천하의 천하연이 망설임이라니.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니면? 뭔데 뜸을 그리 들여?”
“...난 신경 쓰지 말고 그... 해도 된다.”
순간, 뇌정지가 왔다.
방금 내가 뭔 소리를 들은 건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아니다. 잊어줬으면 좋겠구나.”
머리를 푹 숙이고 천하연이 얼버무렸다.
한숨을 푹 내쉬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왜 이리 극단적이냐. 멀리 떠날 필요도 없고, 네가 보는 앞에서 할 생각도 없어.”
“...그런가.”
“오냐. 오늘부터 그냥 같이 지내자. 확장공사 해놔서 너 하나쯤 더 들어와도 충분히 잘만해.”
지그시 나를 쳐다보던 천하연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둘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 건 의가 아닌 것 같구나.”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뭘 그리 깐깐하게 굴고 그래. 너나 한여름이나 친구인데.”
“친구끼리 그... 보통 그렇고 그런 걸 하는 건가?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라지만.”
“아니, 보통은 안 하지. 걔랑은 좀 특별해서 그래.”
“특별하다라....”
작은 목소리로 천하연이 중얼거렸다.
“슬슬 그만할 때도 됐어. 너 말고 다른 사람에게 들킬 수도 있으니까.”
“하긴, 그도 그렇구나.”
천하연의 입가에 나직한 미소가 맺혔다.
“암튼, 오늘부턴 걍 같이 지내자. 여름이한텐 대충 내가 둘러댈 테니까. 반론 안 받음.”
“...배려해줘서 고맙다.”
다행히 이번에는 내 고집에 따라줬다.
하여간, 얘도 꽉 막힌 것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탁탁.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다시 남성의 모습으로 바꾼 천하연이 내 뒤를 따라왔다.
오늘 사냥은 끝이다.
타마토마 마석 20개. 이 정도면 한여름과 나눠도 오늘 할당량으론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마 10개 정도면 전체 통틀어서도 상위권이 아닐까.
***
‘특별하다....’
천하연은 김무공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 역시 김무공과 나름 ‘특별한’ 관계가 아닌가?
얼마나 더 특별해 져야 서로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걸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신 역시...?
입안을 맴도는 의문을 천하연은 속으로 삼켰다.
일주일 내내 둘의 섹스를 지켜보며, 천하연은 솟구치는 호기심을 참기 힘들었다.
덕분에 짬을 내면 잠을 잘 시간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잠들지 못해서 이 꼴이다.
만약 김무공을 따라가서 같이 지내게 된다면, 둘의 섹스를 더 보진 못하겠지.
‘아쉽구나.’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에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둘이 하는 걸 더 보지 못해 아쉽다니.
이 무슨 망측한 생각이란 말인가.
심마心魔다, 심마야.
천하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앙다문 입술 사이론 진한 숨이 흘러나왔다.
“컨디션 또 안 좋아?”
김무공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여간, 예리한 사내다.
비록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나,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것도 그렇고.
“만전까진 아니어도 이젠 괜찮다.”
머리를 흔들면서 천하연이 부정했다.
“그럼 다행이고.”
“...한 가지 물어도 되나?”
자그마한 목소리로 천하연이 물었다.
“뭔데?”
길가에 삐져나온 덩굴을 마체테로 정리해가며, 김무공은 답했다.
“그... 운우지락雲雨之樂이 그리 좋나?”
잠시 쭈뼛거리던 천하연이 내뱉은 말에, 김무공의 움직임이 즉시 정지했다.
고상하게 돌려서 표현했지만, 운우지락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운우지락이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야 하나?”
“아냐. 완벽히 이해했어.”
이 호기심 강한 처녀의 물음에 대체 뭐라고 답해야 하는가.
찰나에 김무공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가 오갔다.
‘미치겠군.’
천하연이 ‘그런 쪽’에 왕성한 호기심을 가진 거야,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걸 직접 물어올 줄이야.
“좋긴 하지.”
“그런가. 그 모습이 연기가 아니었단 말인가.”
굳은 얼굴로 천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얌마. 쫌.”
“미안하구나. 과한 질문이었다.”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지끈거리는 머리에 한 손을 올리고, 김무공이 장탄식을 내뱉었다.
대체 아비인 천마라는 작자가 지금껏 뭘 했기에 성교육이 빵점 수준인 건지.
직접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대 못 하지.’
천마 앞에 가서 당신 딸 성교육 좀 똑바로 하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애초에 남장을 강요한 것부터 보통 극성이 아니니, 그날로 관계를 추궁당하고 좋지 않은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괜히 어색한 기분에 둘은 말없이 걷기만을 계속했다.
이윽고 눅눅한 밀림을 뚫고 다시 집 근처까지 도달했다.
“나 왔다.”
모닥불 근처에 앉아, 한기를 발출하며 연방 손부채질하고 있는 한여름에게 김무공이 팔을 흔들었다.
“오, 왔...?”
벌떡 일어난 한여름의 눈동자가 점점 동그랗게 변했다. 현재의 천하연은 아카데미에서 남장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왜?”
김무공과 천하연을 번갈아 보던 한여름이, 결국 멍하니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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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토마 잡는 곳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집도 없이 혼자 지낸다길래.”
“아하.”
한여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표정에서부터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엿보였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쪽에서 마주친 건 맞잖아?
“미안하구나.”
천하연이 먼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내가 반강제로 끌고 온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니아니. 괜찮아. 편하게 지내.”
황급히 한여름이 양손을 내저었다.
“내가 끌고 온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한여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면서 말했다.
“딱히 불만 없거든.”
눈을 치켜뜨면서 한여름이 항변했다.
“오냐, 그럼 됐고. 밥 준비하고 있었어?”
도착하기 전부터 빵나무와 생선 굽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웅냐.”
“넌 어쩔래? 같이 먹어?”
내 옆에 서 있는 천하연을 보며 물었다.
“괜찮다. 물 조금이면 충분하구나.”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식사를 한다는 건 곧 배출이 필요하다는 얘기니.
공들여 개울가 저 멀리에 화장실을 만들긴 했지만, 무인도에서 대소변을 보고 처리하는 번거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인류 문명이 낳은 위대한 발명품, 수세식 화장실이 참으로 그립다.
천하연은 그런 ‘번잡한’ 과정을 피하는 방법으로 아예 식사를 금하는 걸 택한듯했다.
안 먹으면 배출할 일도 없으니까.
겉으로만 보면 고고한 모양새도 그렇고, 이슬만 먹고 사는 요정이 생각날 지경이다.
“그럼 들어가서 쉬어. 안에 자리 있으니까.”
끄덕.
나와 한여름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천하연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미리 배낭에 넣어둬라.”
타마토마 마석 10개를 꺼내 한여름에게 건넸다.
“이게 그거야?”
“오냐. 딱 반반.”
“나 한 것도 없는데. 너무 많이 가져가는 거 아냐?”
“식량이랑 밥 준비했잖냐. 그거면 충분하지.”
“...고마워.”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근처로 가서 앉았다. 내가 돌아오는 시간은 거의 일정했기에 한여름은 이런 식으로 미리 식사를 준비했다.
집 쪽을 힐긋 쳐다보더니, 한여름이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앉았다.
“근데 말야.”
내 허벅지 위에 한여름이 슬그머니 손바닥을 올리고,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음?”
“이제 못하겠지?”
“당연하지. 왜? 쟤 앞에서 하고 싶어?”
“아, 아니거든. 내가 변탠줄 알아?”
사실 천하연 앞에서 일주일 내내 짐승처럼 하긴 했다만.
역시 이건 비밀로 해야겠다.
“그럼 뭔데?”
[저기 들어가서 빠르게 살짝. 가능하잖아.]
입으로 내뱉긴 부끄러운지 한여름이 채팅을 보내왔다.
정글 쪽을 곁눈질로 가리키는 걸 보니 무슨 얘긴지는 알겠다만, 불가능한 짓이었다.
“여기 벗어나니까 감시 드론 천지더라. 바로 들킬걸? 교수들한테 생중계 하고 싶으면 하든가.”
“쳇, 안 되겠네.”
“오냐. 밥이나 먹읍시다. 할 만큼 했잖아.”
“그건 그래.”
한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선구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문어 잡았어?”
“야쓰. 잘했지?”
“좋네. 별식이고만.”
“헤헤.”
한 손으론 문어 꼬치를 들고, 다른 팔로는 한여름의 허리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