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개울가를 아스라이 비추면서 물에 젖은 촉촉한 금발 아래, 새하얀 가슴이 슬며시 드러났다.
어차피 나나 천하연이나 이 정도 어둠에 구애받진 않았지만, 은은한 빛에 둘러싸인 천하연의 모습은 현실감이 극도로 떨어졌다.
아무리 그간 반쯤 벗은 모습을 많이 봐오긴 했어도, 막상 실제 나신을 마주하니 파괴력 자체가 달랐다. 전술핵과 전략핵 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 미안하다. 있는지 몰랐어.”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뒤돌아섰다. 분명 기척은 감지했을 텐데, 설마 얘기를 안 할지는 예상 못 했다.
“...아니다. 내 불찰이구나.”
찰박찰박- 이내 물을 끼얹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얼마나 걸려?”
“잠시면 된다.”
천하연의 말대로 5분도 지나지 않아 사르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근처에 기척이 느껴졌다. 일부러 기척을 내면서 다가온 듯했다.
곁눈질로 슬쩍 보니 어느새 옷을 갖춰 입은 천하연이 내 옆 바위에 앉았다.
내기로 몸을 말리는지 천하연의 몸에선 연신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개울가로 가서 이빨 닦던 걸 마저 끝냈다.
천하연은 거리를 벌린 상태로 날 빤히 쳐다봤다.
“나 이제 씻으려는데.”
조금은 민망한 기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안 볼 테니 씻어도 된다.”
내게서 등을 돌리면서 천하연이 말했다.
역시, 묘하게 이상하단 말이지.
쟤가 거짓말을 할 성격도 아니니, 뒤돌아선 그녀를 두고 나는 훌렁 옷을 벗어 던졌다.
저 고고한 뒷모습을 볼 때마다 아까 봤던 광경이 눈에 자꾸 아른거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면 기숙사 돌아가서가 더 문제였다.
***
‘....’
김무공이 씻는 소리를 들으며 천하연은 고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음몽淫夢을 꾼 것도 처음이었지만, 하필 그 대상이 김무공이라니.
폭풍과 같은 자괴감이 휩쓸고 간 뒤에 일종의 성녀 타임을 천하연은 맞이했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정신 속에서 천하연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고야 말았다.
김무공과 밤마다 함께 자는 건 분명 효과가 있었다.
언젠가는 불완전한 천마신공이 스스로 완전해지는 걸 볼 희망도 생겼다.
그러나.
‘단순히 살을 맞대는 것’ 수준이 아닌, 아예 교합을 한다면.
김무공과 살을 맞대고 있을 때 알아서 움직이는 천마신공과 서로 진기를 끌어올렸을 때 발생하는 공명 현상.
그리고 김무공과 한여름이 운우지락을 나눌 때 보였던 ‘특이한 진기의 순환’.
일주일 내내 잠도 거르고 유심히 지켜보며, 하나하나 뇌리에 박힌 모든 것들이 올올이 풀어져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분석됐다.
그간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던 추측은 이내 강렬한 확신으로 변했다.
‘새로운 경지와 완전한 천마신공.’
천하연은 전율이 일었다. 머릿속을 누가 번개로 강타한듯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김무공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미 자신의 아비를 비롯한 전대 천마들이 답을 찾았을 테니까.
‘하아....’
천하연은 속으로 깊은 침음을 흘렸다.
확신에 가까운 답을 찾았으면 뭐하나.
다짜고짜 가서 ‘나와 운우지락을 나누지 않겠나?’ 이럴 정도로 천하연은 그쪽 방면에서 담대하지 못했다.
김무공이 순순히 수락할지도 의문인 데다가, 애초에 자신의 아비도 쉬이 허락하지 않을 거다.
만약 성공한다 해도 들키는 순간 김무공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문득, 꿈속에서 자신이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미쳤구나. 미쳤어.’
천하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생각해봐도 무슨 생각으로 내뱉은 건지 모르겠다.
이번 역시 둘만의 비밀로 하면 그만이라니.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김무공과 자신은 이미 수많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고, 비밀로 하면 그만이긴 하지만....
“하아....”
입 밖으로 천하연이 깊은숨을 흘렸다.
“무슨 고민 있어?”
어느새 씻는 걸 끝마치고 자신의 지척까지 다가온 김무공이 물었다.
“아니다. 사소한 고민이구나.”
마음을 다잡고 평소처럼 천하연이 답했다.
“그럼 다행이고. 수련하러 가려는데 같이 갈래?”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천하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낫겠지.’
지금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
바위에 파도 부딪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일출이 시작되면서 눅눅한 대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진기가 섞인 숨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여느 때처럼 천마군림보의 묘리가 담긴 보법이었지만 상대는 그것을 산들바람처럼 받아넘겼다.
의념의 힘도, 천마군림보의 제약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상대방 주변의 공기가 반투명하게 출렁이고, 막대한 기파에 노란 모래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마침내 서로의 손이 얽히는 순간.
쾅- 폭음과 함께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정중앙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천하연의 손이 부드럽게 내 주먹을 휘감았다.
내가 이전보다 강해졌듯이, 천하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움직임이 평소와 ‘약간’ 달랐다.
무혼으로 얻은 초월적인 직감이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법한 미세한 차이였지만, 분명 천하연의 움직임에는 균열이 있었다.
손을 맞대다 보니 미약한 틈이지만 더욱 크게 느껴졌다.
물론 ‘보는 것’과 그것을 ‘뚫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기에, 공격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작게 모인 미간도 그렇고, 움찔거리는 속눈썹도 그렇고.
평소의 냉정한 천하연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어디 안 좋아?”
타닥-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신경 쓰지 말거라.”
묘하게 뾰로통한 말투로 천하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틈도 없이 몸을 튕겨 이쪽으로 신형을 옮겼다.
쐐애애액-
공기 찢는 소음. 엄청난 가속을 이용한 천하연의 공격은 그저 막는 것만으로도 손이 저렸다.
애초에 ‘그런’ 무공인 건지, 천하연의 천마지존수는 초식이랄 게 존재하지 않는듯했다. 그저 묵빛 섬광을 기감으로 좇아 막는 것만으로도 슬슬 벅찼다.
“얌마, 좀만 살살...!”
입 밖으로 다급히 내뱉었지만 천하연은 화풀이라도 하는 듯 연신 묵빛 기운이 서린 손을 내저었다.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로 하자!”
당당하게 소리쳤지만 천하연은 공격 와중에도 나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잘못한 건 없다.”
“그럼 뭔데?”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저 날카로운 눈매만 봐도 분명 뭔가 있다.
“아까 새벽 일 때문에 그래? 그건 사고였잖냐.”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뭔데 이 처자야.
‘에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모르겠다.
되든 안 되든, 천하연의 미세한 허점을 노리는 수밖에.
최대한 몸을 움직여가며 의념을 끌어모았다.
어설픈 천마군림보로는 천하연의 찰나조차 구속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걸 쏟아붓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시한다.
극도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 천하연이 휘두르는 복잡한 투로를 인지했다.
쿵-
이성보단 감각에 맞춰서, 나는 앞발을 내려찍었다.
발바닥으로부터 막대한 의념이 실린 보법 경파가 뻗어 나가며 천하연의 움직임을 찰나지만 멈춰 세웠다.
슬로우모션처럼 요동하는 시계 속에서, 천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 사이, 나는 남은 내공과 근육을 쥐어짜 권격을 내질렀다.
꽝-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의식이 끊길뻔했다.
분분히 흩날리는 금빛의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오고, 내 몸은 그대로 땅바닥으로 향했다.
대기가 흔들리면서 격렬한 모래폭풍이 일어났다.
모래폭풍의 중앙에, 나는 멍하니 눈만 끔뻑이면서 누웠다.
천하연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종의 이화접목移花接木인가?
정확한 답은 천천히 분석해봐야 알 것 같았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천하연이 곧바로 내 위에 올라탔다.
마치 파운딩하듯이.
자세가 영 미묘하긴 했지만, 천하연의 흥분한 표정은 내 뇌리에 강한 경고성을 날리고 있었다.
“...얌마, 아직 안 끝났어?”
다급하게 얼굴을 가리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둘이 뭐해...?”
상황의 반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대련의 폭음을 듣고 일어난 한여름이 부스스한 눈을 비비면서 나와 천하연을 번갈아 쳐다봤다.
“...!”
화들짝 놀란 천하연이 눈을 부릅떴다.
꽈아앙-!
그리곤, 그대로 주먹을 내리쳤다.
다음화 보기
모래사장에 균열이 질주했다. 천하연의 주먹은 내 뺨을 스치고 바로 옆에 꽂혔다.
출수했던 권을 거두면서 자연스럽게 천하연이 일어났다. 옆으로 눈을 돌리니 끝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구멍이 보였다.
천하연이 내지른, 전사경처럼 회전하는 권격이 땅을 파고든 흔적이었다.
“수련 너무 격하게 하는 거 아냐? 김무공, 살아 있어?”
한여름이 피어오르는 분진 사이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천하연의 마지막 공격 덕에 서로 그냥 격한 수련을 하는 거로 인지한듯했다.
...아니, 격한 수련이 맞긴 맞나?
내 위에 올라탔을 때 봤던 천하연의 상기된 얼굴 때문에 솔직히 좀 이상한 분위기긴 했다만.
다시 돌이켜 보면 그냥 리미트 풀고 수련한 것에 가까웠다.
“오냐. 잘 살아 있다.”
몸을 탈탈 털면서 일어났다. 까슬까슬한 모래가 몸 안에 잔뜩 들어간 데다가, 입가에까지 달라붙었다.
“미안하구나, 조금 흥분했다.”
천하연이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한 채 사과했다.
“아냐, 나름 신선하네. 확실히 몸은 풀렸어.”
어깨를 빙빙 돌리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주변을 초토화하면서 비무했음에도, 몸에 받은 충격은 손목 정도를 제외하면 없었다.
그마저도 슬슬 회복되고 있는 참이다.
“나도 내일부턴 같이 해야겠어.”
한여름이 해변에 펼쳐진 참상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지?”
천하연을 보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몸을 섞어서 그런가, 아까까지 이상했던 천하연의 반응도 조금은 나아졌다.
그나저나, 아무리 수련을 해도 천하연에게 닿는 건 요원하고만. 천하연에게는 유니콘 신공도, 협인지로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