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하지만 다르다. 마우이는 알고 있나?”
“여기서 폴리네시아 신화 강의라도 하게?”
“역시 자네는 똑똑하군. 이 섬의 전설에 따르면 ‘인간의 영웅’인 마우이가 불의 여신인 마후이카의 목을 베었다고 하지. 잘려나간 불의 여신 목은 이후 불을 얻는 도구가 되었고.”
김무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둘은 서로를 탐색 중이었다. 풍지해의 경지는 완숙한 초절정. 이것도 최소로 잡은 거였다. 초정절 극인 천하연과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원래라면 승산 따위는 없었다.
“그 구슬이 마후이카의 목이라도 된다는 얘기냐?”
“그건 모르는 일이지. 다만, 이건 게이트 사태가 발발하기 전부터 이 섬에 존재했던 거라네. 그러니까 ‘게이트 코어’ 같은 게 아니란 말이지. 원래 육식성인 타마토마를 초식성 ‘변종’으로 어떻게 만들었을 거 같나? 간단하다네. 이 구슬이 타마토마라는 마물이 가진 악의를 흡수했거든. 말도 안 되는 일이지.”
“....”
입꼬리를 살짝 올린 풍지해 교수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이건 인간이 다루기에 너무 위험했다네. 아카데미에서는 꼭꼭 숨겼지만, 혈교는 이미 이것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지. 내부에 담긴 막대한 악의를 조금만 건드려 주면 어떻게 되는지.”
“마치 자신은 혈교도가 아니라 말하는 것 같은데?”
“서로 이용하는 관계지. 무림에는 명문만 있는 게 아니야. 나 같은 잡초도 있는 법이지. 잡초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네. 여기 생도들 같은 명문 귀족 나으리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김무공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변명은 됐다. 어차피 무공 한 자락 얻으려고 혈교에 의탁했다든지 그런 잡스런 이유겠지. 네놈의 역겨운 행위를 굳이 변호할 필요는 없다.”
“그래. 자네는 협객이었지. 나는 예전부터 협객이라는 놈들이 아주 지긋지긋했다네. 뭐하러 그렇게 피곤하게 살까. 아주 약간만 포기하면 이리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것을.”
“무인이라는 놈이 혀가 길다.”
경멸의 어조로 말을 내뱉으며, 김무공이 자문했다.
상대는 남자인가? 남자다.
이것은 협俠이 맞는가? 당연하다. 혈교의 주구인 풍지해조차 김무공을 협객이라 칭했다.
천마신공이 마공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사람을 규정하는 건 행동이지 무얼 익혔냐 따위가 아니다.
그리하여.
폭발적인 진기가 김무공의 전신 혈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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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아권狼牙拳 풍지해偑智海.
그는 복건 침식경계지대에서 태어났다. 침식지대 근처라곤 하나, 인간의 생명력은 끈질겼고 끔찍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침식지대 인근의 삶은 쉽지 않았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살해당하기 일쑤였고, 왕처럼 군림하는 수장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했다.
지옥. 그곳은 지옥이었다.
물 한 모금 먹을 자유도 어린 풍지해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고기를 씹으며 아비도, 어미도 누군지 모른 채 풍지해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어느 날 무공 고수 한 명이 마을을 찾아왔다.
마을 내의 끔찍한 참상을 본 무공 고수는 악적을 처단한다고 수장의 목을 베어버린 뒤, 표홀하게 사라졌다.
규칙을 정해 억제하던 마을의 수장이 사라지자, 지옥은 더한 지옥으로 변했다. 모든 게 혼란에 휩싸였다.
풍지해는 그 순간, 마을을 탈출했다.
그의 나이 열넷이 되었을 때였다.
정처 없이 걷다 도착한 곳은 침식지대 공략을 위한 임시기지였다.
다행히 그곳의 삶은 침식경계지대 마을에 비하면 천국과도 같았다.
육합권六合拳과 삼재심법三才心法이라는 무공도 어찌어찌 익혔다.
비록 무책임하게 마을을 더한 지옥으로 만들고 떠나가긴 했으나, 신과 같았던 마을 수장을 베어버린 무공 고수의 뒷모습은 풍지해의 뇌리에 강하게 틀어박혔다. 자연스레 무공에 대한 집착이 더해졌다.
특이한 변초도 없는 삼류 무공 육합권.
운기토납법에 가까운, 안정적인 걸 제외하면 아무짝에도 장점이 없는 삼재심법.
둘 다 삼류 무공의 대표주자나 다름없는 열등한 무공이었다.
이류는커녕, 일류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힘들어야 정상인.
그러나 운이 좋게도, 풍지해의 자질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침식경계지대를 전전하는 낭인으로 살면서 그는 자신의 무공을 보완하고, 발전시켰다.
저잣거리 삼류 무공 육합권은 그를 대표하는, 실전적인 낭아권狼牙拳으로 변했고.
삼재심법은 이름만 같은 아예 다른 심법이 되었다.
풍지해의 나이 서른, 마침내 절정 고수가 되었을 땐 세상 모든 걸 손에 쥔 느낌이었다.
낭아대라는, 휘하에 번듯한 낭인 집단도 거느렸다.
그가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풍지해를 보고 늑대들의 왕이라 칭하기도 했다. 비록 소수에 불과했지만.
십 년.
십 년의 세월 동안 풍지해는 무공을 갈고닦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풍지해가 익힌 무공으로는 평생을 노력해도 초절정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다. 자신은 늙을 것이고, 그렇게 전성기가 지나가는 순간 그대로 끝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계속해서 강해지는 건, 명문의 무공에나 해당하는 얘기였다. 잡스런 무공으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외의 균형이 어긋나면서 본래의 경지를 유지하는 것조차 벅찼다.
낭인 생활을 하며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절정이라는 게, 저잣거리 낭인들이 보기엔 대단한 경지지만 ‘명문’의 제자들에게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걸.
어릴 적부터 영약을 복용하고, 벌모세수를 받으면서 절세의 무공과 체계적인 수련을 받는 후기지수라면 약관의 나이에도 도달하는 게 절정이라는 경지였다.
기재라 불리는 자들이면 훨씬 어린 나이에도 가능했다.
물론 대종사의 자질을 지녔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달마나 초대 천마 같은 대종사에게는 스승이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세상만사가 그들의 스승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풍지해의 자질은, 소위 말하는 명문의 제자들에 비해서도 결코 낫다고 볼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일반인 사이에서 뛰어난 것이지, 뛰어난 자들 곁에서는 그도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다. 늑대들의 왕이라는 건, 결국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늑대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호랑이와 사자가 수두룩한 무림에서 늑대들 사이의 왕이라 해봐야 무에 대단할 게 있겠는가.
나이 사십이 되어도 초절정의 벽은 여전히 드높았다.
무공 수련을 위해 모든 낭인 활동을 접고, 낭아대도 해산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좌절했다.
그때 풍지해에게 손을 내민 게 혈교였다.
혈교 팔사도.
그를 본 순간, 풍지해는 자연스럽게 혈교의 손을 잡았다.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생전 보지도 못한 귀한 영약과 새로운 무공이 주어졌다.
멸문한 문파에서 유출된 진신절기라 하였다. 중국이 침식지대로 바뀌면서 혈교는 그런 무공을 대단히 많이 확보했다고도 덧붙였다.
영약의 힘과 새로운 무공, 팔사도라는 자의 지도.
이 셋이 합쳐지자, 풍지해는 놀랍도록 쉽게 초절정의 벽을 넘었다. 십 년의 세월이 무상하게, 채 일 년도 걸리지 않았다.
혈교는 풍지해에게 그리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풍지해에게도 좋은 제안들이 가득했다.
양심을 ‘조금만’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어렵지 않았다.
지옥에서 살아남고, 낭인으로 오랜 세월 지내온 풍지해에겐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특별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내려온 명령이긴 해도, 이번 역시 간단한 일이었다.
혈교의 비술을 작동시켜 균열을 일으킨다. 타마토마의 이상을 빌미로 섬에 들어온 뒤 핵에 담긴 악의를 혈교에서 만든 특수한 구결을 통해 자극하고, 혼란이 발생한 틈에 만만한 생도 몇만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폭주한 타마토마는 생도들로서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어쩌면 몇 정도는 타마토마를 상대하다 자연스럽게 사망할 거다.
혈교에서는 굳이 다 죽이라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하였다.
교수라는 직책도 있으니, 방심한 생도들을 처리하고 타마토마의 먹이로 줘서 증거까지 인멸하는 건 풍지해로선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하면 혈교가 자신에게 무얼 줄지, 그것만 기대하던 차에 김무공이 나타났다.
천재.
풍지해는 아카데미 교수로 지내면서 수많은 천재를 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생도들은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벌써 초절정의 벽을 넘으려 하는 생도들부터 시작해서.
이미 초절정에 도달한 천하연이라는 괴물까지.
자신이 가르친 생도들을 죽이라는 명령에 흔쾌히 동의한 이유는, 아마 질투일지도 모르겠다.
김무공.
처음 봤을 때 그의 경지는 미약했다. 태양지체 덕에 내공은 많았으나, 그뿐이었다.
그래서 살귀대주와 혈귀 무리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풍지해도 꽤 놀랐다. 자신이 봤던 김무공의 경지라면 불가능해야 정상이었다.
소속이 없는지, 아니면 신비문파의 전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명백한 천재였다.
자신처럼 ‘천재인 척 착각하는 부류’가 아닌, 대성만 한다면 세상의 운명을 뒤흔들만한 천재. 게다가 풍지해는 그에게서 영웅의 자질까지 엿보았다.
김무공 뿐만 아니라, 지금 1학년에는 그런 천재들이 많았다.
질투든 뭐든 이유 불문하고, 풍지해의 행동으로 인해 많은 게 달라질 것이다.
‘좋구나.’
영웅의 자질을 꺾고, 세상의 운명을 비튼다. 풍지해는 그 사실에 자못 유쾌함을 느꼈다. 자신이 혈교인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한여름이라 했나? 김무공 옆에 항상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던 생도 역시 사이좋게 보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미친놈.”
비릿한 미소를 짓는 풍지해를 보며 김무공이 싸늘하게 뇌까렸다.
무슨 수단을 쓴 건지, 김무공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힘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정도 위압감이면 화경에 가까웠다.
‘말이 안 되는구나.’
저 나이에. 힘을 숨기고 있었나?
풍지해는 낭아권의 기수식을 취하며 삼재심법을 끌어올렸다.
혈교가 전해준 무공으로 인해 과거와도 아예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무공을 낭아권과 삼재심법이라 불렀다.
어쩌면 그건 풍지해에게 남은 일말의 자존심이라 봐도 무방했다.
쿵-
김무공의 발치에서 막대한 충격파가 일었다. 고작 발걸음에 땅이 움푹 파였다. 패도적면서도 쾌속한 신법이다. 공기가 짓눌렸다. 의념의 힘이다.
호흡 한 번으로 김무공의 의념을 해소한 풍지해가 빠르게 팔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접근한 김무공의 손과 풍지해의 주먹이 교차했다. 눈 깜짝할 새에 수십 합이 오갔다.
쩌저저어엉-!
권기 파동과 함께 쇠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주변의 땅거죽에 균열이 가며, 구슬이 진동했다.
‘좋지 않군.’
풍지해의 미간이 좁혀졌다. 구슬이 파괴되면 풍지해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그래선 안 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해진 점은 있었다.
김무공은 화경이 아니다.
단순히 내력이나 근력으로 경지가 나뉘는 게 아니다.
힘의 크기가 화경급이라 하나, 결국 깨달음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그저 크기만 할 뿐이다.
수많은 실전을 겪고, 셀 수 없는 사선을 건너온 풍지해의 직감은 기이할 정도로 발달했다.
실전으로 쌓아 올린 무武.
힘만 강대한 것들을 상대하는 건, 지겹도록 해왔다.
김무공이 내뿜는 강인한 기파를 뚫고 풍지해는 권을 내질렀다. 권면에서 발생한 막대한 충격파가 김무공의 틈새를 노리고 쏘아졌다. 강대한 힘을 역이용하는 이화접목의 묘리가 섞인 공격이었다.
꽈아아앙-
폭음과 동시에 김무공의 신형이 수십 장은 넘게 튕겨 나갔다.
“퉤.”
김무공이 울컥 올라온 핏물을 내뱉었다.
구슬에서 거리를 벌리며, 풍지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얕았다.’
찰나의 순간, 김무공은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김무공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듯했지만, 그사이에 또 발전했다.
“괴물이로구나!”
단호하게 소리치며 풍지해는 신형을 옮겼다. 경험을 쌓게 둬서는 안 된다.
대협의 풍모. 영웅의 자질을 지닌 자들은 역경을 딛고 강해지는 법이었다.
그 전에 죽여야 한다.
이전에 없던 다급함이 풍지해의 주먹에 실렸다.
전신을 저미는 아릿한 통증을 느끼며, 김무공은 이를 악물었다.
근력 : 25(E)->70(S)
내구 : 22(E)->70(S)
민첩 : 24(E)->70(S)
내공 : 61(A)->71(S)
SSSS. 기가 막힌 수치다. 능력치는 분명 김무공 자신이 우위였다.
스탯이 죄다 상한선에 걸려있었다. 천하연조차 능력치만 따지면 현재의 자신보다는 못했다.
그러나.
무공이란 애초에 나약한 인간이 강대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기술이었다.
동물을 본뜬 무공이 많은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신체 능력만 가지곤 풍지해 같은 고수를 상대로 한참 부족했다. 김무공의 강대한 힘을 풍지해가 이용하면서 역효과까지 발생했다.
풍지해의 빛살 같은 움직임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자유자재로 쏟아지는 풍지해의 권법과 각법은 아직 경험이 일천한 자신으로선 너무 난해했다.
무혼의 보조가 없었으면 진작 손발이 꼬여 당했으리라. 괜히 기재들이 넘치는 아카데미에서도 당당히 교수직을 맡아온 게 아니었다.
투로가 괴이했다. 아카데미에서 보던 명문의 제자들이 내뿜는 정갈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새 늑대의 이빨이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다가왔다.
피하고 막았음에도 일부 공격이 김무공의 몸을 빗겨 쳤다. 경파가 칼날처럼 스치고 지나가면서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었다.
여전히 말끔함을 유지한 풍지해와 정반대로, 김무공의 옷은 점차 피로 물들어갔다.
쿠구구구궁-
단단한 돌로 이루어진 분지 절벽에 권장 경력이 박히면서 부서진 바위가 쏟아져 내리고, 대지는 진각이 내뿜는 경파에 움푹 파이고 갈라졌다.